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9 - 답문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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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구론(舊論)의 뜻대로라면 이(理)와 분(分)이 막히고 끊어져
서, 이내 체용이 이본(二本)이 되고, 현미(顯微)에 틈이 생겨 동(同)은
동(同)대로 이(異)는 이(異)대로 되어 끝내 회통될 기약이 없다. 각각
가리킨다[各指]거나 하나만 가리킨다[單指]는 말에 힘입어, 겨우 그
층절을 배정하였다. 각지(各指)와 단지(單指)에 이 이(理)가 없는 것
은 아니나 역시 피상적인 말이다.
이것은 곧 주석가가 전인(前人)이 이룩해 놓은 말을 분석하는 방법
으로, 예를 들어 ‘천지지성은 오로지 이(理)로써 말하고, 기질지성은
이와 기를 섞어서 말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이면(裏面, 핵심)의 일착
(一著, 한 수)에 대해서는 이 이(理)의 실체로서, 곧 각 가(家)가 의론하
기 이전의 일이다. 그 동이(同異)는 반드시 천연적으로 저절로 있는
체단이 있으니, 어찌 꼭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저앙(低仰)하는
것이겠는가? 외람된 논의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더욱 죄에서 벗어날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
或有難之者曰, “江門論分殊, 自因氣各指以下, 諸先生之論, 猶或
歧而不合。 今子乃言‘一原之中, 已涵分殊’, 所謂如水益深。 何乃以
是而反疑舊論哉? 其得罪也必多矣。” 曰, “一而未嘗無分, 殊而不
害於一者, 乃理之自然。 命之所以不息, 而誠之所以不遺, 非吾之
一時頰舌所能移易也。 知罪一款, 非吾敢知, 若所妄論, 其於舊論
乃相反, 非益深也。 如吾之說, 則理分圓融, 所謂體用一原顯微無
間者, 同中有異, 異中有同, 同異不須論也。 如舊論之意, 則理分
隔斷, 乃是體用二本, 顯微有間, 同者自同, 異者自異, 終無會通之
期矣。 賴各指單指一話頭, 僅得排定其層節, 各指單指, 非無此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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