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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조선 성리학 6대가 중의 한 사람이자 근대 유학 3대가 중 1인
으로 평가받는 기정진은 당대 어느 학자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특징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한 호남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
다. 일찍부터 학문적 성취를 보여 주었던 그는 20대 후반에 이미 당
시 기호 낙론의 대표적인 학자인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 1766~
1840)으로부터 ‘체용(體用)을 구비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당대 노
론계 산림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
1838)로부터는 “남방(南方)의 선비가 그 의귀(依歸)한 바가 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찍부터 형성된 그에 대한 유림계 내부의 높은 평가 이면에
는 여느 학자처럼 스승의 탁월한 명성도 없었으며, 누대로부터 이어져
온 번성한 가학적 기반도 자리하지 않았다. 물론 우암(尤菴) 송시열(宋
時烈)의 문인이었던 그의 5대조 송암(松巖) 기정익(奇挺翼, 1627~
1690)의 학문이 가학으로 이어져 오기는 했지만,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기정진은 특정한 스승 없이 오로지 남다른 학문적 열정과 담대
한 학문적 기획, 그리고 치밀한 사고와 열린 학문 태도를 기초로 깊이
있는 사색과 허심탄회한 학문 토론을 통해 특징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
하였다. 특히 교유 인사 및 문인들과 이루어진 거침없는 학술 토론은
그의 학문적 입장을 구체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토론은
〈리통설(理通說)〉, 〈외필(猥筆)〉, 〈납량사의(納凉私議)〉 등 그의 사
상을 대표하는 3대 저작과 〈정자설(定字說)〉, 〈답인문(答人問)〉, 〈우
현상윤,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 현음사, 1982.
기정진,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부록 권1, 〈연보(年譜)〉, 28세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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