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답문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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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공으로 삼고 남의 권세를 끼고 자신의 존위로 삼는다면, 천부
(淺夫)도 오히려 이를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이제 눈금이 없는 저울과 치수가 없는 자 로 오직 기(氣)에만 의지
하여 추뉴와 근저의 공용을 이루고, 이에 홀로 그 존위를 멋대로 차지
하고 그 공을 멋대로 차지하니, 이에 천지의 지극히 공정함과 조화의
신명(神明)이 이러한 이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 마치 두 가지 물건[理氣]이 어둠 속에서 강약을
비교하고 훈벌(勳閥)을 따지는 것 같으며, 또 마치 한 물건[理]이 기
(氣)를 떠나 홀로 서서 조화의 공(功)을 이루는 것과 같으니, 이(理)에
죄를 뒤집어씌우려면 죄명이 없다고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에 타는 자를 구하고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면 빨리 달려가
지 않을 수 없고 다급하게 소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미를 관통해
눈금이……자:주희가 이단의 학설을 비판한 말이다.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13 〈변이단(辨異端)〉에서 “만일 이와 같이 본다면 이는 단지 눈금이 없는 저울이
요 치수가 없는 자인 것이다. 만약 성문(聖門)의 경우에는 (성(性)이) 마음에 있어
서는 발하는 바가 의(意)가 되니 의(意)는 모름지기 성실해야 비로소 되고, 눈에
있어서는 비록 보지만 모름지기 분명하게 보아야 비로소 되고, 귀에 있어서는 비록
듣지만 모름지기 귀 밝게 들어야 비로소 되고, 입에 있어서 담론함과 수족의 따위에
있어서도 모름지기 동(動)하기를 예(禮)로써 하여야 비로소 되는 것이다. 하늘이
백성을 내심에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으니, 불씨(佛氏)의 말은 다만 사물만 있고
법칙은 없는 것이다. 더구나 맹자께서 말씀한 지성(知性)은 바로 물격(物格)을 말
한 것이다.[若如此見得, 只是無星之秤, 無寸之尺. 若在聖門, 則在心所發爲意, 須是
誠始得. 在目雖見, 須是明始得. 在耳雖聞, 須是聰始得, 在口談論及在手足之類, 須
是動之以禮始得. 天生蒸民, 有物有則, 佛氏之說, 只有物無則. 況孟子所說知性者,
乃是物格之謂.]”라고 하였다.
죄를……것입니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10년〉 조(條)에 “신
(臣)에게 죄를 씌우고자 하신다면 어찌 핑계 댈 말이 없겠습니까? [欲加之罪, 其無
辭乎?]”라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자신에게 죄를 씌우려면 핑계 댈 말이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言欲加己罪. 不患無辭.]”라고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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