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다섯 차례 헐리고도 다시 이어진 정개청 배향 자산서원 게시기간 : 2026-10-14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10-07 10:2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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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자산서원(咸平 紫山書院)은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제동마을에 자리한다. 조선시대에는 무안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함평군에 편입되었다. 이곳은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1529~1590)의 학문과 삶을 기리는 공간이다. 서원은 여러 차례 헐렸지만, 그를 기억하고 제향을 잇고자 한 문인과 후손들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지금의 건물과 남아 있는 기록을 함께 살피면, 중앙 정치의 변화와 호남 사림의 대응이 이 작은 마을에 어떻게 새겨졌는지 알 수 있다. 자산서원의 창건과 다섯 차례의 치폐 자산서원은 1616년(광해군 8) 정개청을 배향하기 위해 처음 세워졌다. 정개청은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고, 문인들은 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신원운동을 펼쳤다. 1616년 신원과 사우 건립이 허락되자 윤암 옛터에 사당을 세웠다. 처음에는 윤암사(輪巖祠)로 불렸으며, 뒤에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후 서원의 존폐는 정개청에 대한 평가, 중앙의 정국 변화, 지방 사림의 공론과 맞물렸다. 서원 건립을 지지한 사람들은 정개청을 억울하게 죽은 학자로 보았지만, 반대자들은 그의 행적과 학문을 문제 삼았다. 이러한 대립은 서원의 훼철과 복설로 이어졌다. 여기서 ‘다섯 차례의 치폐’란 다섯 번 훼철되었고 그때마다 복설이나 제향 회복이 추진되었다는 뜻이다. 다섯 차례 모두 같은 방식과 같은 기간에 건물이 완전히 복구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훼철과 복설―정개청 평가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대립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정개청의 신원과 서원 건립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일어났다. 1624년(인조 2)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정개청의 서원이 공론에 맞지 않는다며 훼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정개청의 직첩이 돌려졌지만, 배향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1657년(효종 8) 민정중(閔鼎重, 1628~1692)과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건의로 서원이 처음 훼철되었다. 정개청의 증손 정국헌은 상소를 올리려 했으나 승정원의 제지를 받았다. 1658(효종 9)년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서원 문제는 한 문중의 제향을 넘어 남인과 서인의 정치적·학문적 대립으로 확대되었다. 숙종 초 남인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호남 유생들은 복설을 거듭 청하였다. 허목(許穆, 1595~1682)·권대운(權大運, 1612~1699)·목래선(睦來善, 1617~1704) 등의 건의가 이어졌고, 1677년(숙종 3) 옛터에 22칸 규모로 서원이 복설되었다. 1679년(숙종 5)에는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국가가 보낸 관원의 치제도 이루어졌다. 두 번째 훼철과 복설―경신환국에서 기사환국으로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물러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자산서원은 다시 존폐의 기로에 섰다. 전라감사와 유생들의 훼철 요구가 이어졌고, 그해 12월 두 번째로 훼철되었다. 사액을 받은 이듬해에 다시 헐린 셈이다. 정개청을 기리는 일이 정국 변화에 얼마나 민감하게 영향을 받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1689년(숙종 15) 왕자 책봉 문제 등을 계기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다시 집권하였다. 나두하 등 유생들은 복설과 사액을 청했고, 조정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복구가 진행되던 1690년 동재·서재와 강당이 불에 탔다. 당시 전라관찰사는 반대자들의 방화라고 보고하였다. 조정은 중건을 계속하도록 했지만 흉년으로 공사가 늦어졌다. 1691년(숙종 17) 두 번째 복설이 이루어졌고, 1692년에는 액호가 다시 내려지고 치제가 거행되었다. 세 번째 훼철과 복설―갑술환국 이후의 갈등과 제동사로의 재건 1694년(숙종 20) 2월 정개청에게 사헌부 집의가 추증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에서 밀려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와 서원 문제도 바뀌었다. 그해 5월 이만성은 자산서원의 훼철을 건의하였다. 다만 훼철 건의와 실제 시행은 구분해야 한다. 세 번째 훼철은 1702년(숙종 28)에 이루어졌다.
호남 사림은 이에 맞서 복설운동을 펼쳤다. 무장의 오정훈 등 84명이 나주 추선사에서 훼철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통문을 돌렸고, 나주 쌍계사에서는 상소를 준비하는 모임이 열렸다. 그러나 당시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1752년(영조 28) 제동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워졌다. 이것이 세 번째 복설이다. 탕평을 내세운 영조대에도 정개청을 둘러싼 논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복설에는 지역 사림의 지속적인 추모와 제향 회복의 뜻이 담겨 있었다. 네 번째 훼철과 복설―영조대의 재훼철과 정조대의 제향 회복 1752년 복설된 제동사는 10년 뒤인 1762년(영조 38) 11월 다시 훼철되었다. 이로써 네 번째 훼철을 겪었다. 이 시기는 영조가 탕평정치를 추진하던 때였으므로, 자산서원의 모든 치폐를 남인 집권 때 복설되고 서인 집권 때 헐렸다는 도식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정개청에 대한 평가와 서원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장기간 이어졌다는 점을 함께 살펴야 한다. 1789년(정조 13)에는 강당과 사우를 복설하였다. 제동서원으로 불리다가 제동사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1791년 사우가 완성되었다. 이것이 네 번째 복설이다. 이후 1830년 강당 중수와 관련한 기문이 작성되었고, 1831년과 1856년에도 중수가 이루어졌다. 1860년에는 「제동사기」가 남겨졌다. 이러한 기록은 서원의 역사가 환국기의 정치적 갈등에만 머물지 않고, 지역 사림과 문중, 지방관의 관심 속에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다섯 번째 훼철과 근현대의 복설―서원철폐령 이후에도 이어진 기억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정책에 따라 자산서원은 다섯 번째로 훼철되었다. 앞선 훼철이 정개청에 대한 평가와 붕당 간 갈등에 밀접하게 연결되었다면, 이때는 전국적인 서원 정리라는 정책적 배경이 있었다. 따라서 다섯 번째 훼철은 앞선 네 차례와 성격을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듬해인 1869년 제동마을에 강당을 세웠다. 장여의 상량묵서(겉상량문)에는 ‘기사 2월(崇禎紀元後五回歲在己巳二月)’에 상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사우 전체의 복설이라기보다 문중의 강학과 추모를 이어가는 공간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1942년에는 자산서원 유허단향비를 세웠다. 정우석이 글을 짓고 임택규가 글씨를 쓴 이 비석은 건물이 사라진 뒤에도 제향의 기억이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전하는 연혁에 따르면 1965년 복설 허가를 받았으며, 1985년 함평 향토문화연구회와 고성정씨 문중, 학계와 지역 인사들이 복설을 발의하였다. 1987년 건축사업 추진위원회가 발족하고 1988년 복설공사에 착수하였다. 1989년 유물관, 1990년 강당, 1995년 윤암사와 내삼문을 건립하였으며, 1999년 복설을 마무리하였다. 2000년 11월 27일에는 함평군 향토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되었다. 2026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기념물로 지정 예고되었다. 건물과 기록으로 살펴보는 자산서원의 현장 오늘의 자산서원은 마을 뒷산을 배경으로 사당과 강당, 유물관, 내삼문과 외삼문, 관리사 등을 갖추고 있다. 사당 윤암사(輪巖祠)는 1995년 복설한 앞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강당 윤암정사는 1990년 중건한 앞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유물관은 1989년 건립한 앞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삼문은 겸허문(謙虛門), 외삼문은 대도문(大道門)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유물관에는 정개청의 저술 『우득록』을 인쇄한 「곤재 우득록 목판」이 보존되어 있다. 1694년(숙종 20) 정개청을 사헌부 집의로 추증한 교지와 1830년·1831년·1860년의 중수 관련 기문 현판도 전한다. 목판과 교지, 현판은 서원의 학문과 제향, 복설과 중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증언한다.
제동마을에는 옛 제동사 강당도 남아 있다. 1869년(고종 6) 2월 상량한 앞면 5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서원이 훼철된 바로 다음 해에 세운 건물이라는 점에서, 사우가 사라진 뒤에도 문중의 강학과 추모가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주목할 만하다. 현재의 서원 건물과 이 강당을 함께 살펴야 복설 이전과 이후의 장소적 연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 자산서원의 주향은 정개청이다. 그의 동생인 관재(寬齋) 정대청과 학재(學齋) 정응청, 문인인 희암(希菴) 배명과 사담(沙潭) 나덕원이 추배되었다. 배명과 정응청, 나덕원은 정개청의 신원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나덕원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활동에도 나섰다. 이후 지재(智齋) 정이청, 수정(守貞) 윤제, 약재(藥齋) 고두문, 난파(蘭坡) 서국빈이 추배되어 모두 아홉 위를 봉안하고 있다. 배향 인물의 구성에서도 정개청의 학문과 신원운동, 호남 사림의 관계망이 드러난다. 곤재 정개청의 생애와 학문 정개청은 1529년(중종 24) 나주 대곡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이다. 아버지는 봉산훈도를 지낸 정세웅이고, 어머니는 금성나씨이다.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박순(朴淳, 1523~1589) 등과 교유하였으며, 나주훈도와 전생서 주부, 곡성현감 등을 지냈다. 1565~1570년 무렵에는 무안현 엄담, 지금의 함평군 엄다면 제동마을로 옮겨 윤암정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예학과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호남의 명유로 알려졌고, 1585년(선조 18)에는 나주 경현서원의 초대 원장을 맡았다. 1587년 올린 만언소에서는 임금이 정치의 근본이므로 마음을 다스리는 데 경(敬)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호남 사림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연루자를 찾는 범위가 지방 사림으로 확대되었고, 정개청도 1590년 5월 체포되었다. 정여립과 함께 모의하였다는 혐의로 평안도 위원에 유배되었다가 함경도 경원 아산보로 옮겨졌다. 그해 7월 26일 국문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문인들은 그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겨 신원운동을 펼쳤고, 이것이 훗날 사우 건립으로 이어졌다. 정개청의 문생은 400여 명으로 전한다. 나주 지역의 나덕명·나덕준·나덕윤·나덕원·나덕현·나덕수, 보성의 안중묵과 안기현, 화순의 최홍우·조수홍·조봉서, 무장의 오익창과 정식, 무안의 배명, 광주의 송제민, 함평의 윤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밖에도 유양·정인·김세규·정지성·남이공과 종실 이수봉 등이 문인으로 거론된다. 문인들의 지역적 분포는 나주와 무안, 함평을 넘어 호남 각지로 이어지는 학문적 관계망을 보여준다. 『우득록』과 목판에 남은 학문의 자취 정개청의 저술로는 『우득록(愚得錄)』, 『수수기(隨手記)』, 『변례편성(變禮編成)』 등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오늘날 전하는 것은 『우득록』이다. 본편 3권 3책과 부록 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34편의 글이 실려 있다. 서문은 1681년(숙종 7)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지었다. 『우득록』의 목록으로 헤아려 보면, 정개청의 학문은 성리학적 심성론에 머물지 않고 이기론·경세론·예학·역학·천문·자연론까지 폭넓게 확장된 실천적 학문이었다. 특히 「선악개천리설(善惡皆天理說)」·「이기설(理氣說)」 등에서 독자적인 이기·선악론을 전개하고, 「논입지(論立志)」와 「도학의 요점[道學之要]」에서는 수양과 실천을 중시하였다. 또한 「군심인사론(君心人事論)」·「논인군지학(論人君之學)」에서는 군주와 백성의 상호관계를 강조하여 학문을 현실 정치와 연결하였다. 역학·천문까지 탐구한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철학적 사변, 자연에 대한 탐구, 현실 경세와 실천을 하나의 학문 체계로 아우른 폭넓음과 독자성이 정개청 학문의 중요한 변별성이라 할 수 있다.
1590년 정개청이 체포되자 그의 저술과 소장 서책도 압수되었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선조는 『우득록』을 보고 옛 글을 읽은 사람의 책이라며 본가에 돌려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수수기』와 『변례편성』은 분실되었다는 이유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 학자의 죽음과 함께 저술도 흩어졌지만, 문인과 후손들은 남은 글을 모아 간행하려 하였다. 1650년(효종 1) 윤선도와 허목이 내용을 고정(考正)하였고, 1670년(현종 11) 판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680년(숙종 6) 자산서원이 다시 훼철되면서 간행은 중단되었다. 1688년(숙종 14)에는 나만성과 나두동이 다시 내용을 고정하였다. 1689년 왕명으로 홍문관에서 등진 작업을 시작하였고, 1691년(숙종 17) 겨울에 전라감사 이현기(李玄紀, 1692년 1월∼1692년 9월 재임)가 나두춘을 시켜 수백의 판재를 도와주고, 홍만조(洪萬朝)가 유생들을 뽑아 글을 쓰게 하고 윤세태(尹世泰, 학재 정응청 외손), 고윤(高玧) 등이 본판을 새겼다. 1692년(숙종 18) 여름 본편 3권 3책의 판각을 마쳤다. 서원의 훼철과 복설이 문집 간행에도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이다. 1703년(숙종 29)에는 홍중삼이 「곤재선생 사실」을 짓고 나의소가 「곤재선생 행장」을 정리하여 부록 상·하권을 한 책으로 편성하였다. 1795년(정조 19)에는 목판을 보수하고 빠진 부분을 보각하였다. 처음 108판이었던 목판 가운데 현재는 권1의 13판, 권2의 16판, 권3의 11판, 부록의 8판 등 모두 48판이 전한다. 1987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곤재 우득록 목판」은 정개청의 학문뿐 아니라 이를 지키고 전하려 한 호남 사림의 활동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자산서원을 어떻게 보존하고 전할 것인가 자산서원의 가치는 건물의 오래된 정도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현재의 주요 건물은 후대에 복설하였지만, 이곳은 정개청의 강학과 제향, 신원운동과 서원 치폐가 이어진 역사적 장소이다. 목판과 추증 교지, 옛 제동사 강당, 중수 기문 현판, 유허단향비를 함께 살필 때 그 역사성이 더욱 선명해진다. 다섯 차례의 훼철과 복설은 학문과 정치가 향촌사회에서 어떻게 만났는지 보여준다. 특히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과 연동된 서원의 존폐는 중앙의 정국 변화가 지방 사림의 제향과 교육에 미친 영향을 드러낸다. 반면 마지막 훼철은 흥선대원군의 전국적인 서원 정리 정책과 연결된다. 각각의 역사적 배경을 구분하여 설명해야 자산서원의 치폐를 단순한 당쟁의 반복으로 축소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역사성과 장소성, 그리고 남아 있는 기록의 학술적 가치를 바탕으로 자산서원을 국가유산으로 지정하여 보존할 필요성에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다. 서원과 사우는 교육과 제향의 유적이며, 정개청이라는 인물과 기축옥사 이후의 신원운동을 기억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건축물의 형태뿐 아니라 인물과 사건, 지역 사림의 활동을 함께 평가하는 기념물적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건물과 유물, 관련 문헌의 조사 성과를 한데 모아야 한다. 다섯 차례의 치폐를 뒷받침하는 상소와 장계, 복설 관련 기록을 대조하고, 현판과 교지의 원문 및 목판의 현황을 정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옛 제동사 강당과 유허단향비까지 연결하여 현장 안내를 구성하고, 정개청의 강학과 문집 간행을 설명하는 교육자료도 마련할 만하다. 이제 곧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될 전망이다. 자산서원은 헐리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에서도 학문과 제향의 기억을 이어온 곳이다. 기록은 건물이 사라진 시기의 역사를 전하고, 현장은 그 기록이 놓였던 공간을 보여준다. 이 둘을 함께 보존하고 해석하는 일이 정개청과 호남 사림의 역사를 오늘의 지역사회에 전하는 길이다.
도움받은 자료 안동교, 「정개청(鄭介淸)의 학풍(學風)과 절의(節義)의 함의(含意)」, 『유교사상문화연구』40집, 유교사상문화연구, 2010.
나상필, 「困齋 鄭介淸 伸冤 양상-나주나씨 나덕명(羅德明) 형제의 상소를 중심으로」, 『동양고전연구』85집, 동양고전하고히, 2021. 글쓴이 김희태 전 전라남도 문화유산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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