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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임진왜란 호남 의병장이 꾼 꿈이란…… 게시기간 : 2021-05-10 1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5-10 10:25

조회수 :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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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2021년 5월 10일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임진왜란 호남 의병장이 꾼 꿈이란……

 

「군중에서 짓다〔軍中作〕」

 
거문고와 노래는 영웅이 할 일이 아니니 絃歌不是英雄事(현가불시영웅사)
칼춤 추며 모쪼록 옥 장막에서 놀아야지 劍舞要須玉帳遊(검무요수옥장유)
훗날 전쟁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佗日洗兵歸去後(타일세병귀거후)
강호에서 낚시질 외에 또 무엇을 바랄까 江湖漁釣更何求(강호어조갱하구)
 

김덕령(金德齡) 지음(『김충장공유사』 권1))

 
 

1. 김덕령이 지은 군중시(軍中詩)

 

이 작품은 김덕령(1567〜1596)이 지은 군중시이다. 군중이란 군대가 집결해 있는 곳을 뜻한다. 따라서 김덕령이 지은 군중시는 군대와 관련되는데, 그 지은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할 무렵에 지은 작품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시의 전체 분위기를 살펴보면, 무장(武將)으로서 호기로움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어느 누구라도 간직할 수 있는 소박한 꿈을 꾸었음을 알 수 있다. 시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거문고를 켜고 노래 부르는 일은 영웅이 할 일이 아니니, 장수라면 칼춤을 추면서 꼭 반드시 옥과 같이 견고한 장막에서 놀아야 한다. 나는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강호에서 물고기 낚는 것 외에 또 그 무엇을 바라겠는가.
 

1,2구에서는 무장은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주로 말하였고, 3,4구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 강호에서 물고기나 낚으면서 살아가겠다는 꿈을 언급하였다. 꿈이란 앞으로 실현하고 싶은 희망 또는 이상을 뜻한다. 꿈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한자어로 ‘포부(抱負)’와 ‘야망(野望)’이 있다. 사전을 참고해보면, 포부는 마음속에 지닌 앞날에 대한 훌륭한 계획을 뜻하고, 야망은 앞날에 큰일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덕령이 꾼 꿈은 포부인가? 야망인가? 당연히 포부에 가깝다 할 수 있는데, 과연 그 꿈은 잘 이루어졌던가? 물음을 던져본다.

그림1

〈사진① 취가정에 걸려 있는 「군중작」〉

 

2. 너무나 아쉽게 빨리 좌절된 꿈

 

김덕령의 자는 경수(景樹)이고,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광주 석저촌(石底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붕변(鵬變)이고, 어머니는 남평반씨이다. 석저촌은 현재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을 말한다. 1788년(정조12) 정조는 김덕령과 그의 부인 흥양이씨, 형 덕홍(德弘)ㆍ동생 덕보(德普)의 충효 정신을 기려 ‘충효 마을’의 이름을 하사했는데, 이로써 석저촌의 이름이 충효리로 바뀐 것이다.

김덕령은 여덟 살 때 종조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에게 처음 글공부를 하였다. 김윤제는 나주 목사를 역임하였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환벽당(環碧堂)을 건립하여 주로 인재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 인재 중에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있다. 그러고 보면, 김덕령과 정철은 김윤제를 같은 스승으로 모신 동문인 셈이다. 어린 김덕령은 용모가 준수하고 기질이 안정하여 눈의 광채가 사람을 쏘아보는 듯하였고, 십리 밖의 물건도 볼 줄 알았으며, 아이들과 어울려 놀 적에도 거동이 이상했으나 용력(勇力)을 드러내지 않아 부모도 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용력은 가끔 드러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아버지가 “용력으로 일 삼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하였다. 아버지는 아들 덕령이 혹시 용력을 믿고, 학업을 게을리 할까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이에 김덕령은 학업에만 집중할 뿐 용력은 감추려 힘썼다. 그리고 20세 때 형 덕홍ㆍ매형 김응회(金應會)와 함께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나아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이는 김덕령이 점차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 접어 들어가고 있음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김덕령은 그의 나이 25세 때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형 덕홍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해 인솔하여 전주(全州)까지 간다. 그런데 덕홍이 “나는 왕사(王事)에 죽을 것이니, 너는 집에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거라.”라고 말하며, 김덕령을 고향집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한 달 뒤 덕홍은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금산 전투에서 싸우다 그만 죽음을 맞이하였고, 1년 뒤에 어머니가 세상을 뜬다. 불행이 연이어 일어난 것이다. 국가의 환난이 지속되고 있던 때에 형이 의병 활동을 하다 죽고, 게다가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김덕령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렸을 것이다. 이때 김응회와 송제민(宋齊民)이 김덕령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한다. 송제민은 동향(同鄕) 사람으로 김덕령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비록 김덕령이 상중(喪中)에 있으나 적을 무찌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의병 일으킬 것을 권유했을 것이다. 김덕령은 처음에 “효를 굽혀 충을 펴기가 곤란합니다.”라는 말을 하며, 김응회와 송제민의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이때 담양 부사 이경린(李景麟)과 장성 현감 이귀(李貴)가 서로 글을 올려 김덕령을 천거하였다. 때문에 김덕령은 처남 이인경(李寅卿)과 함께 담양에서 의병 5,000명을 모집하여 도내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낸다. 이제 김덕령은 의병장으로서 왜적에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춘 것이다. 일찍이 조선후기의 문신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 1633·1688)는 「김 장군 전(金將軍傳)」을 지은 바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김 장군’은 바로 김덕령을 가리킨다. 의병장 김덕령이 전쟁터에서 벌인 활약상을 적은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원수(元帥, 권율(權慄)을 말함)는 영남에 있으면서 그 군대를 초승군(超乘軍)이라 표방(標榜)하였다. 세자(世子, 광해군)는 전주에 있으면서 장군의 의병을 일으킨 소식을 듣고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란 칭호를 내렸다. 이듬해에는 선조께서 사신을 보내 칭찬하고, 또 군호(軍號)를 ‘충용(忠勇)’이라고 하사했다. (중략) 왜적이 장군의 위세를 떨치는 명성을 듣고 ‘석저 장군(石底將軍)’이라 부르며, 벌벌 떨고 감히 기를 펴지 못하였다. 적장 가등청정(加籐淸正)은 몰래 화공(畵工)을 보내 장군의 형상을 그려 오라고 하여 그 그림을 보면서 이르기를 “참으로 장군이로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병졸을 거두어 노략질을 못하게 하는 한편, 여러 곳의 작은 진지를 철수시키고 병졸을 규합하여 대기하도록 하였다.(『서하집』 권14, 「김 장군 전」 일부분.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참조)
 

이 글을 보면, 당시 원수 권율은 김덕령이 이끈 의병군을 ‘초승군’이라 표방하였고, 세자 광해군은 ‘익호 장군’이란 칭호를 내렸으며, 선조는 ‘충용’이라는 군호를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초승’이란 군사들이 날쌔서 말에서 내렸다가 뛰어서 탄다는 뜻이고, ‘익호’란 날개 달린 호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두 김덕령의 용감한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거는 기대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왜적들은 김덕령을 가리켜 ‘석저 장군’이라 했는데, 그 이름만 듣고서도 벌벌 떨고 기를 펴지 못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또한 적장 가등청정은 몰래 화공을 보내 김덕령의 형상을 그려오도록 하여 그 그림을 보고서 ‘참 장군’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도 나온다. ‘석저’와 관련해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기록을 보면, “왜놈들이 듣고 몹시 두려워하여 ‘석저 장군’이라고 불렀으니, 대개 석저가 마을 이름인 줄 모르고 돌 밑에서 나온 줄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라는 내용도 있다. ‘석저’는 돌 석(石) 자와 밑 저(底) 자가 합해진 한자어인데, 왜적들은 이것을 김덕령의 출생지라 생각하지 않고, 한자 그대로 풀이했던 것이다. 김덕령이 그만큼 두려운 사람으로 각인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하니 의병은 물론이요, 관군과 중국 군사들도 김덕령을 모두 의지하였다.

그런데 그 무렵 조정에서 강화를 논의하며, 여러 장군들에게 교전을 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김덕령은 진주에 주둔해 있으면서 여러 차례 싸울 것을 요청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김덕령을 시기하고 공 세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한 이어서 이몽학(李夢鶴)이 호서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죽었는데, 그때에 “김(金)ㆍ최(崔)ㆍ홍(洪)이 함께 반역하였다.”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김’은 김덕령을 가리키고, ‘최’는 김덕령의 별장(別將)인 최담령(崔聃齡)을, ‘홍’은 장사 홍계남(洪季男)을 각각 지칭하였다. 김덕령은 이와 같이 반역을 했다는 이유로 잡혀 여러 차례 심한 고문을 받았는데, 그 억울한 마음을 아무리 하소연본들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선조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고, 신하들도 의견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던 중에 엄한 형벌을 피하지 못하여 감옥에서 세상을 뜨니, 이때 김덕령의 나이 만 29세였다. 김덕령이 죽었다는 소식은 물론 왜적에게까지 알려졌다. 소식을 들은 왜적들은 술을 마시며 기뻐 뛰면서 “호남과 호서는 걱정 없다.”는 말을 했다 하니, 그들에게 김덕령이 어떤 존재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직접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억울하게 30세도 되기 전에 세상을 끝마쳤으니 너무나 아쉽게 빨리 생을 마감한 것이다. 김덕령은 「군중작」 3~4구에서 말한 것처럼 “훗날 전쟁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강호에서 낚시질 외에 또 무엇을 바랄까”라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이제 이 작은 바람마저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림2

〈사진② 충장사 뒤쪽 산에 자리한 김덕령 의병장의 묘〉

 

3. 권필의 꿈에서 부른 「취시가」의 의미는?

 

김덕령은 세상을 떠나고, 7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도 이제 끝이 났다. 당대의 문필가로 유명한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이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김덕령의 시집을 얻는 꿈을 꾸었다. 그 시집의 첫 번째로 놓인 작품은 「취시가(醉時歌)」였다. ‘취시’란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의 모습을 하여 시절을 한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상적인 정신으로 말할 수 없기에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행세를 하며, 시절을 비판한 것이다. 일찍이 당나라 때 두보(杜甫)도 「취시가」라는 작품을 남겼고, 이후 다른 문인들도 같은 제목의 시를 남겼으니, 그 역사는 짧지 않다. 그렇다면 권필의 꿈속에서 김덕령이 부른 「취시가」의 내용은 어떠한가?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술에 취해 부른 노래여 醉時歌(취시가)
이 곡조 듣는 사람 없구나 此曲無人聞(차곡무인문)
나는 화월에 취하고 싶지 않고         我不要醉花月(아불요취화월)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 않다 我不要樹功勳(아불요수공훈)
공훈을 세우는 것은 뜬구름이요 樹功勳也是浮雲(수공훈야시부운)
화월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라 醉花月也是浮雲(취화월야시부운)
술에 취해 부른 노래여 醉時歌(취시가)
내 마음 알아주는 이 없으니 無人知我心(무인지아심)
장검으로 명군 모시길 바랄 뿐이다 只願長劒奉明君(지원장검봉명군)

(권필, 『석주집』 권7)

 

이 노래의 요점은 화월에 취하고 공훈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월에 취하고 공훈을 세우는 것은 모두 뜬구름과 같기 때문에 사실 아무런 쓸모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검으로 훌륭한 군주를 모시고 싶다고 하였다. 이는 「군중작」에서 말한 꿈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나 어느 면에서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공훈을 세우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 것은 나라에 충성할 뿐 어떤 다른 것을 바란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취시가」를 들은 권필은 시를 지어 김덕령의 억울한 마음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으니, 비록 현실은 아니나 두 사람이 서로 진정한 소통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필은 송제민의 맏사위이다. 송제민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덕령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던 사람이 아닌가? 때문에 김덕령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느 누구보다 심히 슬퍼했다. 그리고 그 슬픔을 담아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하였는데, 아마도 평소에 권필에게 김덕령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죽었다는 것을 자주 이야기 했을 것이다. 권필의 꿈속에 김덕령이 나타나 노래까지 불렀으니 이러한 짐작은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1890년에 김덕령의 후손 김만식(金晩植)이 충효동에 김덕령을 위해 누정을 지었는데, 그 이름을 ‘취가정(醉歌亭)’이라 하였다. 곧, 권필의 꿈속에서 김덕령이 부른 「취시가」에서 힌트를 얻어 누정의 이름을 정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림3

〈사진③ 취가정 전경과 판액〉

 

4. 죽어서 영원히 우리 곁에 남다

 

김덕령이 죽은 이후 60여 년이 지난 1661년(현종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었고, 1668년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또한 1681년(숙종7)에 다시 병조 판서로 추증되고, 1788년(정조12)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었으며,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와 같이 김덕령이 죽은 이후 나라에서는 그를 신원시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였다. 또한 김덕령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나 빛고을 광주를 중심으로 우리 곁에 남아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내고, 광주의 중심가에 ‘충장’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닐까?

그림4

〈사진④ 충장로 유래를 적은 알림판. 이 알림판은 충장로5가가 끝나는 지점에 있다.〉

 

<참고 자료>

권  필,  『석주집』
김덕령,  『김충장공유사』
김  육,  『해동명신록』
이민서,  『서하집』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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