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문헌으로 살펴본 수인산성의 경관과 연혁변천 게시기간 : 2026-10-29 14: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6-10-23 10:1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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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산성은 장흥군 유치면과 강진군 병영면에 걸쳐 있다. 고려시대 때 쌓은 것으로 성곽의 구조물이 잘 남아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1982년에 전라남도 기념물[제59호]로 지정었다. 국가지정 문화유산(사적) 지정을 위한 학술조사와 학술대회도 열린 바 있다. 학술조사 당시에서 정리한 자료를 중심으로 수인산성 관련 학술조사에서는 문헌자료를 통해서 수인산성의 경관과 연혁 변천을 살펴 보고자 한다. 문헌과 관련 인물에 대한 내용을 간략히 해설하고 국역문과 원문, 그리고 『수인산성지』등 수인산성에 직접 관련된 문헌, 『강진현지도』 등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자료나 「유수인록」 등 새로운 자료는 원문(영인본)을 소개한 바 있다. 국역문은 현 위치나 역사 지명이나 행정지명 등에 대해서 주석을 하였다. 수인산성 문헌 자료 가운데 15종의 지리지와 읍지, 진영지와 지도류의 기록을 따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지리지류는 자주 접하는 자료이지만, 특정 유산을 대상으로 정밀하게 훑어볼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이어 2019년 수인산성 국가 사적 지정을 위한 학술대회에서 「장흥 수인산성 관련기록의 내용과 특징」으로 주제발표를 하였다. 앞에서 정리하였던 내용을 보완하여 정리하면서 특징을 살펴본 것이다. 지리지 읍지류, 관찬사서와 연대기류, 문집 등으로 구분하여 해제와 함께 내용을 소개하였다. 수인산, 수인사 등에 대한 내용도 함께 살폈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다른 발표토론자들이 문헌 기록의 중요성을 평가하면서, 학술 논문으로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 이후 몇 자료가 더 확인되었다. 개략적으로 소개한다. 수인산성 기록이 처음 나오는 지리지는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이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기록된 이래, 조선후기의 읍지류와 일본강점기의 군지까지 기록이 나온다. 장흥지역의 지지류에는 수인산이 진산(鎭山)이라는 기록이 중심을 이루고, 강진 지역의 지지류에는 수인산성과 수인산 봉수가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지리지나 읍지류에 실렸거나 별도로 제작된 지도에 대해서도 정리했다. 이와 함께 진영지로서 『전라병영지』와 『수인산성지』를 소개하였다. 수인산성은 조선시대 지리지와 읍지에 그 위치와 규모, 축성 연혁 및 군사적 기능이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고적조에는 고려 말 도강·탐진·보성·장흥·영암의 백성들이 왜구를 피해 수인산성에 들어갔다고 하여, 산성이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피난을 읍치(邑治)의 임시 이전과 관련해 설명하기도 한다. 이후 『여지도서』와 『호남읍지』 등에는 산성의 위치와 성곽 규모, 시설 및 변천 과정이 수록되었다. 특히 『호남영지』에는 을묘왜변 이후 산성이 폐지되었다가 1869년 전라병마절도사 이승연의 건의로 다시 수축된 사실과 수인진 별장 등 군사 조직이 기록되어 있다. 1895년 『호남진지』의 『수인산성지』에는 관원과 군졸, 성문과 장대, 재정 및 운영 사례 등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기록은 수인산성이 고려 말의 피난용 산성에서 조선 후기 전라병영의 배후 방어시설로 기능이 변화한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수인산성 전경
수인산성 수구 수인산성에 관한 진영지 기록은 『전라병영영지(全羅兵營營誌)』와 『수인산성지(修仁山城誌)』가 대표적이다. 『전라병영영지』에는 수인산성의 위치와 규모, 축성 연혁, 봉수시설 및 수인진 별장 등 군사조직이 기록되어 있어 전라병영의 방어체계에서 수인산성이 차지한 위치를 알 수 있다. 특히 1869년 전라병마절도사 이승연의 건의로 산성을 다시 수축한 사실이 나타난다. 『호남진지(湖南鎭誌)』에 수록된 『수인산성지』에는 1870년의 『경오년사례(庚午年事例)』 28개 항목과 1895년의 『수인산성각항조건구별성책(修因山城各項條件區別成冊)』 33개 항목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성곽과 성문, 관원과 군졸, 재정 및 운영 규정 등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들 진영지는 수인산성의 시설 현황과 군사조직, 운영체계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관찬사서와 연대기류, 문집 등은 조선초기 관찬 기록부터 조선후기 민간의 기록까지 다양한 자료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수인산성에 관한 관찬사서와 연대기류는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일성록』 등에 수록되어 있으며, 산성의 수축과 운영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태종실록』에는 1410년(태종 10) 수인산성의 수축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승정원일기』에는 1706년(숙종 32) 전라병마절도사 권순이 산성 개축을 건의한 내용이 전한다. 1870년(고종 7)에는 전라병마절도사 이승연의 산성 수축 완료 보고와 별장 설치, 공사 참여자에 대한 포상 문제가 논의되었다. 1871년에는 전라감사 이호준의 장계에 따라 군졸의 급료와 산성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봉류전과 환곡을 활용하고, 이를 수인산성별비미라 칭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수인산성의 수축과 군사조직 정비, 재정 확보에 이르는 국가 차원의 정책 결정과 시행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향토사 차원에서 정리한 『강진마을사』 에 『수인산성 수보전 분파절목』 등 실제 산성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마을별로 분담하는 내용의 문서가 조사되어 실려 있다. 민간의 기록이나 구전 자료까지도 더 세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수인산성 관련 기록의 특징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수인산성의 입지나 연혁에 관한 기록, 수인산성의 운영에 관한 기록, 수인산의 유람과 인식에 관한 자료 등이다. 첫 번째, 수인산성의 연혁에 관한 자료로 축성에 관한 내용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태종실록』이다. 『태종실록』 기록은 1410년으로 수인산성 관련 기록으로 가장 앞선다. 그런데 뒤이은 기록이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그 내용에 있어 『태종실록』의 수축 기사보다 앞선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고적조의 수인산석성 항목에는 “고려말에 도강, 탐진, 보성, 장흥, 영암의 백성들이 모두 이곳에서 왜구를 피했다(高麗末道康耽津寶城長興靈巖之民 皆避倭寇于此)”라고 한 내용에서 보듯이 고려 말에는 서남해 5개군의 주민들이 피난을 할 정도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하겠다. 입보처로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인산성은 왜구의 침탈 이전 대몽항쟁기에 험산대성(險山大城)으로서 입보용 산성으로 기능했다는 논의도 있다. 이어 태종 10년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산성 수축 기록이 보인다. 『태종실록』의 기록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시기에 경상도 6개소, 전라도 6개소의 산성을 수축한다. 수인산성의 경우, 고려 후기 이후 입보처로 기능을 하였던 산성이 왜구로 인해 기능을 다하지 못하다가 다시 수축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왜구의 침탈로 인하여 남해 연안의 중심이라 할 장흥부의 교군(僑郡)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장흥부는 지금의 장흥군 관산읍 일원에 치소가 있었는데 왜구 침탈로 인하여 1379년에 철야현령관 지역으로 치소를 옮겼다가가 13년만인 1392년 지금의 장흥군 장흥읍으로 돌아온다. 중령산(장흥읍 건산리)에 축성을 해 치소로 삼았다. 고려 말에 왜구로 말미암아 임시로 내지(內地)로 옮겼고, 본조[조선] 태조 원년 임신[1392년]에 성을 수령현(遂寧縣)의 중령산(中寧山)에 쌓아서 부(府)의 치소로 삼았다.(麗季 因倭寇僑徙內地 本朝太祖元年壬申 築城于遂寧縣之中寧山 以爲府治,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장흥도호부)
이처럼 교군하였다가 다시 돌아 와 정비가 되면서 정부의 산성 수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수인산성도 수축논의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장흥부가 임시내천하였다가 일시 보성군과 합해지지도 했는데 이때 장보(長寶)라는 지명이 기록상 나오기도 한다. 이 무렵 임내에 대한 직촌화 과정도 거치게 된다. 장흥은, 1410년(태종 10) 수인산성의 수축 이후 1413년(태종 13) 10월에는 각도의 단부(單府) 고을을 도호부(都護府)로 고치는 지방행정구역 명칭 개정에 따라 장흥도호부가 된다. 이어 중령산의 성이 좁아 1414년(태종 14)부터 장흥도호부의 이설 논의가 있게 된다. 1422년(세종 4) 10월에 장흥도호부 읍치를 수령현 옛터로 옮기고 성을 축조한다. 한편, 1417년(태종 17)에는 전라병마절도사영이 광산현에서 도강군 지역, 지금의 강진군 병영면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수인산성은 전라병영의 배후산성으로 기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전라병영이 도강 지역으로 오면서 도강 치소에 자리를 잡자 도강군은 탐진현과 합해져 강진현이라 하면서 현재의 강진군 강진읍에 자리를 잡게 된다.
수인산성 부근도(강진현지도, 1872년, 규장각)
수인산성 원경(사진 국립나주박물관) 두 번째, 수인산성의 운영에 대한 기록은 『호남진지(湖南鎭誌)』(1895년, 규 12188호) 가운데 『수인산성지』의 『경오년사례(庚午年事例)』와 『수인산성각항조건구별성책(修因山城各項條件區別成冊)』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두 기록은 1870년 수인진 설치 이후의 운영 체계와 1895년 당시의 운영 현황을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경오년사례』는 1870년(고종 7) 수인산성의 수축과 수인진 설치 이후 산성의 운영 실태를 기록한 자료로, 모두 28개 조목으로 구성되었다. 관원과 인근 지역까지의 거리, 산성의 지형과 시설, 재정 및 인력 운영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산성에는 별장을 두었으며, 남문루와 동문루, 남·북장대, 석문암과 청련암 등이 있었다. 제언은 2개소, 민호는 7호, 결총은 1결 55부로 기록하였다. 운영 인력으로 병교·진리·급창·나졸·통인·급수군·부목군 등을 두었으며, 관원에게 지급하는 관황전은 매년 408냥이었다. 말미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순영의 감결도 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수인산성이 전라병영의 배후 방어시설이면서 독자적인 관원·재정·인력 체계를 갖춘 군사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수인산성각항조건구별성책』은 1895년(고종 32) 3월에 작성된 수인산성의 운영 현황 기록으로, 모두 33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별장을 비롯한 관원, 인근 지역과의 거리, 산성의 지형과 시설, 재정 및 군사 인력 등을 기록하였다. 전라병영과의 거리는 남쪽 10리, 강진은 40리, 장흥은 동남쪽 30리이며, 산성 둘레는 30리로 기재하였다. 제언은 3개소로 기록하고 남문루와 동문루, 남·북장대 등 주요 시설을 명시하였다. 관원에게 지급하는 관황전은 34냥으로, 『경오년사례』의 408냥과 차이가 있다. 또한 해남·보성까지의 거리와 통인·급수군·부목군 등의 항목이 빠져 있다. 이 자료는 19세기 말 수인산성의 행정·군사 조직과 재정 운영을 파악하고, 앞선 사례와 비교하여 운영 체계의 변화를 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고문서도 중요한 기록이다. 규장각 소장 문서로는 『전라도 수인산성 별비미성책(全羅道修仁山城別備米成冊)』(1)(1878년, 고종 15, 규장각 奎16280), 『전라도 수인산성 별비미성책(全羅道修仁山城別備米成冊)』(2)(1894년, 고종 31, 奎16281), 『전라도 봉수연대 장졸총록성책(全羅道烽燧烟臺將卒摠錄成冊)』(연대미상, 奎4482) 등이다. 세 문서 가운데 1878년과 1894년의 『별비미성책』은 수인산성의 재정 운영, 『봉수연대 장졸총록성책』은 군사 통신체계와 인력 운영을 보여준다. 따라서 수인산성이 전라병영의 배후 방어시설에 머무르지 않고, 주변 군현의 재정 지원과 봉수망을 통해 운영된 군사 거점이었음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별비미성책은 수인산성을 수축 한 뒤 별비미를 환곡(還穀)으로 분급하고 그 모곡(耗穀)을 작전(作錢)하여 산성에서 사용한 사실을 전라감영에서 의정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장흥, 담양, 영암, 강진, 해남 5개 군현의 환곡으로 2,000석, 모곡은 200석이다. 『봉대장졸총록』은 수인산성을 비롯한 전라도 43개 봉수 연대의 위치와 군원을 적은 것이다.
삭둔리 산성 수보전 분파책
수인산성 수보전 분파절목 『전라도 수인산성 별비미성책』(1)은 1878년) 2월에 작성된 수인산성의 군사 재정 운영 기록이다. 1870년 수인산성 수축과 수인진 설치 이후 군사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별비미(別備米)를 환곡으로 분급하고, 그 모곡(耗穀)을 돈으로 바꾸어 산성의 경비에 충당한 내역을 기록하였다. 장흥·담양·영암·강진·해남 등 5개 군현에 배정된 별비미는 총 2,000석이며, 모곡은 200석이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재해 등의 사유로 상환이 유예되었으며, 장부에는 실제 분급액과 정퇴곡, 유고량 등이 구분되어 있다. 이 문서는 전라감사가 수입과 지출 내역을 정리하여 의정부에 보고한 것으로 수인산성이 여러 군현의 재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운영되었으며, 환곡의 이식 수입이 군사시설 유지와 군졸의 급료를 마련하는 재원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전라도 수인산성 별비미성책』(2)은 1894년 2월에 작성된 수인산성의 군사 재정 운영 장부이다. 1878년의 동명 문서(1)와 마찬가지로 별비미를 인근 군현에 환곡으로 분급하고, 모곡을 작전(作錢)하여 산성의 운영비로 사용한 내역을 기록하였다. 별비미 총액은 2,000석, 모곡은 200석으로, 장흥 100석, 담양 1,200석, 영암 300석, 강진 200석, 해남 200석이 배정되었다. 1878년 기록과 비교하면 장흥과 담양의 배정액은 같으나 영암·강진·해남의 분급액은 변동되었다. 특히 1878년 장부에 보이는 정퇴곡 등의 구분 없이 군현별 분급액과 모곡을 정리한 점이 특징이다. 이 문서는 19세기 말 수인산성의 재정 운영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며, 두 시기의 환곡 배정과 운영 방식을 비교하여 군사 재정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전라도 봉수연대 장졸총록성책』은 조선 후기 전라도 각 지역에 설치된 봉수대의 위치와 군사 편제, 운영 실태를 기록한 문서이다. 정확한 편찬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1책 19장의 필사본이다. 전라도의 봉수연대 43개소를 좌연봉수 18개소, 우연봉수 22개소, 연대 3개소로 구분하고, 봉수 간 거리와 연락 체계, 배속 군원 및 교대 근무 규정을 기록하였다. 수인산 봉수는 장흥 억불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 전라병영에 보고하는 체계로 운영되었다. 억불산 봉수와의 거리는 육로 20리이며, 별장 12명, 군 12명, 보인 24명이 배속되어 매월 초하루 별장 1명과 군 3명이 교대로 수직하였다. 이 문서는 수인산 봉수가 전라도의 광역 군사 통신망에 편입되어 전라병영의 방어와 군사정보 전달을 담당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수인산성수보전분파절목(修仁山城修補錢分派節目)』과 『삭둔리산성수보전분파절목(朔遯里山城修補錢分派節目)』은 모두 1870년 9월에 작성되었으나 성격에는 차이가 있다. 『수인산성수보전분파절목』은 보수 구역과 책임의 분담, 『삭둔리산성수보전분파절목』은 보수 자금 12냥의 대여와 운용을 기록한 자료이다. 『수인산성수보전분파절목』은 수인산성의 보수 비용과 담당 구역을 정한 문서로, 강진군 병영면 삭양리 삭둔마을에 전래되어 왔다. 수인산성은 1869년 전라병마절도사 이승연의 건의로 수축이 추진되어 1870년 공사를 마쳤으며, 이후 성곽과 부속 시설을 유지·관리하기 위한 재정적 부담과 책임을 지역별로 분담하였다. 문서에는 외동문의 체성과 수문은 영하면(營下面), 내동문의 체성과 수문은 옴천면(晻川面), 북문 옹성은 열수면(列樹面), 남문 옹성은 이지면(梨旨面)이 담당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는 산성의 주요 시설을 각 면에 나누어 맡기는 구체적인 관리 체계가 마련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산성 보수가 전라병영의 군사적 업무에 그치지 않고 인근 지역 주민들의 재정적 부담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삭둔리산성수보전분파절목』은 수인산성 보수 비용의 운용과 관련된 문서로, 삭둔마을에 전래되어 왔다. 전라병영에서 수인산성 보수를 위한 자금 12냥을 지급받아 마을 주민들에게 빌려준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산성의 유지·보수에 필요한 재원을 일시에 지출하는 방식뿐 아니라 주민들에게 자금을 대여하여 운용하는 방식도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앞의 『수인산성수보전분파절목』이 성곽과 수문 등의 시설별 보수 책임을 각 면에 분담한 기록이라면, 이 문서는 삭둔마을에서 보수 자금이 실제로 어떻게 운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특히 국가 군사시설의 유지·관리가 전라병영의 감독 아래 지역 공동체의 경제활동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조선 후기 지방 군사시설의 재정 운영과 주민 참여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좌척리산성 수보전 채안(佐尺里山城修補錢債案)』(경오, 강진군 옴천면 기좌리 좌척마을), 『옴천면 좌척동 수인산성 전구냥채안책(唵川面佐尺洞修仁山城錢九兩講債案冊)』(정축-병술, 기좌마을), 『좌척동산 성전강신책(佐尺洞山城錢講信冊)』(기좌마을)도 있다. 세 번째 수인산성 조사와 수인산, 수인사의 유산기록, 시문을 들 수 있다. 기문으로, 「유수인록(遊修仁錄)」은 장흥 유치 출신의 문인 장육재 문덕구(文德龜, 1667~1718)가 1684년(숙종 10) 수인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글로, 『장육재유고(藏六齋遺稿)』에 수록되어 있다. 17세기 수인산의 유람과 문화경관을 알 수 있다. 문덕구는 비가 그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수덕동과 주엽정·목눌당·단풍정을 지나 수인산에 올랐다. 두 암자와 대청봉의 산성터를 살펴보고 수인사에서 승려 명윤을 만나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명윤과 함께 봉화대에 올라 전라병영을 내려다보며 법당봉·설법당·석문 등의 지형과 유래를 들었다. 이어 명윤이 여러 지역의 산천과 사찰을 유람한 경험을 듣고 기록하였다. 이 글은 수인산의 자연경관과 사찰, 산성의 입지와 봉수시설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17세기 후반 수인산성의 유적 현황과 수인사 승려들의 활동, 지역 선비들의 산수 유람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 백사 이항복(1556∼1618)의 「강진 수인산성(康津修因山城)」이나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수인산축성의(修因山築城議)」는 임진왜란기 산성의 방어상 장단점, 19세기 초 산성 수축과 국방체계 개선론을 보여준다. 특히 이항복이 지적한 물희봉과 동문의 취약성을 정약용이 계승하면서도 구체적인 보완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두 기록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강진 수인산성」은 백사 이항복이 1594년(선조 27) 전라도 산성을 순찰하고 방어상의 장단점을 검토한 기록으로, 『백사선생집』 제2권의 「전라도산성도후서」와 관련된다. 이항복은 수인산성이 전라병영 동쪽 10리에 있으며, 남문과 북문은 지세가 험준하여 방어에 유리하지만 동문은 적의 공격에 취약하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동문 밖 물희봉(勿喜峯)을 적이 먼저 점거하면 성 안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하였다. 또한 동문 밖 계곡의 물을 확보하기 위해 옛 성 밖에 둘레 700여 척의 자성(子城)을 쌓아 시냇물이 성 안으로 흐르게 한 사실도 기록하였다. 이 글은 임진왜란 당시 수인산성의 성곽 구조와 지형, 식수 확보 및 방어상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조선시대 산성의 군사적 효용성을 평가한 중요한 사료이다. 「수인산축성의」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강진 유배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수인산성 수축에 관한 건의문으로, 『여유당전서』 제1집 시문집 제9권에 수록되어 있다. 정약용은 수인산성이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이지만 동문과 물희봉이 방어상 약점이라는 이항복의 견해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전라병영의 입지가 방어에 불리하므로 병영을 옮기지 못한다면 수인산성을 반드시 수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성루와 여장, 참호와 병기를 갖추고 물희봉을 성곽에 포함하며, 계곡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지역의 부유층에게 구역을 나누어 축성하게 하고 관직으로 보상하는 재원 확보책도 제안하였다. 이 글은 군사시설의 방어력뿐 아니라 주민 보호와 지역 방위체계까지 고려한 정약용의 실용적인 국방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수인사 침수루 중창 상량문」(18세기 중후반, 김몽룡, 『은암집(隱岩集)』), 「수인산성 남문 중수기」(김녹휴(金祿休, 1827∼1899), 『신호집(莘湖集)』)은 수인사의 중창이나 수인산성의 중수에 관해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유 수인상성(문덕구, 장육재유고)
수인산성 남문 중수기(김녹휴, 신호집) 수인산(수인사) 관련 제영은 14인의 문집에서 19제 20수, 수인산(수인사)을 내용으로 하는 팔경시 9종이 확인된다. 이들 기록을 통하여 진산으로서의 수인산의 위상과 인식에 대한 변천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다양한 팔경시를 통해 장흥과 강진의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진산 그 이상을 넘어 성소로서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수인산 관련 시문으로 제일 앞서는 것은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의 『백담집(栢潭集)』에 「망 병영 숭인산(望兵營崇因山)」이 보인다. 수인산을 숭인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구봉령은 안동 출신인데 전라도 관찰사(1583.05~1583.03 재임)로 순행 시 전라병영에서 수인산을 바로 본 것 같다.
구봉령의 「망 병영 숭인산(望兵營崇因山)」은 전라병영의 상징인 수인산을 배경으로 조선의 국방과 태평성대를 노래한 작품이다. 첫 구에서는 병영 곁에 우뚝 솟은 노적봉을 제시하여 군사적 요충지의 위엄을 드러낸다. 이어 "비린 구름과 살기"라는 표현은 왜구의 침입과 국방의 긴장감이 오랫동안 이어졌던 전라도 남해안의 현실을 상징한다. 그러나 셋째 구에서는 "밝은 해가 하늘을 운행한다"라고 하여 성군의 정치와 나라의 안정을 비유하고, 마지막 구에서는 봉황과 용이 하늘을 나는 길상적 이미지를 통해 태평한 시대와 국운의 융성을 노래하였다. 병영과 수인산을 단순한 자연경관이 아니라 국방과 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며, 수인산 관련 시문 가운데 가장 이른 사례로서 역사적·문학적 가치가 크다. 또한 후대의 수인산 시문들이 산성의 군사적 기능과 역사성을 주제로 삼게 되는 전통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수인산 관련 제영 목록
수인산(수인사) 관련 팔경시 목록
도움받은 자료 『장흥문집해제』
『강진문집해제』 양기수, 「八景小考」-장흥군을 중심으로- 김희태, 「수인산성 관련 문헌자료 해제」, 『장흥 수인산성 종합학술조사』, 장흥군·대한문화유산센터, 2009, 117~140쪽. 김희태, 「지리지 기록을 더듬어 찾아 가 본 수인산성」, 『장흥문화』 31집, 장흥문화원, 2009. 김희태, 「장흥 수인산성 관련기록의 내용과 특징」, 『장흥 수인산성 국가 사적 지정추진 학술세미나』, 장흥군·나라문화재연구원, 2019.12.06. 글쓴이 김희태 전 전라남도 문화유산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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