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4 - 답문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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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민한 심회가 갑자기 씻겨 병에서 깨어나게 한 듯합니다.

               단 마땅히 헤아려 보아야 할 바가 있습니다. 세간에는 사의(私義)와
             공체(公體) 양단이 병행하면서도 서로 어긋나지 않은 경우가 있고,

             서로 어긋나서 병행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이 일로 말하자
             면, 맹세코 요망한 오랑캐[프랑스를 말함]와 더불어 한 하늘을 떠받들

             지 않겠다는 것이 창자 속의 사의(私義)이니, 쇠가 녹고 돌이 닳아져도
             이 마음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문(私門)에서 무기를 만들고 사적(私籍)으로 군인을 모으

             는 일에 대해서는 공체(公體)와는 서로 장애가 되니, 옛날[임진왜란
             때] 용만(龍灣)으로 대가가 떠나신 날이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애통한 교지가 나온 것이 아니라면, 논의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실로

             공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의만을 따르기로 한다면, 굴대부(屈大夫,
             굴원)나 문 승상(文丞相, 문천상)이 어찌 초나라나 송나라가 위태롭기

             전에 미리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겠습니까? 우활하고 썩은 선비의 소견
             이 이와 같으니, 다시 세 번 생각한 뒤 행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십시오.

               그만두지 않는다면 한 가지 방도가 있습니다. 조정에서 이미 군기를
             수리하라는 명령이 있으니, 이런 때에 동지들끼리 힘을 모은 것을 관에

             알리고, 하나의 공해(公廨)를 빌려 군기를 만들어서 관고(官庫)에다

             바친다면, 사민(士民)의 손을 범하지 않고도 넉넉히 관을 도와서 정액
             외로 많은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단 간에 좋은 쪽을 가려서

             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바야흐로 지금은 인심이 어둡고 막혀서 깜깜한 밤과도 같은데 여러
             군자들의 의기가 드높으니, 내가 여러 군자들을 애석하게 여겨 허물없

             는 곳으로 들게 하고 싶은 그 마음이 어찌 얕겠습니까? 대저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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