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담양 고인후 유적과 고광순 항일 전적 게시기간 : 2026-11-10 07:00부터 2030-12-24 21:26까지 등록일 : 2026-11-02 14:3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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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고인후 유적」은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 위치한다. 임진왜란 의병 관련 유적으로, 묘소·묘비·부조묘(불천위 사당)를 중심으로 전통 제향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역사적 기념물이자 역사인물 유적이다. 구례 연곡사 경내에 있는 고광순 항일전적지와 순의비는 대한제국기 의병유적으로, 고광순이 고인후의 직계 후손인 점에서 길이 기려야 할 현장이다. 고인후(高因厚, 1561~1592)는 광주 압보촌 옛집에서 출생했다. 지금의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남구 압촌동이다. 본관은 장흥, 자는 선건(善健), 호는 학봉(鶴峯)이다. 형조좌랑 고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1502~?)이고, 아버지는 의병장 충렬공(忠烈公) 제봉 고경명(1533~1592)이며, 어머니는 부제학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 고인후는 고경명의 차남이며 형이 의병장 효열공(孝烈公) 고종후(高從厚)이다. 배위는 함평이씨 이경(1538~1592)의 딸이다. 부친과 순국한 충효쌍전의 의병장 고인후 고인후는 임진왜란 시 1592년 금산전투에서 부친 고경명과 함께 순국하였다. 1629년(인조 7) 아들 고부천(高傅川)의 1등급 원종공신 공훈 책록에 따라 의정부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1694년(숙종 20) ‘의열(毅烈)’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786년(정조 10)에 고인후와 고종후는 충렬공 고경명의 아들로서 모두 순절하였으므로 ‘부조지전(不祧之典)’의 명을 받았다. 창평 유학자 고시옥 등이 상소를 했다. 이에 국부조묘가 건립되었 다. 유일무이 삼부자 부조지전 집안이다. 고인후 묘소는 손좌건향(巽坐乾向)의 형국으로 조성되었다. 봉분 뒷면이 손향 동남쪽, 앞면이 건향 북서쪽이다. 묘역의 전면부는 묘비, 상석 그리고 향로석이 위치하는데 상석은 원형의 받침돌 4개를 붙여 만든 직사각형 모양이며, 상석 앞면에는 향로석이 상석 뒷면에는 고인후 선생의 생전 업적과 행적을 기록하는 묘비가 위치한다. 봉분 전면에는 당시의 유교 문화와 미의식이 반영된 독특한 문관의 복장을 한 문인석과 예술적 가치가 높은 운족(雲足), 앙련, 복련을 새긴 망주석이 좌우로 배치되어 묘역의 상징성이 있다. 고인후 묘소는 묘비·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이 배치되어 조선시대 묘제를 온전하게 갖추고 있으며 특히 묘역을 둘러싼 송림 경관은 전통 입지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 고경명과 고인후 부자 묘소는 금산전투에서 1592년 7월 정묘일(10일)에 순국한 뒤 화순 흑토평(黑土坪, 현 화순군 동면 구암리 천운장마을)에 10월 경인일(4일) 모셨다. 1609년(광해 2) 3월 경인(9일)에, 고경명은 장성 오동촌(장성읍 영천리 산183-1, 고경명 신도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기념물), 고인후는 창평 수곡리 부동(釜洞) 뒷산으로 이장했다가 다시 셋째 아들 생원 유계(柳溪) 고부집(高傅緝) 묘소 위쪽 유촌(柳村)에 안장했다. 이후 1754년(영종 31) 9월 24일 파묘하고 9월 29일 부동에서 발인하여 10월 9일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고인후 묘소와 묘비
고인후 효자도 - 因厚同死(『동국신속삼강행실도』, 규장각 소장) 고인후 묘갈명비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대제학을 지낸 삼주 이정보(1693~1766)가 지었다. 고인후 6대손 고명겸(高鳴謙)이 『정기록(正氣錄)』 서문을 가지고 가 비명을 청하였다. 이조판서를 지낸 근암 윤급(1697~1770)이 글씨를 써서 1765년에 세웠다. 묘비의 제작과 설치 과정은 고명겸 이 기록한 『치석일기(乙酉七月治石日記)』에 자세하다. 고인후 묘비는 6개월만에 비문을 받아 왔고 무등산에서 빗돌을 구하였고, 대자암동(大慈庵洞)에서 잡다한 석물을 구하여 비석을 운반해 왔다. 11월에 갈고 다듬어 12월 망후(望後)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하여 3월 20일 끝내고 4월 18일에 세웠다. 상석과 동자석은 이전에 비치해 둔 것을 썼고 나머지는 모두가 새로 준비한 것이었다. 묘사와 안장에 관해서서는 6대손 고명겸이 기록한 『의열공 산소 개장시 일기(義烈公山所改葬時日記)』와 고수겸이 남긴 『학봉 선조 개장시 호상기(鶴峯先祖改葬時護喪記)』가 전한다. 1786년 부조지전이 내린 고인후 부조묘 고인후 부조묘(不祧廟)는 1786년 정조 때 ‘부조지전’이 내려진 국가 공인 부조묘로 불천위 신주를 봉안하고 제향을 현재까지 이어 오고 있다. 부조지전 불천위(不遷位)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 지내게 하는 특전이다. 4대로 규정된 봉사 시기가 지난 뒤에도 사당에 모시면서 영구히 기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한 신위를 말한다. 고인후 부조묘는 대한제국기 고광순 의병장의 순국 이후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다행히 후손들의 노력으로 신주(위패)는 보존되었다. 조선시대 가례에서 신주는 조상을 대신하는 것으로 보아, 수해, 화재, 도적 등 긴급한 재난이 발생했을 때 조상의 신주와 유서(遺書)를 최우선으로 구하고, 그다음으로 제기, 마지막으로 집 안의 재물을 옮겨야 한다는 것을 예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이는 예서(《상변통고(常變通考)》)에 근거한 확립된 규범이었다. 고광순 의병장이 순절한 뒤 일본군의 침탈로 부조묘가 화재를 당했는데, 신주만은 목숨을 걸고 잘 보존하여 조선시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인후의 배위 함평이씨의 신주 내함에는 “고 함평이씨 휘 신 신주(故咸平李氏諱信神主)”라 하여 이름[信]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기 활동한 인물의 배위, 즉 16세기 여성의 이름이 확인되는 신주도 가히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할 것이다. 담양 고인후 묘소는 역사적, 학술적 근거에 기반하고 시대성과 경관적 가치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부조묘 불천위 제례 의식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특히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삼부자 임란 의병장 창의정신과 순국은 고인후의 11대 봉사손인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의 의병운동으로 계승되고 호남의 정의로운 저항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제국기 의병장 고광순, 군민이 세운 순절비 녹천 고광순(1848~1907)은 대한제국기에 호남과 지리산 일대를 무대로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대표적 의병장이다. 임진왜란 때 호남 최대 연합의병장으로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제봉 고경명과 제봉의 작은 아들 학봉 고인후 부자로 이어지는 충의 정신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말 그대로 충효쌍전이라 하겠다. 고광순은 자가 서백(瑞伯), 호가 녹천(鹿川)이며, 본래 이름은 광욱(光旭)이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히며 유학자의 길을 걸었으나, 을미사변과 단발령, 을사늑약 등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결국 붓 대신 칼을 들었다. 송사 기우만 등과 함께 호남 의병세력을 규합하며 항일투쟁에 나섰고, 남원의 양한규 의병진과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고광순의 의병활동의 핵심 무대는 지리산 연곡사였다. 연곡사는 화개동과 문수암을 연결하는 천연 요새로, 의병 활동에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고광순은 1907년 연곡사를 중심으로 의병을 훈련하고 군량을 비축하며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 이곳에서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불원복은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병의 염원이 담겨 있다. 1907년 음력 9월 11일 새벽, 일본군은 연곡사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의병들은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인해 고광순과 고제량 등 주요 의병들이 순국하였다. 일본군은 연곡사를 항일의병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불태웠다. 그뒤 연곡사는 여러 차례 중건되었고, 국보 승탑(부도) 등 사찰 유산으로서도 알려졌지만, 그 터는 남도의병 항쟁의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고광순 항일전적 및 순절비
연곡사와 고광순 순절비 고광순이 순절한 뒤 구례군민들은 그의 희생을 기려 연곡사 전적지 현장에 순절비를 세웠다. 1958년, 항일 의병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되던 해였다. 순절비는 높이 166cm 규모로 비좌를 마련하고 귀로 비몸을 세운 형태이다. 비문은 근대 유학자 효당 김문옥이 짓고 고당 김규태가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연곡사 전투의 실제 상황과 남도의병의 항일 정신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추모 공간을 넘어 남도의병 역사교육과 현장답사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권회복의 염원, 불원복 태극기 고광순 관련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유물은 ‘불원복 태극기’이다. 세로 82㎝, 가로 128㎝의 크기이다. 흰 면직물 바탕에 태극 문양의 양방은 홍색으로 박음질하였고, 음방과 사괘는 검은색 천을 잘라 박음질하였다. 태극기의 흰색 바탕의 위쪽 가운데에는 붉은 색실로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의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글자를 자수로 놓았다. 깃대 쪽에는 마직물로 된 고정용 끈이 세 군데 달려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태극기 가운데 ‘불원복’ 글자를 자수로 새긴 유일한 유산이다. 불원복 태극기는 오랫동안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1986년 고광순의 종손 고영준(1939~2024)이 독립기념관에 기탁하였다. 2008년 8월 12일 국가등록문화유산[제394호]으로 등록되었다. 2026년 2월 25일 남도의병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4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불원복 태극기’는 항일의병 정신과 국권 회복 의지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제작 시기 등이 구체적으로 밝혀진다면 국가 지정 보물로도 지정될 것이다.
불원복 태극기(국가등록문화유산) - 1986년에 독립기념관에 기탁되었다가 40년만인 2026년 2월 25일남도의병역사박물관으로 돌아왔다.
수로 놓은 글자 "復" 자 고광순 의병장의 순국은 당대 지식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특히 매천 황현( 1855~1910)은 고광순이 의병 봉기를 준비할 때 격문 작성을 부탁받고도 즉시 응하지 못했던 일을 회한으로 여겼다. 뒤늦게 격문을 작성해 놓고 기다렸지만, 이미 고광순은 연곡사 전투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황현이 지은 고광순의 「약전」에 나오는 사연을 보자. 〈정미년(1907) 정월 초하루에 어떤 사람이 와서 “고 아무개가 남원에서 거사가 실패한 뒤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으며, 다시 의거를 일으키려 하니 선생께서 격문 한 편을 지어 달라”고 전하였다. 나는 사양하며 말하였다. “지금의 형세에서는 격문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힘써 뜻을 굽히지 말고 다시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 그 사람은 섭섭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나는 그래도 격문 한 편을 써 두고 공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아마도 공은 내가 약속을 두려워하여 함께 의논할 사람이 못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매천 황현이 눈물로 남긴 만시 9월에 고광순 부대가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박태현과 함께 연곡사로 달려갔다. 「약전(略傳)」에 “절에는 기와와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고, 불탄 재는 아직도 식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공의 임시로 안치한 무덤이 작은 흙더미처럼 있는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크게 통곡하였다.”라 하였다. 그리고 「연곡 전장에서 의병장 고광순을 조문하다[燕谷戰塲 吊高義將光洵]」라는 만시를 올렸다. 매천은 푸른 산천과 대비되는 전쟁의 폐허, 쓰러진 전마와 까마귀의 모습을 통해 의병전쟁 격전 현장을 생생하게 그리면서도, 이를 국난에 몸을 바친 충의로운 희생으로 승화하였다. 시제에 딸린 세주에는 “고의병장이가 패하여 순절한 뒤 산중 사람들이 그를 가련하게 여겨 멍석에 싸서 채소밭 가운데에 장사 지냈다.[高敗死後 山中人憐之 藁葬菜圃中]”고 항일 의병전쟁 순국 현장 경관을 적었다.(한국고전종합DB) 천 봉우리 연곡은 푸른빛이 가득한데
작은 전투 충사도 국상인 것이라네 전마는 흩어져 논둑 따라 누웠고 까마귀 떼 내려와 나무 그늘에서 나네 우리네 시문이야 무슨 보탬이 되랴 명문가의 명망에는 댈 수가 없네 홀로 서풍 향해서 뜨거운 눈물 뿌리나니 千峯燕谷鬱蒼蒼(천봉연곡울창창) 小刦虫沙也國殤(소겁충사야국상) 戰馬散從禾隴臥(전마산종화롱와) 神烏齊下樹陰翔(신오제하수음상) 我曹文字終安用(아조문자종안용) 名祖家聲不可當(명조가성불가당) 獨向西風彈熱淚(독향서풍탄열루) 新墳突兀菊花傍(신분돌올국화방)
매천 황현 만시
순절비(구례군민 일동 건립)
순절비(앞 부분) 담양 고인후 유적은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부친 제봉 고경명과 함께 순국한 의열공 학봉 고인후의 충절 정신이 깃들어 있다. 묘소·묘갈명·부조묘·불천위 신주가 함께 전승되는 복합 문화유산으로서 조선시대 예제(禮制), 불천위 제도, 향촌 사족 제향 의례를 종합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는데 학술적 가치가 있다. 특히 국가가 부조지전을 내린 국부조묘로, 불천위 신주가 원형에 가깝게 전해지고 있어 조선후기 제례사와 유교 의례문화 연구에 높은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 또한 묘갈문과 묘역 구성, 문인석·망주석·송림 경관 등은 조선시대 사대부 묘제와 장묘문화, 향촌 경관 구조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실증 자료이며, 임진왜란 의병사와 호남지역 충절 인물 연구의 중요 현장 자료로 활용 가치가 높다. 고인후 유적과 고광순의 항일전적지와 순절비, 불원복 태극기, 의병 기록, 담양 창평의 종가와 가묘는 광주 포충사나 금산 칠백의총 등과 연계된 문화유산이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의병에서 대한제국기 항일의병으로 이어지는 충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기리 이어가야 할 것이다. 도움받은 자료 『매천집』
『녹천유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김희태, 「목숨걸고 나라 지킨 의병장의 염원」, 『대동문화』155 우리곁의 문화유산, 2026년 7·8월호 전라남도, 「구례 고광순 순절비와 전적 지정 심의」, 『문화유산위원회 회의자료-사적분과-』, 2025.08.08.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담양 고인후 유산 지정 검토」, 『문화유산위원회 회의자료-사적분과-』, 20265.09.11. 한국고전종합DB 글쓴이 김희태 전 전라남도 문화유산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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