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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또 하물며 이미 각 도의 유림들이 대궐 앞에서 외치고 또 유

                 현들의 소장(疏章)이 있으니, 간언을 비록 우리가 안 했다 하더라도
                 간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병인양요에 대해서는 그 화가 하늘까지

                 차오른 것이 홍수나 맹수보다 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 사람도
                 진언한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기 선생만이 앞장서서 한 장의 상소를

                 올려 척화양이를 말한 뜻이 해와 별처럼 밝았고, 특별히 하늘[임금]
                 의 돌봄을 입어서 우리나라 수천 리로 하여금 금수의 경계에 들어가

                 지 않게 하였으니, 장차 천하 만세토록 말할 것이 있게 한 것은 그

                 공이 아님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사색당파는 우암 선생 때 이르러 군자

                 와 소인의 선악이 나뉘어졌다. 그러니 후세 학자들이 먼저 당파 상에서

                 그 시비를 분별한 연후에야 추향(趨向)의 올바름을 알 수 있다. 어찌
                 우물쭈물한 채 지내면서 선악으로 하여금 구별이 없게 하고 시비로

                 하여금 구분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렇게 한다면 천년의 공론
                 이 행해지지 못할 것이니, 공자의 춘추의 의리가 어디에 있겠는가?”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답하길, “춘추의 필삭은 천하 만세의 법이 되는데, 어찌 지금

                 사람이 무리를 모아 당을 이루고서 터럭을 불어 흠을 찾고, 보기를

                 원수처럼 하여 시를 비라고 하고 비를 시라고 하며 사색당파를 성명(性



                    대보단(大報壇):1704년(숙종30)에 창덕궁(昌德宮) 후원에 설치된 명(明)의 신종
                    (神宗) 황제의 제사를 위한 제단(祭壇)이다. 임진왜란 당시 구원병을 보내어 조선
                    재조(再造)의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대보단은 황단(皇壇)으로
                    별칭되었으며, 영조(英祖) 대에 의주(儀註)가 보강되어 《황단의(皇壇儀)》로 정리
                    되었다. 제향의 대상도 이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과 태조(太祖)가 추
                    가되어 삼황(三皇)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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