Page 91 - 답문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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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면목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형의 “기(氣)가 소멸하면 이(理) 또한 소멸한
                 다.”라는 말로 보자면 아마도 반드시 “그 열었을 때는 닫는 이치가 소멸

                 하고, 닫았을 때는 여는 이치가 소멸하며, 열지도 닫지도 않았을 때는
                 열고 닫는 이치가 모두 소멸한다.”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호추(戶樞)는 다만 허물 벗은 빈껍데기가 되어 원래 함축한 것이 없는
                 물건이 될 것이요, 굴혈(窟穴)의 유무도 논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형의 소견이 이와 같은지 모르겠지만, 만일 이와 같다면 참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가령 자벌레처럼 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하자면, 굽힌 곳에서는 다만


                 굽힘만 있고, 편 곳에서는 다만 폄만 있습니다.  만약 그 이면의 일을
                 논하자면, 굽힘 속에 어찌 폄이 없으며 폄 속에 어찌 굽힘이 없겠습니
                 까? 형의 여러 가지 말씀은 모두 이면의 일을 알지 못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에 깊이 생각하여 깨달으신다면 전일의 잘못된 길이 또한
                 눈이 햇빛을 보듯 녹아내릴 것입니다.

                   대개 통합해서 말하건대, 형의 마음의 병은 개미와 범이란 두 가지
                 물건에서 생겨나 ‘원래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元不相離]’라는 네 글자

                 에 위독해졌다가, ‘이통(理通)’이란 두 글자에서 고질병이 되었고, 미

                 친 듯 헛소리로 ‘이기(離氣)’나 ‘합기(合氣)’ 같은 허상을 불러내게 되었


                    자벌레처럼……있습니다:원문의 ‘척확(尺蠖)’은 자벌레이다. 《주역(周易)》 〈계
                    사전 하(繫辭傳下)〉에 “자벌레가 몸을 굽혀 움츠리는 것은 장차 몸을 펴기 위함이
                    요, 용과 뱀이 숨는 것은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함이다.[尺蠖之屈, 以求信也.
                    龍蛇之蟄, 以存身也.]”라고 하였다.
                    눈이……것입니다:《시경(詩經)》 〈소아(小雅)〉 ‘각궁(角弓)’에 “함박눈이 펄펄 내
                    리지만 햇빛을 보면 바로 녹아 흐른다.[雨雪浮浮, 見晛曰流.]”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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