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성좌] 광주지역 근·현대사의 ‘뿌리 깊은 나무’ 최흥종(崔興琮, 1880~1966) ② 게시기간 : 2026-09-23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9-21 15:5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항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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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한센인을 위한 삶을 시작하다 순검을 사직한 최흥종은 광주 농공은행에 입사했으나 일본인의 대금업체임을 알고 2개월만에 사직했다고 한다. 그리고 1908년 벨(E. Bell, 배유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윌슨(R. M. Wilson, 우일선․우월순)의 조수로 취직했으며, 같은 해 양림리교회의 집사로 취임했다. 그러던 중 1909년 그는 의료선교사 포사이드(W. H. Forsythe, 포의사)를 마중 나갔다가 그의 행동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포사이드는 길가에 쓰러져 있는 한센인, 즉 ‘나환자’인 여인을 발견하자 타고 온 조랑말에서 내려 그 여인을 끌어안아 태우는 것이었다. 이때 그 여인의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자 포사이드는 그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최흥종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최흥종은 피고름이 묻은 그 지팡이를 선뜻 집지 못했다. 당시의 순간을 최흥종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 동포 중에서 생겨난 환자를 같은 동포인 내가 꺼려야 하고 멀리 천만리 이역에서 온 외국인이 오히려 따뜻한 손길을 펴주시고 있으니 예수님의 박애정신은 고사하고 동포애조차 결여한 인간으로서 무슨 신앙이냐 하는 자책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최흥종, 「구라사업 50년사 개요」, 『호남신문』 1960.3.17.: 최협, 『오방 최흥종 평전』, 한국학호남진흥원, 2024, 19쪽).”
이 여인은 제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때 받은 충격은 최흥종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제중원에서 사무인으로 재직하던 그는 1912년 한센인 교회인 봉선리교회 설립을 위해 대지를 희사했으며, 이후 그는 조국의 독립과 더불어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했다. 1919년 3월 5일 남대문역과 대한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1912년 북문안교회의 장로로 장립된 최흥종은 191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북문안교회의 전도사로도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내려온 김필수 목사 및 광주의 김복현(김철)과 함께 3월 2일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있던 국기열의 주선으로 김범수를 만나 광주에서의 만세시위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3월 5일, 그는 거리에 나갔다가 그만 시위에 참여하고 말았다. 아니, ‘참여’ 정도가 아니라 ‘주도’했다. 그는 남대문역 앞에서 인력거에 올라 『신조선신문』이란 유인물을 살포하고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연설했으며, 대한문 앞에서도 인력거 위에서 ‘조선독립’이라고 쓰인 깃발을 흔들며 시위를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신문조서에 따르면, 그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연설을 계획하던 중 고종의 국장을 기회로 상경했다가 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만약 이때 체포되지 않았다면 전국을 돌며 조선의 독립에 대해 연설할 계획이었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겠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대해 “나는 독립이 될 것으로 믿고 있으며, 어쨌든 나로부터 독립사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최흥종 신문조서」, 경성지방법원, 1919.6.25.)”라고 단호히 답변했다. 결국 그는 1919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920년 6월 출옥했다.
1920년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투신하다 최흥종이 출옥한 다음 달인 1920년 7월 광주기독교청년회(YMCA)가 창립됐으나 그는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았다. 이제 막 출옥한 인물이 임원을 맡는다는 것이 단체에 부담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다시 평양신학교에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현실 문제와 담을 쌓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같은 해 7월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일제는 이후 그를 ‘갑급(甲級) 요시찰인물(要視察人物)’로 지목하여 감시를 멈추지 않았다(「요시찰인의 동정에 관한 건」, 1922.3.18.).
같은 해 6월 최흥종은 서정희 등과 노동공제회 광주지회 ‘개선임원 선정위원’에 위촉됐고, 1923년 8월 광주소작인회연합회 대표로서 다시 서정희와 함께 서울에 올라가 동양척식주식회사 간부를 만나 소작인들의 고충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1924년 3월 전라노농연맹 발기회에 광주군 지한면 소작인회 대표로 참석했다. 자신은 소작인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이 시기 그는 사회주의계열에서 신망을 얻고 있던 서정희와 함께 광주의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서정희 역시 한때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1920~1930년대 기독교 농촌운동을 전개하다 1920년대에 들어와 한국 기독교계는 큰 위기에 부딪혔다. 농촌 경제가 피폐해지면서 농촌의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지고 교인들도 교회를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까지 겹치면서 기독교계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고, 그 타개책으로 내세운 것이 ‘기독교 농촌운동’이었다. ‘농민운동’이 주로 가난한 소작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농촌운동’은 궁핍한 농촌과 농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한국 YMCA는 1920년대 중반부터 전국 지회를 통해 ‘농촌사업’을 전개했다. 광주YMCA에서는 농업선교사 에비슨(G. Avison, 어비신)을 초빙하여 1933년 양림리에 광주농업실습학교를 설립하고 청년 농촌지도자들을 양성했으며, 최흥종도 여기에 동참했다.
1920~1930년대 청년운동을 지도하고 학생운동을 지원하다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광주 북문밖교회 목사로 부임했으며, 같은 해 광주YMCA 회원들과 함께 일본산 마약인 모르핀방독회를 조직했다. 이어 그는 시베리아 선교를 위해 3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출발했다가 1922년 9월 총회 참석을 위해 일시 귀국했다. 이때 언론에서는 그를 “전남 청년계의 추앙인물”(『동아일보』 1922.10.1.)이라 소개했다. 이미 그가 청년운동의 지도자로 부각됐음을 엿볼 수 있다. 최흥종은 광주지역의 대표적 사회단체인 광주청년회의 1921년 9월 임시총회에서 의사원으로 선출됐으며, 시베리아에서 귀국하여 1924년 광주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인 광주YMCA의 제3대 회장에 선출된 이후 제5대․제8대․제10대 회장을 역임했다. 광주YMCA의 활동은 종교적 영역만이 아닌 사회운동 전반에 걸쳤기에 그는 자연스레 이 지역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을 지도하게 됐다. 이밖에도 그는 광산회 총무(1923), 서선수해구제회 집행위원장(1923), 광주수해구제위원회 위원(1925),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창립기성위원․광주협회 위원(1926) 등을 역임하며 광주지역 사회운동의 핵심인물로 자리잡았다. 한편 1924년 7월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한국인 학생들이 일본인 사회인들과 야구시합을 벌이다가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에 광주고보측에서는 학생 수백 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벌이며 학교측에 맞섰고, 최흥종은 학부형회 임시의장으로서 도민대회 개최를 준비하는 등 대응에 나서면서 학생들을 지원했다. 그리고 1927년 11월 광주공립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났을 때도 그는 대책위원회의 임시의장을 맡아 원만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이어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지만, 최흥종은 같은 해 전남노회에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받아 7월 광주를 떠났기에 여기에는 관여할 수 없었다. 1927년 신간회 광주지회장으로 선출되다 최흥종은 1927년 1월 다시 시베리아 선교사가 되어 출국했으나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일시 투옥됐다가 석방되어 4월에 귀국했다. 이후 그는 신간회운동에 참여했다. 1927년 이른바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이 민족운동에 협력하기 위해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고 각지에 지회를 조직했다. 광주에서는 같은 해 10월 지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최흥종이 초대회장으로 선출됐다. 신간회의 지방 지회장은 서로 다른 계열을 중재하고 통합하여 사업을 추진할 만한 인물이 선출됐는데, 그가 지회장으로 선출됐다는 점은 광주지역 민족운동 및 사회운동계에서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그는 민족주의계열의 근거지인 광주YMCA의 지도자였으며,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을 역임했고, 광주소작인연합회·전라노동연맹회에서도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계열과도 관련을 맺고 있었다. 또 1925년 광주청년회와 광주노동공제회 청년들이 노선 문제로 충돌을 빚었을 때도 그가 중재자로 나서서 사태를 수습했다. 그가 신간회 광주지회 초대 지회장으로 추대된 것도 양쪽 계열에서 모두 신망을 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927년 12월에 열린 신간회 광주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 최흥종은 다시 회장에 선임됐는데, 회의장인 흥학관 입구에는 경찰 10여 명이 배치되어 일반인의 방청을 불허했고, 회의 도중 경찰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이같은 경찰의 간섭과 방해로 신간회 광주지회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이는 전국적으로 공통된 현상이었다. 이밖에 최흥종은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 위원, 1928년 광주교육보급회 이사·사립보통학교유지방침연구회 위원·광주보통학교유지회 위원·광주철도기성회 상임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미 북문밖교회에 유치원을 설립하고(1920) “무산아동을 위한 교육” 차원에서 설립된 단기 학교의 총장(1924)과 광주여고보창립 기성위원(1926) 등을 역임한 그는 계속하여 유치원·간이학교·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 등 ‘광주교육보급’을 위해 힘썼다. 이처럼 그는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거기에 적극 참여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런데 1929년 3월 무렵부터 신간회 광주지회장으로서 그의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3월 2일 열릴 예정이던 정기간사회가 일경의 간섭으로 연기되어 3월 9일에 열렸는데, 이때 부회장 정수태가 사회를 맡았다. 이후 광주지회 각종 회의의 사회자는 정수태였으며, 6월 서울에서 열린 신간회 각지회 대표위원회에 그가 ‘광주구대표’로, 7월 서울에서 열린 복대표회의에 ‘광주지회장’으로 참석했다. 최흥종이 신간회 활동을 중지한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당시 신간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중앙·지방에서의 민족주의계열·사회주의계열의 갈등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1929년 6월 전남노회는 그를 제주도 모슬포교회의 담임목사로 파송하기로 결의했고, 이에 따라 그는 7월 광주를 출발했다.
이로써 그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은 중단됐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머지않아 그는 다시 광주로 돌아와 새로운 활동에 나서게 된다. 글쓴이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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