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7 - 답문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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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절반만 여문 것도 있으니, 어찌 따로 종자가 있어서 그러하겠는
가? 기품의 미악(美惡)은 종자를 심은 토력(土力)이 고르지 않아서
이다. 토력이 어울릴 적에도 종자가 진실로 순조롭게 성공하지 못하
는 것도 있지만, 종자는 도리어 원초의 종자 그대로인 것이다. 때문
에 다만 미발(未發)을 중(中)이라고 하는 것이요, 중(中)은 곧 지선
(至善)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미발일 때 숙특종자(淑慝種子)가 있
다.’라고 하고, 다시 ‘미발 상태의 중을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이는 두 가지의 미발이 있다는 것인가?
‘기질의 성은 태어나면서 함께 생겨난 것이니, 때를 따라서 있고 없
고 하는 것이 아니다.’-수암의 설-에 대한 것도 범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렇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만 소위 ‘본연’이라고 하는 것을 어디에
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단지 기질이 법도를 따라 어둡거나 어지럽
지 않은 것이 이것이다. 그렇다면 중인(衆人)이 기질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진정 어둡지 않으면 어지러워서 맑은 미발일 때가 없을 때를 본
것이다. 만일 미발이라면 이는 기질이 우연히 궤도를 따른 것이니,
이것은 본연(本然)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미 본연인데 다시 아름
답지 못한 종자가 한편에 잠복해 있다면 천하에는 끝내 대본(大本)이
란 것이 없게 된다.
天下不容有兩種子, 雖慝亦根於淑而生者也。 如一穗之間, 得虛秕
半粟者, 豈別有種子而然歟。 氣稟之美惡, 下種之土力有不齊也。
土力之所湊合, 種子固有不得直遂者, 而種子却是元初種子, 故只
未發謂之中, 中便是至善。 今云‘未發有淑慝種子’, 而復云‘非未發
之中之謂’, 則是有雙未發耶? ‘氣質之性, 與生俱生, 非可隨時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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