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2 - 답문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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깥 한직(閒職)에 있을지라도 진실로 큰 병이 들고 늙어 폐질(廢疾)이

             된 자가 아니라면, 이러한 도리는 면할 수가 없다. 비록 새로 무거운
             견책을 받아서 감히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오히

             려 더러는 성 밖에서 머무르면서 일이 안정된 것을 본 뒤에 돌아갈
             것이요, 설혹 불행하여 분문(奔問)하다 죽더라도 명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민 너는 서울에 들어간 지 몇 달이 되었는데 누가 붙잡아서 오랫동

             안 머물러 있었으며, 무엇을 보고 가볍게 떠나려고 하느냐? 그러면

             마음에 편안하겠느냐? 대의(大義)가 있는 바이니, 그 밖의 일은 논할
             것도 없다. ‘진퇴(進退)’란 글자는 사태가 안정된 뒤에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다. 어묵(語黙)도 또한 그렇다.

               오늘날 말할 수 있는 것은 해면(海面)의 이병(利病)이 아니겠느냐?
             이병을 내가 배우지 못했으니 침묵을 기약치 않아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어묵(語黙)을 합당하게 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면에서 말한 ‘좋은 사람이 된다.’는 한 대목 말은 더욱 나의 소견과

             맞지 않다. 헤아려 본 다음에 들어가야 하고 들어간 뒤에 헤아려서는


             안 되니,  이 한 가지는 출신(出身) 이 되기 전에 마땅히 조처가 있어
             야지, 나라가 시끄러워진 뒤에야 비로소 생각해 본단 말이냐? 마치

             굴뚝의 불길이 솟아오를 때 미쳐서 마땅히 어떻게 불길을 꺼야 할지는
             생각하지를 않고, 굴뚝 옆에 나무를 놔두었던 지난 일을 헤아린다면




                헤아려……되니:《예기(禮記)》 〈소의(少義)〉에 “임금을 섬길 때는 능력을 헤아려
                본 뒤에 들어가야 하고, 들어간 뒤에 헤아려서는 안 된다.[事君者, 量而後入, 不入
                而後量.]”라고 하였다.
                출신(出身):문과(文科)·잡과(雜科)에 합격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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