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 - 답문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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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비근한 일상생활에서 윤리의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실질적인
성리학적 도의의 실현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에 따라 제자와의 문답에
서 수기적인 내용과 처세, 그리고 학문의 방법으로서 독서법과 출처에
대한 문제가 핵심으로 부상하였다. 그만큼 기정진은 학문의 요체를
비단 리기를 비롯한 성리설에만 한정하지 않고 구체적인 도덕의 실천
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정진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비롯한 각종 예 관련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입장을 구체화하였으며,
이러한 입장을 문인들의 질정에 대한 답변과 〈복제설(服制說)〉을 비롯
한 저술을 통해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기정진은 자신의 학문을 구체화하면서 무엇보다 경학(經學)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으며, 문인들에게도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하
여 정주(程朱) 계열 선현들의 문집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강조
하였다. 경전에 대한 체계적 이해를 도모하면서 그는 자신의 경학적
입장을 드러내었으며, 이러한 입장은 〈정자설〉을 비롯한 근원적 실체
에 대한 이해의 도모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물론 이 저작의 저술의
직접적인 계기는 앞서 저술한 다른 저작과 마찬가지로 문인과의 문답
이었을 정도로 그는 항상 문인들과의 문답 과정에서 제기된 여러 의문
점을 친절하게 해소시켜 주려는 세심한 배려를 잃지 않을 정도로 제자
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스승이었다.
내우외환의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말년에 이르러서도 기정진의
학문 여정은 중단 없이 지속되었다. 77세 때에는 중년기에 작성한 〈납
량사의〉의 일부 내용을 수정하면서 자신의 리일분수 체계를 보다 명확
하게 하였으며, 앞서 거론한 바 있는 리 중심의 리기론적 입장이 체계
적으로 제시된 〈외필〉이 작성된 때도 그의 나이 81세 때인 1878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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