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2 - 답문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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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소당연과 소이연을 일관(一串)으로 말했습니다. 당신의 말에 ‘그
소당연을 인하여 그 소이연을 연구한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만약 이
와 같다면 치지의 공부는 전적으로 소이연에만 달려 있어서 소당연에
는 처음부터 힘을 쓸 수 없게 되니, 정밀함이 부족한 듯합니다.
지행(知行)의 선후를 가지고 논하기로 한다면, 지(知)를 먼저하고
행(行)을 뒤에 한다는 것은 한 가지 일의 지와 행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
다. 마치 겨울에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 서늘하게 해 드리는 도리
를 안 뒤에야 따뜻하게 해 드리고 서늘하게 해 드릴 수 있고, 봉양할
도리를 안 뒤에야 봉양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만사(萬事)는 바로 일사(一事)의 쌓임이기 때문에 지행을 말할 때는
모두 지를 먼저 말하고 행을 뒤에 말하지만, 지행을 병진(並進)한 것은
용공처(用工處)에 나아가서 말한 것입니다. 만약 지가 극진하기를 기
다린 뒤에 바야흐로 행을 한다면 끝내 역행(力行)을 할 때가 없는 것입
니다.
또 몸가짐을 하고 사물에 응함은 경각의 사이라도 없을 수가 없는데,
어찌 한갓 우두커니 쓰지도 않는 지각만을 지키면서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행의 공부는 함께 닦고 함께 나아가야 하
며,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치지를 역행과 대비하면, 치지는 진실로 지에 해당되는 공부입니다.
‘치지를 하면서 경(敬)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으니[未有致
知而不在敬]’, 행도 이미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지를 마땅히
치지를……않으니:《주자어류(朱子語類)》 권9 〈학삼(學三)·논지행(論知行)〉에
나오며, 정이천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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