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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無乃五百年養士之賴耶? 甚盛甚盛。 然而人之力量, 各自不同,
惟在自家情思勇斷而已。 第不能無奉告者, 孔子請討陳恒之後, 十
哲之列, 何無一人繼起請討者乎? 蓋自有可言之地可言而不言, 與
不可言而言之, 均之未爲中道。 足下之出入崔丈之門, 國人知之。
今日此疏, 或非無益於事而有害於事面乎?
[문] 혹자가 말하기를 “만동묘(萬東廟) 를 철폐하는 것은 크게 춘추
의 의리에 관계되어 여러 유현이 모두 상소를 올리는 데도 오직 기
선생은 병인소(丙寅疏) 에서 한번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왜인가?”라
고 하기에 말하기를, “철폐한 것이 비록 의리에 크게 관계될지라도
이미 대보단(大報壇) 에 합향하였으니, 병인양요와는 차이가 있는
만동묘(萬東廟):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1703년(숙종29)에 민정중 등
이 명나라 신종(神宗)을 위해 세운 사당이다. 그러나 이후 유생들의 집합 장소가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욱 심해지자, 1865년 흥선대원군은 대보단(大報壇)에서
명나라 황제를 제사 지내므로 개인적으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지방(紙榜)과 편액(扁額)을 서울에 있는 대보단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기고 만
동묘를 철폐했다. 1873년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송내희(宋來熙)·임헌회(任
憲晦)·이항로(李恒老)·최익현(崔益鉉)·송근수(宋近洙)·송병선(宋秉璿) 등 유림
들이 소를 올려 이듬해인 1874년 왕명으로 다시 부활되었다.
병인소(丙寅疏):기정진이 1866년(고종3)에 올린 상소로 위정척사 사상이 들어
있다. 즉 외침에 대해 민심의 동요를 막고 민심의 합일을 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정의 정책’을 확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 연해의 관원들이 전투를 효율적으
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정의 명령’을 정비해야 한다는 주장, 유사시에 대비하
여 우리의 지세를 이용하여 공격할 수 있도록 지형을 잘 관찰해야 한다는 주장,
외침에 대비하여 군적(軍籍)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군대
를 훈련시켜야 한다는 주장, 천하에 쓰지 못할 사람이 없듯이 이용하지 못할 방책이
없으므로 널리 좋은 의견을 구하되[求言] 한글로 쓰인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 내정 개혁을 과감히 단행하고 외양의 토대를 이뤄내는[內修外攘] 것이 급선
무인데 이를 위해서는 민심의 결집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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