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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15)이었을 정도로 그의 사상은 간단없이 말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면
서도 그는 자신의 학문적 입장이 외부에 드러나는 것에 대해 매우 조심
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앞서 열거한 일련의 저작 가운데 그의 생전에
스스로 외부 학자들에게 보여 준 것은 극히 일부였으며, 이러한 태도는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런 만큼 그의 학문과
사상 전모를 온전하게 파악한 문인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제한된
문인들조차 그의 핵심적인 저술을 직접 열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기정진은 사망하기 1년 전
인 1878년(81세)에 이르러 자신의 리기론의 정수가 담긴 〈외필〉의 초
안을 문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에게 보여 주었고, 이때 조성가
는 그에게 태극동정(太極動靜), 소승지기(所乘之氣), 기자이(機自爾),
비유사지(非有使之) 등에 대해 질정하였다. 그러자 기정진은 자신이
80여 년 동안 마음속에 담아 온 리기론적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외필〉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기정진은 병세가 악화됨에도 불구하고 문하에서 수제자로
평가받고 있던 김석귀(金錫龜, 1835~1885), 정재규(鄭載圭, 1843∼
1911), 정의림(鄭義林, 1845~1910)을 불러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이
고스란히 담긴 〈납량사의〉와 〈외필〉을 열람시켰다. 열람에 앞서 기정
진은 제자들에게 “이 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고, 제자
들은 “들은 적은 있지만, 읽은 적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기정진
은 두 저술을 보여 주며 읽게 하였고, 글 읽기가 끝나자 제자들에게
뜻을 물었다. 그러자 제자들은 한결같이 “원컨대 독실하게 믿겠다.”라
奇正鎭, 《蘆沙先生文集》 附錄 卷 1, 〈年譜〉, 81세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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