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근현대 시문학] 승려 철운, 시인 조종현 꿈꾼 세상 게시기간 : 2026-11-02 14: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10-29 10:3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호남 근현대 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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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심’으로 그린 세상, 불심이 되다 조종현(1906.2.8.~1989.8.31.)은 전남 고흥군 남양면 왕주리 315번지에서 아버지 조용명(趙鏞明)과 어머니 송장동(宋獐洞)의 장남으로 태어나 선암사로 출가했다. 결혼해서 3남 4녀를 두었다. 그는 1928년 첫 시조를 발표한 이래 330여 편의 시조를 썼다. 본명은 조용제(趙龍濟)이며, 법호는 철운(鐵雲)이고, 자는 대순(大順)이다. 아호는 벽로(碧路)이며, 당호는 여시산방(如是山房)이다. 그는 석범(石帆), 철운(鐵雲), 혹은 조철운(趙鐵雲), 조대순(趙大順)으로, 탄향(灘鄕, 彈響), 조탄향(趙灘鄕, 趙彈響), 조혈해(趙血海)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이름도 한자 표기를 달리하여 조종현(趙宗玄), 조종현(趙宗泫), 조종현(趙鍾峴)을 사용하였다. 그의 다양한 활동과 함께 간단하지 않은 이력을 말해준다.
조종현은 문단 초기에 시조보다 동요를 더 많이 썼다. 그는 “돌아다보면 1929년에 시조 「정유화」를 불교 잡지에, 동요 「엄마 숨바꼭질」등을 조선일보에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30년에는 주로 동요 「떠나신오빠」 등 90여 편을 조선·동아·중외일보에 꽤 부지런히 발표했다.”1)고 술회했다. 승려로 불교개혁운동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때인데 어떤 계기로 동요를 쓰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이지 않다. 그의 말대로 ‘꽤 부지런히 발표’한 동요 90여 편, 혹은 100여 편을 썼다. 처음으로 발표한 동요는 「엄마숨박곡질」이다. 엄마하고 나하고요
順天邑內 가는길에 엄마소리 안나길래 뒤를살작 돌아보니 엄마발서 숨엇서요 바위뒤로 숨엇서요 * 숨은엄마 뵈지안어 숨은엄마 차지려고 바위돌을 안고도니 어머니도 바위돌을 나와가티 안고돌죠 「엄마숨박곡질」전문2) 첫 작품인 동요 「엄마숨박곡질」은 엄마와 숨바꼭질하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동요의 어린 화자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어린이는 엄마와 함께하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신나고 즐겁다. 그렇기에 엄마랑 ‘順天邑內’ 가는 길은 행복한 길일 수밖에 없다. 그런 어린 화자를 놀라게 할 속셈으로 엄마는 발걸음을 멈추고 바위 뒤에 몰래 숨었다. 그것을 또 금세 알아차린 어린 화자는 엄마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김으로써 ‘숨박꼭질’ 놀이가 되었다. 다리 아프다고 투덜거리며 걸어야 할 먼 길을 엄마의 장난으로 화자뿐만 아니라 엄마까지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로 들어간다. 조종현이 쓴 첫 동요임에도 명랑하고 쾌활한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시상의 전환은 당대 동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에게 동심은 어떤 것인지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시 삼매」에 들 수 있는 사람은 바야흐로 「열반」의 경지에 헤엄칠 수 있고, 「열반」의 경지에 자재하는 사람은 비로소 「시 삼매」에 넘나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시심, 동심, 불심! 인간은 순수하면 되지 않을까? 순수한 인간에게는 따로이 「극락」도, 「요단강」도, 「사바」도, 「지옥」도 없을 것이다. 「시 삼매」에 들 때의 시인은 인간의 시인이 아니요, 시인의 시인인 것이다. 영감의 시인의 인간은 괴로운 현실에 파고들어, 달가운 현실을 사는 것이다. 쓰디쓴 인간의 팔만사천 고뇌-번뇌를 씹을 줄 알고, 되씹어서 달갑게 맛을 볼 줄 알기 때문이다.3) 조종현은 그의 시론을 집약했다고 할 수 있는 이 글에서 ‘시심’과 ‘동심’과 ‘불심’을 하나로 보고, 그것이 나오는 것은 ‘순수’라고 한다. 즉 시심과 동심과 불심은 ‘순수’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것은 ‘극락도 요단강도 사바도 지옥’도 없는 상태로 수렴된다. 이것은 시심과 동심과 불심을 하나로 보는 조종현 시론이자 불교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그의 동요는 ‘불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괴로운 현실에 파고들어, 달가운 현실을 사는 것’이 시인이라고 했듯이 작품들은 일관되게 ‘괴로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시론은 불교개혁론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불교동요운동’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요 「成道의 새벽」은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나무나무 가지에 하얀저꽃은
엄마품에 잠들때 몰래폇다요 오늘아침 새벽은 成道의새벽 마지하려 이강산 고히폇다요. 질거웁게 마지할 오늘아침은 까치도 짹! 짹! 반가운듯이 송이송이 꽃송이 머리에이고 집집마다 동무를 깨워준대요. ·····脈月八日을 맞으며····· 佛敎童謠運動의첫소리로! 「成道의 새벽」전문 이 작품에는 ‘불교동요’라는 것을 명시하였고, 작품 말미에 ‘불교동요운동의첫소리로!’라는 작품 창작의 뜻을 쓰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동요를 불교 운동으로 잇고자 한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불교 동요운동이 전개되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는 않는다. 다만 ‘새틀사’라는 소년문예단체에서 활동했을 뿐이다. 그의 ‘불심이 아니면 시심을 가질 수 없고, 시심이 아니면 불심에 접할 수 없다. 시심, 불심은 그저 동심이어야 한다.’거나 ‘동심은 가히 써 ‘정에 들 수’있고, 정중생활-삼매경지는 가히 시를 형상화할 수 있’다거나 ‘신앙은 시라야하고, 시는 신앙이’라야 한다는 주장은 앞서 말한 ‘시심, 동심, 불심!’이 하나여야 한다는 말과 같다.4) 즉 ‘청순한 신앙의 원천을 확보’는 ‘동심’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종현은 이 원칙대로 동요를 썼다. 1930년대 동요 문단은 “수십명의 작품이 매일같이 문화면을 독차지”하던 때로 그의 고향인 고흥의 “목일신”5)도 활동한 때였고, 그가 불교개혁을 주장하는 활동의 정점에 있을 때였다. 동요 쓰기는 한뜻을 가지고 행한, ‘불심은 그저 동심’이라던 주장의 구체적인 실천태였다. ·····가·····
어린남매 두남매 무엇하려고 고무공장 뒷문에 지웃거리나 ㅇ 아마아마 엄마가 보고십허서 엄마찾아 온게지 마중온게지 ·····나····· 어린남매 두남매 도룬거리며 양회굴 머하려 손질을할가 ㅇ 올치올치 쌍고동 불면은 엄마온다 나온다 속삭이나보 「어린남매」전문6) 위는 동요 「어린남매」는 공장으로 일하러 간 엄마를 마중하기 위해서 나온 남매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리고 내고 있다. 엄마가 나올 때를 알려주는 ‘향회굴’을 가리키며 ‘쌍고동’소리를 기다리며 서성이는 어린 남매의 모습에서 현실에서 눈 돌리지 않고 ‘민중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불교개혁론이 숨어있다. 그때의 대부분의 동요는 정형적인 7·5조에 맞춘 모양이 우세하였던 만큼 거기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해서 주요한은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題材는 좀더 細密化’할 것을 요구하고는 있다. 그러나 동심을 통해 고단한 민중들이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론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 밖에도 동요 「직공된누나의노래」, 「헐벗고굶주려도」, 「어린거지」, 「자장노래」, 「어린머슴애」, 「동무를잃고」등은 고단한 민중들의 어려운 현실을 담고 있는데 ‘만당’과 불교청년동맹에서 내세웠던 불교개혁론의 핵심인 ‘민중 속으로’를 구체화한 작품들이다. 그것의 또 다른 실천으로 동요극 「꽃피는동산」이 있다. 사월팔일인 우리 부처님의 거룩하옵신 탄신절을 우리 이강산의 소년소녀동무와 한가지 기쁨에 넘치는 마음과 경건한 정성으로써 손맞잡고 긔렴축하하려는 한꼬타리의 마음을기우려 이동극은 「꽃피는동산」을 씀이 제의 본의란 것뿐이다.7)
부처님의 탄신을 기념하여 ‘이강산의 소년소녀동무와 한가지 기쁨에 넘치는 마음과 경건한 정성으로써 손맞잡고 긔렴축하’하기 위해서라고 밝힌 것처럼 「꽃피는동산」은 축제극이다. 축제극 속에도 어김없이 가난한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더불어 함께하는 어린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조종현이 불교개혁운동과 동요, 동요극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지향한 세계는 ‘민중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시심’과 ‘동심’과 ‘불심’의 일치를 주장하였던 만큼 그가 현실에서 눈 돌리지 못하고 동심을 통해 구체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동요는 단순히 동심으로 바라본 민중들의 고달프고 힘든 삶의 모습이 아니라 결코 외면하고 피해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3. 여백의 미학, 시조와 함께 조종현의 붓끝이 시심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은 불심과 시심을 하나로 본 것에 있다. 그는 1928년 『불교』에 첫 시조 「정유화」를 시작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시조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생전에 『자정의 지구』, 『의상대 해돋이』, 『거 누가 날 찾아』, 『나그네 길』 등 4권의 시조집을 발간했던 그가 시조를 쓰기 시작한 것은 박한영 스님이 운영한 개운사 강원(중앙불전, 현 동국대)에서 유식을 공부할 때 정인보, 이병기, 이은상, 최남선에게 시조를 배우면서부터다. 1920년대의 시조 부흥운동을 이어받은 시조 시인으로, 1960년대 이태극과 『시조문학』을 창간해서 신인들을 발굴하는 등 시조 문학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그가 쓴 첫 시조는 「정유화(庭有花)」이다. 一
심은꽃 두어떨기 가지마다 피엿것만 말업시 가신님은 어이올줄 몰으신가 이마장 내홀로보니 마음아니 쓰리랴. 二 하단곳 만타커늘 어이뒷뜰 가렷든고 無心코 窓박치면 불연듯이 나는생각 꽃푹이 물주든얼골 두눈앞에 어리네. 三 매암이 소리높여 夕陽하늘 울어오고 千里에 님일흔몸 돌아갈줄 몰으올제 히저시 서웃는저꽃 故懷더육 자내네. 四 핏빛의 저花辯은 님의마음 달맛고야 뭐진듯 나는향래 님의넉시 그안인가 花盆에 옴기자한들 님의손짓 앗가워. - 七月二日 故 ××의 追憶 - 「庭有花」전문 이 시조는 ‘석범(石帆)’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작품으로 조종현도 첫 작품이 「정유화」라고 언급하고 있는 작품이다. 기승전결의 구조를 띠고 있는 이 시조는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시조의 형식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수마다 화자의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말업시 가신님’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그가 가꾸었던 ‘꽃’을 통해 ‘말업시 가신님’을 소환하여 그리워하는 마음이 ‘석양’과 ‘핏빛’으로 표출되어 있다. 이은상은 『자정의 지구』 서문에 「생사관공」을 처녀작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정유화」도 못지 않다. 작품을 발표한 후인 1930년도부터는 많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조 문단에 그의 이름을 확실하게 새기게 되었다. 「생사관공」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산 것이 사는 것가 산 것 같지 아니하니
죽음도 그럴런가 죽음 속을 뉘 알리요 눈 감고 스스로 볼 제 죽고 삶이 없구나 세상 것 있다 하니 있는 줄로 보올 것가 있던 것 없다 하니 없는 줄로 아올 것가 모든 것 나오자마자 고대 죽고 마는걸 죽고 사는 것을 없게 본다 없을 것가 본래 없었으니 이제 봐도 없는 것이 없는 줄 아는 마음도 또한 없다 하노라. 「生死觀空」전문
시인이기 이전에 승려였던 그의 생철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의 마지막 시조집인 『나그네길』의 작품들과 다르지 않다. 삶은 ‘운수행각’이자 ‘나그네길’이라는 생철학은 이미 시조 쓰기의 출발에 해당하는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10년의 출가수행이 낳은 생사 일여요, 생사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미 첫수에서 ‘죽고 삶이 없구나’라고 단언하고, 둘째 수에서는 ‘모든 것은 나오자마자 고대 죽고 마는걸’로 확장하고, 마지막 수에 이르러서는 생사란 ‘본래 없었’기 때문에 ‘없는 줄 아는 마음’ 조차도 없다는 것에 잘 드러난다. 시조의 형식미와 운율미도 빠지지 않는다. “서울 동대문밖 대원암 석진에게서 ‘유식’을 연구하던 무렵”으로 “「생사관공」은 유식 공부의 산물이었고, 또 그 뒤로도 그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모든 삼라만상이 다만 심식하나 임을 설법하는 유식철학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불 수 있으며, 또 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당연한 일”8)이었다. 그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중외일보』를 중심으로 많은 시조를 발표하였고, 잡지에는 『불교』와 『동광』에 발표했다. 그는 작품을 발표할 때도 지면을 가려가며 발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작품 어디에도 항일을 주제로 하고 내세우고 있는 작품은 없다. 대신 민족의 문화유산을 소재로, 제목으로 호명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그 작품 중에 「보신각종」이 있다. 그는 잡지 『동광』에 원고 「보신각종」을 보냈다. 그러나 「보신각종」은 일본 총독부 경무국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다.9) 잡지『동광』에 실리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몇 달 후에 잡지 『동광』에 「보신각종」을 그대로 발표하는 비범함을 보였다. 그것을 보면 표면적으로 항일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민족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민족의 문화유산을 호출하는 전략을 펼친 것이다. 시조 「홍화문」과 「융릉」, 「충무공추모」같은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 조종현 시조는 연시조가 많다.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하여 집중적으로 주제를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현학적이기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연시조를 쓴 것은 그런 점에서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작품인 「삼산에 지는 달」은 『매일신보』에 3회에 걸쳐 연재된 시조로 7수에 이른다. 잘 알려진 시조 「의상대 해돋이」는 「동해점묘」 중의 한 수이고, 「나도 푯말되어 살고 싶다」도 26수의 연시조이다. 그의 연시조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특징 중의 하나는 수별로 소제목이 있다. 그래서 각 수를 분리하면 한편의 독립된 시조가 된다. 「동해점묘」중의 한 수인 「의상대 해돋이」가 대표적이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천지 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덩이가 솟는구나 가슴이 용솟음친다 여보게! 저것 좀 보아 후끈하지 않는가. 「의상대 해돋이」전문10)
의상대에서 동해에 떠오르는 해돋이 광경을 ‘천지 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는 직관으로 포착하여 순간적으로 폭발시킨 이 감각 앞에서 더 이상 수사는 필요하지 않다. 이 시조가 성속일여의 단순하고 간결한 청빈, 이것이 바로 ‘각(覺)’의 순간이고, 불타의 가르침이며, ‘시심’과 ‘불심’과 ‘동심’이 하나인 순간인 것이다. 그는 시인은 ‘인간의 괴로운 현실에 파고들어, 달가운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면 시인이 아니고, 시인은 ‘마음의 눈’을 뜨고 있어야 하며 그것을 가공한다고 해서 써지는 것이 아니라 ‘번쩍’이는 마음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전언한다. ‘괴로운 현실에 파고들어 달가운 현실을 사는’ 것이 시인의 임무로 여긴 시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차마 현실에서 눈 돌리지 못하고 슬픔과 아픔을 노래한 것이다. 조종현은 ‘시조’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학자들이 어떤 논리를 전개하였는지 일괄한 후 시조는 ‘시각적으로 ‘시의 노래’ ‘시의 가락’ 또 ‘시의 격조’라는 의미, 어의로서의 곧 ‘정형시’임을 직각적으로 인식케 될 것’이니 명칭도 ‘시조(詩調)’로 표기를 바꿀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11) 그리고 시조에 대한 정의도 ‘본디 자유시 아닌 정형시요 더구나 산문시 아닌 격조시’라고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시조를 향한 그의 관심과 노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기저에는 시조는 인위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깔고 있다. 시조 「피란가는 길1」12)을 보면 알 수 있다. 불바다 되다 보니 재밭이 되다 보니
눈보라 치는 밤을 들려갈 곳 전혀 없다 철없는 어린 것들은 집에 가자 울부짖고. 소낙비 바우듯 낯선 마을 달려드니 멍사모른 개란 놈들 왕왕 짖고 내닫는다 이렇게 초라한 모습 너도 처음 보느냐. <1951. 1․ 4후퇴에 江景 나바위를 지나며> 한국전쟁 중 피란길을 형상화한 이 시조에는 삶의 터전이 모두 ‘불바다’, ‘재밭’이 되어 버려 ‘눈보라 치는 밤’을 피할 곳 없어 괴로운 현실을 담고 있다. ‘집에 가자 울부짖’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바쁜 걸음으로 찾아든 낯선 마을, 뭣 모르는 개까지 짖어대니 고통과 슬픔을 꼭꼭 눌러 앉히고 ‘초라한 모습 너도 처음 보느냐’로 일갈하는 데서 감정을 조작한 흔적은 없다. 이것이 조종현 시조의 격조이다. 이 작품에서 보듯이 현실을 담되 현실을 초월한 시인의 시인이 만나지고, 시조가 ‘시로서의 노래요’ ‘노래로서의 시다’는 전언과 만난다. 그의 시조는 기행시조가 많다. 작품 끝에 시간과 장소를 밝히고 있는 데서 그의 기행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대본산 사찰인 선암사, 통도사, 범어사, 동학사 등의 여러 강원에서 강사를 한 것에서 시간과 장소를 밝히게 된 주된 요인으로 보이나, 무엇보다도 수행 길에 산수와 진경을 보고 느낀 감회 그것이 ‘깨달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구체적인 지명이 제목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많다. 「동해점묘」같은 작품에는 동해안의 명승이, ‘설악산’은 「설악산에서」, 「설악송」, 「설악산단풍」과 호출되고 있다. 그의 시조는 한자어도 많지 않다. 민중 불교를 주장하며 민중과 함께했던 불교사상에 기반한 것으로 어려운 낱말이 없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그렇다고 주제 의식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깊은 사유로 이끈 여백의 미는 그의 시조가 갖은 미학의 결정체이다. 가볍게 쉽게 읽어지지만 결코 가볍게 쉽게 넘길 수 없는 것, 시조 전편이 거의 그렇지만 네 번째 시조집인 『나그네 길』에는 「나그네 길」 연작 83편이 그렇다. 그중에 「나그네 길 1」을 옮긴다. 어디쯤
왔는지 어디쯤 갔는지 내사 모르겠다 오기는 왔다마는 가기는 갔다마는 나는 그저 그 자리. 「나그네 길 1」전문 누구나 알아 들 수 있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짧은 시조이다. 그렇지만 쉽지 않고 가볍지 않은 사유가 있다. 삶을 초월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해탈하지 않고는 그 경지에 갈 수 없을 그것이 종장 ‘나는 그저/ 그 자리.’에 고스란하다. 이 시조가 남긴 여백은 길다. “어려서부터 불교의 신앙 세계에서 자랐고, 또 일찍부터 화엄의 경지를 주무르기도 했다. 그러기에 거리로 나와서도, 역시 그 맑은 마음 하나 지니고 살아온 사람”이었으며 또한 “독경과 강경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또 그것보다도 차라리 시조를 지음으로써 괴로운 인생을 달래어 온 사람”13)이었다. 내가 83년 동안 묵던 여관을 떠나게 되는 신호를 느낀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 믿어진다. 그렇다. 나그네는 떠나는 것이다. 파장이 되고, 해가 질 무렵이면 말이다.
나그네는 훌쩍 떠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밥값을 가리고 여비를 챙겨야 한다. 한 푼도 갚을 것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받을 것도 없어야 한다. 그저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가야 한다. 깨끗이 왔으면 깨끗이 가야 한다. 빚을 지고 가는 것이 죄라면, 빚을 놓고 가는 것도 또한 죄가 아닌가. 주인공(主人公)! 너는 ‘나그네!’ ‘나그네길’을 가야 한다. ‘끝없는 나그네의 길을 그저 끝없이 갈 뿐이다!’ 나그네의 길은 그대로 영원한 길! 너도 가고 나도 가고, 나도 오고 너도 오고, 우리 모두 우줄우줄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 자유의 길! 평화의 길! 차별도 없고, 계층도 없는 큰 길! 평등한 길일 뿐! 큰 스님들이 입적할 시간을 미리 예견하듯이 조종현도 속세에서 나그네로 머문 시간이 다 되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한 푼도 갚을 것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받을 것도 없어야 한다. 그저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가야 한다. 깨끗이 왔으면 깨끗이 가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그는 ‘우리 모두 우줄우줄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 자유의 길! 평화의 길! 차별도 없고, 계층도 없는 큰 길! 평등한 길’을 향해 먼 길을 떠났다. 그래서일까 시집의 제목도 『나그네 길』이다. 지상에서 머문 여관을 떠난 그는 조선 불교 개혁과 민중 불교를 지향하면서 일제의 사찰령을 거부했던 승려로, 1930년대 시조부흥운동을 이은 시인으로, 1960년대 시조의 부활을 위하여 문예지를 창간 주재한 그는 평생을 구도자의 자세를 잃지 않았음에도 그는 스스로 ‘운수행각’이요, ‘나그네길’이라고 일갈했다. 그런데 조종현의 삶에는 일제하의 치열하게 전개하였던 항일운동과 불교개혁운동이 서려 있고, 해방기 생사의 갈림길에서 환속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념대립의 현장이 있다. 또한 한국전쟁과 4‧19혁명과 5‧16 군사 구데타, 그리고 유신시대와 1980년 광주민중항쟁까지 온몸으로 살아낸 역사가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곧 시대의 소리요, 시대를 산 역사의 기록이며, 시인의 삶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아들인 소설가 조정래가『태백산맥』으로 『아리랑』, 『한강』으로 시대를 가로지르며 세상을 움직였다. 선암사, 깊은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 그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에 귀를 씻고 또 씻고, 모난 마음 구석구석을 둥글게 갈고 또 갈아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었는가? 그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 잠시 멈추어 귀를 씻고 모난 마음들 둥글게 합장한다. 푸른 숲을 가로지르는 풍경소리, 지나는 길손들 언 가슴을 녹여 멀리 따뜻한 숨결 보내는 그곳에서 잠시 삶의 가파른 자락을 쉬고 싶다. 깊은 골짜기에 숨어 세상을 엿보는 듯 맑은 물소리 흘려보내는 산사, 이제는 조종현의 작품세계가 선암사의 풍경소리를 타고 널리 널리 퍼지기를 소망한다.
1) 조종현, 「끝에붙임」, 『자정의 지구』, 현대문학사, 1969. 244쪽.
2) 조선일보, 1929. 11. 17. 3) 조종현, 「끝에붙임」, 『자정의 지구』, 현대문학사, 1965. 250쪽. 4) 조종현, 「끝에 적음」, 『의상대해돋이』, 한진출판사, 1978. 84-86쪽. 5) 조종현, 「끝에 붙임」, 『자정의 지구』, 현대문학사, 1965. 244-245쪽. 6) 조선일보, 1930. 11. 23. 7) 조종현, 「꽃피는동산」, 『불교』83, 1931. 8) 이은상, 「머리말」, 『자정의 지구』, 현대문학사, 1969. 9) 조종현, 「끝에 붙임」, 『자정의 지구』, 현대문학사, 1969. 246쪽. 10) 조종현, 『의상대 해돋이』, 한진출판사, 1978. 11) 조종현, 「시조의 名稱再考」, 『현대문학』, 1964. 9. 12) 조종현, 『자정의 지구』, 현대문학사, 1969. 글쓴이 이동순 조선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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