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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尊慕)하며, 혹여 민멸할까 두려워하여 반드시 널리 퍼뜨리고 길이
전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그 간행을 서두르지 않아도 신속하게 이루
어진 것이 또한 이와 같았으니, 그 또한 능히 선생의 도를 전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유편은 처음에는 모두 흩어져 있어 수습되지 못하였고, 뒤섞여
나와 통기(統紀)도 없었다. 원집에 보이는 것도 문목(問目)이 실리지
않았고, 또한 상세하고 분명함이 결여되어 읽는 자가 이를 병통으로
여겼다.
정재규(鄭載圭) 후윤(厚允)은 곧 고제 중 한 사람으로, 김현옥(金顯
玉) 과 함께 기우만의 부탁을 받고서 글을 모으고 분류를 하였으며,
정정하고 회통(會通) 시켰다. 그런 연후에 위로 태극성명(太極性命)의
(松沙)로, 기만연(奇晩衍)의 아들이며,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다. 기정진의 사후
호남의 문유(文儒)로 추대되었으며, 1896년에 호남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뜻을 이
루지 못하자 삼산재(三山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사후에 장성 고산서원(高山
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유집에 《송사집(松沙集)》이 있다.
서두르지……것이:《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신묘하기 때문에 빨리
하지 않아도 신속하고, 행하지 않아도 이른다.[唯神也故, 不疾而速, 不行而至.]”라
고 하였다.
정재규(鄭載圭):1843∼1911. 자는 영오(英五)·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
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방훈(邦勳)의 아들로,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나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제자로는 정면규(鄭冕圭)·권운환(權雲煥) 등
이 있으며, 합천 경덕사(景德祠)와 장성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유고로 《노백헌집
(老柏軒集)》이 있다.
김현옥(金顯玉):1844~1910. 자는 풍오(豊五), 호는 산석(山石), 본관은 김해(金
海)이다. 산청에서 살았으며 노사(盧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유고에 《산석집(山
石集)》 7권 3책이 있다.
회통(會通):회합변통(會合變通). 곧 이치를 살펴서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성인이 천하의 움직임을 보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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