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성좌] 광주지역 근·현대사의 ‘뿌리 깊은 나무’ 최흥종(崔興琮, 1880~1966) ③ 게시기간 : 2026-10-2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10-15 10:1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항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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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한센인을 위한 삶을 재개하고 1932년경 ‘오방(五放)’이란 호를 짓다 1929년 7월 제주도로 내려온 그는 모슬포교회에 부임하여 목회에 전념하면서 1930년 11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주노회의 창립에 기여했다. 그런데 이 무렵 여수의 조선나환자공제회 회장 이종수가 그를 찾아와 나환자에 대한 지원을 부탁했고 최흥종은 이를 허락했다. 그는 1931년 7월 ‘수토불복증’을 이유로 모슬포교회 담임목사를 사임하고 “앞으로는 사회 및 정치 사업은 관심을 갖지 않을 뿐 아니라 오늘로 매장하겠다(『기독신보』 1931.09.02.)”고 선언했다. 이어 그는 9월 조선나병환자구제회를 설립하고 조선나병환자근절연구회를 조직했다. 이 연구회에는 기독교·천도교·불교 등 종교계 인사와 김성수·박승직·현준호 등 자산가들도 참여했다. 그에 대해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경찰은 이같은 그의 활동을 감시했다. 하지만 구제회와 연구회는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최흥종은 솔선해서 2,700을 기부하는 등 노력했으나 여의치 못했고, 결국 1932년 6월 서울의 한센인 30여 명과 함께 여수 애양원으로 내려갔다. 그는 크게 낙심했고, 이 무렵 스스로 ‘오방(五放)’이란 호를 지었다. ‘오방’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현실문제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럼에도 그는 한센인을 위한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1933년 4월 그는 총독부를 방문하고 경무국장과 위생국장을 면담하면서 한센인을 위한 6개 항을 진정했다(흔히 이 무렵 그가 한센인 수백 명과 함께 광주에서 서울 총독부까지 걸어서 이른바 ‘구라행진(救癩行進)’을 벌였다고 하지만 필자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당대의 자료는 물론 후대 최흥종의 회고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1935년 ‘거세수술’을 하고 1937년 「사망통지서」를 발송하다 최흥종은 1935년 9월 서울에서 세브란스병원 의사 오긍선으로부터 ‘거세수술’을 받았다. ‘오방’이란 호를 붙인 데 이어 세속적 욕망과 단절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그리고 목포에서 한센인 구호활동을 계속했으며, 1936년 2월 안창호와 함께 신풍리의 한센인 치료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해 3월 그는 광주농업실습학교 제1회 졸업식에 참석했고, 6월 광주YMCA 운동부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광주YMCA의 활동도 계속했다는 뜻이다. 그러던 그는 1937년 1월 돌연히 모든 외부활동의 중단을 선언한 「사망통지서」를 주위에 발송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본인을 사망자로 간주하시고, 우인명부(友人名簿)에서 삭제하여 주시기를 복망하나이다. 가정에 대하여 오만, 사회에 대하여 방일자(放逸者), 사업에 대하여 방종자(放縱者), 종교에 대하여 방랑자(放浪者) 소위 ‘오방’을 제창하면서도 명실이 불합한 가면극이 왕왕 연출되어 양심상 사이비한 생활을 절실히 참회하고 무익한 죄인이 세사(世事)에 관여하는 것은 유익보다 폐해가 더 될 것을 각오하므로 십자가의 구주 예수만 신뢰하고 범사에 예수의 교훈으로 생활할 것을 맹약하고 이제는 생사간에 예수 이외에 아무것도 없으므로 세사(世事)에 대하여 사망자가 되어 스스로 매장한 것이외다(김교신 일기 1937.01.17.).
이 내용을 보면, 그는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제자 츠카모토[塚本虎二]가 『성서지식』(1936.05.)에 쓴 「사망통지문」과 『성서조선』(1936.10.)에 실린 「가사망(假死亡)」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대해 『성서조선』 발행인인 김교신은 일기(1937.01.18.)에 “거세의 가부는 별문제이고 이렇게까지라도 하여 주 예수께 복종하는 노성도(老聖徒)의 정성에 감복”했다고 적었다.
이 무렵 그는 기성교단에 회의를 느끼고 무교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사망통지서」를 발송한 직후 그는 『성서조선』에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촉(促)함」이란 글을 기고했다. 한국기독교사를 전공한 필자는 이보다 더 신랄하게 한국의 기성교단을 비판한 글은 일제강점기 자료에서 찾지 못했다. ‘교회’와 절연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그는 무등산 증심사 계곡의 ‘오방정(五放亭)’에서 칩거하며 한센인들을 돌봤다. 전남도지사의 요청에 따라 1944년 5월 광주의학전문학교의 설립에 관여한 것이 예외라면 예외였는데, ‘병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1945년 8월 전라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그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광주극장에서 열린 전남건국준비위원회 결성식에 축사를 하기 위해 참석했다가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선출”된 것이다. 좌파와 우파의 연합조직인 건준의 위원장에 그가 추대됐다는 것은 그가 이른바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 모두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27년 신간회 광주지회의 초대 지회장에 선출됐던 것의 재현이었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은 불과 17일이었고, 이후 그는 다시 건준과 거리를 두었다. 9월에는 고려청년당 창립준비회 고문으로 추대됐으며, 초대 전남도지사인 최영욱의 형인 그는 11월 도지사고문회 회장에 선임됐고, 1946년 2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비상국민회의에 전남대표로 참석했다. 1947년에는 광주에 내려온 김구가 오방정을 방문하여 그와 면담했다.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노정객(老政客)’이 무등산 증심사 계곡을 오르며 그를 찾은 이유는 정확하지 않으나, 해방정국에서 정계 참여를 요청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1950년 1월 그는 대한국민당 전남도당부 발대식에서 광주시당 부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일제 말기 정치를 비롯한 일체의 행동을 중단했던 그였으나, 해방 이후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같은 와중에도 그는 한센인 구호활동을 계속했다. 1945년 9월 한국나예방협회를 결성했고, 1948년 3월 광주국민고등학교(삼애학교) 설립에 참여했다. 같은 달 호남신문사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했고, 병자·빈민·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인 호혜원과 송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1964년 「유언장」을 발송하고 1966년 별세하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나 이현필 선생님보다도 더 앞서신 최흥종 목사님께서 1961년에 하신 첫 설교 말씀은 지금도 생생하다. 석가도 공자도 모두 구원받았다. 그때 나는 보수 중에 보수적인 신앙을 지니고 교회 생활을 했었고, 어설픈 전도사들의 가르침만 받아왔었다. 석가는 마귀대장이고, 유교는 빨리 없어져야 하고, 부처는 때려 부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그런 내가 최흥종 목사님 설교 한마디로 불교, 유교와 친하게 되었다. 최흥종 목사님이 ‘석가‧공자는 구원받았다’고 하면 받은 것이다. 거기에는 나 혼자만 설교를 듣고 있지 않았다. 장로님은 물론이고 원근각처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모여든 이들도 있었다. 결핵이 무식한 사람만 걸리는 병이 아니다. 통계로 보면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폐결핵에 더 걸린다. 그 환자들 중에 사회적인 지위나 학벌이 높은 이들이 많았고, 신학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최목사님 설교 말씀에 반감을 지니거나 질문 하나 던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회고가 맞다면 이 무렵 최흥종은 ‘무교회주의자’를 넘어서 ‘종교다원주의자’였던 셈이다. 그는 특히 노자의 『도덕경』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역시 무교회주의자로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심취했던 함석헌이 평소 최흥종을 ‘형님’이라 불렀던 점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964년 12월 그는 「유언장」을 발송하여 다시 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교회를 다닌다고 혹 직분이 있다고 목사나 전도사나 장로나 집사라 하는 명칭으로 신자라 자칭할 수 없고, 예수와 연합한 자라야만(마 7:22~23) 구원을 얻는 진리이다. 내가 보기에는 모든 자녀들이 경제적 질곡에 노예가 되고 처자녀 등의 애착에 중점을 두므로 이중삼중으로 괴뢰적 포로가 되어 해방될 소망이 희소하니 어찌 가련애석치 않으랴, 용감히 회개할지어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이기고 예수를 따를지어다.
여기서 보듯이 최흥종은 한국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여전했다. 보수적인 기성교회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그리 마뜩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를 비판하는 교계의 목소리는 찾기 어렵다. 평생 자신을 던져 예수의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한 그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1966년 2월 단식과 절필을 선언했고, 5월 14일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은 5월 18일 광주공원에서 시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각계각층의 많은 인파가 모여 그의 별세를 애도했다. 그리고 병자·빈민·걸인들도 많이 참여하여 눈물을 떨구며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최흥종은 ‘성자(聖者)’가 아니었기를 바라며 최흥종의 생애를 그린 소설가 문순태의 소설 『성자의 지팡이』(2000)가 나온 이후 어느 때부턴가 그에게 ‘성자(聖者)’란 호칭이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굳이 양보하자면, 필자에게 그는 ‘성자와 같은 삶을 산 위인’이다. 필자가 ‘성자’라는 호칭에 인색한 이유는, 만약 그가 ‘성자’라면 그다지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자는 번민하고 좌절했던 그의 모습들에서 더 큰 감명을 받는다. 그는 한센인 등 약자들을 위한 일관된 삶을 제외하면 수시로 번민하고 좌절했다. ‘오방’이란 호를 붙인 것이 그랬고, ‘거세수술’을 공표한 것이 그랬고, 「사망통지서」와 「유언장」을 발송한 것이 그랬고, 단식과 절필을 선언한 것이 그랬다. 때로는 즉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예정에 없이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투옥되면서 광주지역의 만세시위는 잠시 차질을 빚었고, 1927년 신간회 광주지회장과 1945년 전남건준위원장에 선출됐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정치’ 등 현실문제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다짐만도 얼추 세 번을 헤아린다. 어찌 보면 그는 심사숙고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옳다고 생각되면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실천했다. 1909년 포사이드 선교사가 한센인 여성이 떨어뜨린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했을 때 그는 주저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평생을 한센인과 더불어 살았다. 그라고 해서 처음부터 용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번민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유언대로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이기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았다. 그는 타고난 ‘성자’가 아니다. 자기를 이기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를 따른 그의 삶이 ‘성자’를 닮았을 뿐이다. 그같은 모습이 필자에게는 훨씬 감동적이지만, 필자는 그의 삶을 흉내내는 척이라도 할 자신이 없다. 앞서 살펴본 최흥종의 공적조서를 보면 그가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이유는 3·1운동 참여와 투옥,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과 신간회 광주지회장 역임 정도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비단 독립운동 분야가 아니라도 그를 빼놓고서는 광주지역의 근·현대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전남광주시 남구 양림동의 ‘오방최흥종기념관’과 지근거리에 있는 ‘소심당조아라기념관’ 방문을 권유한다. 그분들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분들이 남긴 자취는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명색이 ‘의향(義鄕)’을 자처하는 ‘전남광주’에 살면서 말이다.
글쓴이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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