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답문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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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대답하였다. 이처럼 사망하던 해 초엽에 기정진은 자신의 성리설의
요체를 문인들에게 보여 주며 자신의 학설에 대한 계승의 뜻을 확인하
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기정진은 자신의 학문과 사상의 요체가 문인들
을 통해 계승되기를 희구하였던 것이다.
2) 노사학의 계승과 학설 논쟁
사망하던 해인 1879년에도 병세가 완연하였지만, 기정진은 여전히
문인들의 질정에 대해 친절히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며 노사학의 정
립과 계승에 진력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그해(1879) 12월 21일(음
력)에 이르러 병세가 더욱 심해져 자리에 눕게 되었고, 12월 29일 세
상과 이별을 고하였다. 어느 학파 문인보다 스승에 대한 존경의 뜻이
높았고 학문적으로나 학문 외적으로 결속력이 강하였던 기정진의 문
인들은 신속히 장례 준비에 착수하여 이듬해 2월에 문인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마친 후 경황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문인들은 기정진의 손자
이자 문인 내부에서 신망이 높았던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중
심이 되어 문집 간행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기우만은 여러
지역에 편지를 보내 기정진의 글을 모으는 한편, 가장(家藏)된 초고를
정리하는 일을 본격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석귀와 정의림은 기정진
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계통을 세우는 일, 즉 《답문류편》의
奇正鎭, 《蘆沙先生文集》 附錄 卷 1, 〈年譜〉, 82세 조.
《노사집》 및 《답문류편》의 간행 과정에 대해서는 김봉곤, 〈노사학파의 형성과 활
동〉,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7, 147~149쪽 참조. 이하 내용도 이 논문
및 여러 문집의 관련 내용을 확인하여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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