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9 - 답문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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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데 어떻게 발용(發用)에서 원통할 수 있겠는가? 가령 원통이 된다

                 고 할지라도 그 위의 절반이 불원불통(不圓不通)한 것을 보상할 수
                 없으며, 개괄해서 ‘이통’이라 명명해도 명(名)과 실(實)이 서로 걸맞지

                 않게 된다.
                   하물며 이(理)에 이미 본연의 바꿀 수 없는 묘(妙)가 없어서 기(氣)

                 가 있으면 함께 있고 기가 없어지면 함께 없어지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른바 ‘변화’라는 것도 바로 기가 변화하여 이(理) 또한 기와 더불어

                 변화하는 것이고, 이른바 ‘원통’이란 것도 바로 기가 원통하여 이(理)도

                 기(氣)와 더불어 원통한 것이다. 이는 기통(氣通)이지 이통(理通)이
                 아니다. 통(通)을 빼앗아 이(理)에 돌려주고 국(局)을 기(氣)에 명하

                 니, 기(氣)의 입장에서는 원통하지 않겠는가? 선현의 뜻이 결코 신원

                 (信元)의 말과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신원이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이통이란 한 말씀이 정미하여[理

                 通一語精], 능히 천고의 취함을 깨우도다.[能醒千古醉]”라고 했으니,
                 그 뜻이 어찌 훌륭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견(知見)이

                 잘못 들어가 장차 선현의 한 구절로 하여금 한 명의 권신원(權信元)에
                 게 취하게 만드니, 오호라 애석하도다.




                 理通氣局,  先賢蓋有此語,  而吾友信元論理之說,  理通二字,  終始
                 頭戴,  可謂篤信先賢矣。 但恐信元之所謂通,  非先賢所言理通之本

                 旨耳。 請陳膚淺之見, 以竢明者之或有時而裁擇焉。 大抵物有動靜
                 而理無動靜,  物有多寡而理無多寡,  物有生死而理無生死,  有動靜

                 有多寡有生死者,  謂之局,  無動靜無多寡無生死者,  謂之通。 汎論

                 若此時,  信元之見,  恐亦無以大異於我也。 但未知諸般無字,  特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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