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아홉 가지 길상을 품은 그림 게시기간 : 2026-09-15 07:00부터 2030-12-23 21:21까지 등록일 : 2026-09-10 14:4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한 폭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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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詩經)』 소아(小雅) 편의 <천보(天保)>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로, 하늘이 왕을 보호하고 복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시이다.2) ‘천보구여’는 여(如)자가 아홉 번 들어 있는데 산, 언덕, 물, 달, 해, 소나무와 잣나무 등의 아홉 가지 항목의 닮음에서 유래한 것으로, 군주의 위로에 신하가 화답하여 하늘이 내린 나라가 오래도록 보전되고 임금이 만수무강하기를 바라며, 그 덕을 칭송하는 뜻을 담고 있다. 천보구여의 도상은 중국 회화에서 시경의 한 구절을 표현하는 그림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독립된 화제로 발전하였다. 일본에서도 에도시대 이후 남화가들에게 의해 제작되었다. 이후 ‘천보구여도’는 수복과 관련한 다양한 도상들이 더해져 근대 이후 장수를 축원하거나 출세와 같이 길상적 의미로까지 확대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대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에 의해 전통적인 산수화의 형식에 길상적 의미를 결합하여 천보구여도가 제작되었다. 이후 이도영,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오일영, 김용수 등 여러 화가들이 이 화제를 그리면서 천보구여도는 근대기 한국화단에서 축수화(祝壽畵)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3)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은 천보구여도를 여러 점 남겼다. 특정 인물의 앞날을 축원하는 마음으로 제작된 천보구여도는 전통적인 남종화의 필법과 산수 표현을 바탕으로 그려진 허백련 초기 화풍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그림 1). 천보구여도 연원과 제작양상
그림 2 馬和之, 《小雅鹿鸣之什圖》 圖卷 부분, 南宋, 견본채색, 28.0×864.0cm, 대만고궁박물관
그림 3 『程氏墨苑』 「天保九如」 도해, 1605년 중국에서 ≪시경도(詩經圖)≫ 혹은 ≪모시도(毛詩圖)≫ 전통에 따른 일련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남송대(南宋代) 마화지(馬和之, 1130년경-1170년경)의 <천보>편을 그린 작품이 전한다(그림 2).4) 이후 명대(明代) 『방씨묵보(方氏墨譜)』(1588년)와 『정씨묵원(程氏墨苑)』(1605년)에 ‘천보구여’의 도상이 실리면서 아홉 개의 요소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5) 화면 중앙 산을 중심으로 달과 해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고, 근경 언덕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리고 주변으로 내(川)가 흐른다(그림 3). 이후 청대(淸代)에 들어서 산수화의 주제로 여러 화가들이 제작하였다. 일본에서는 18세기 남화가들에 의해 에도시대[江戶時代]와 메이지시대[明治時代]에 수복과 관련된 다양한 도상들이 첨가되면서 천보구여도의 제작이 활발하였다. 에도시대의 다니 분초(谷文晁, 1763-1841)의 <천보구여도>를 비롯해 이후 메이지시대 타노무라 쵸쿠뉴[田能村直入, 1814-1907], 다자키 소운[田崎草雲, 1815-1898], 도미오카 텟사이[富岡鐵齋, 1837-1924], 그리고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1874-1945] 등 일본의 천보구여도에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며 길상화의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6)
그림 4 안중식, <천보구여>, 1914년, 조선시대에도 천보구여도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1824년(순조 24) 차비대령화원 녹취재의 화제로 ‘구여도’가 출제된 기록만 있을 뿐 작품은 확인되지 않는다.7) 1910년대에 이르러 제작된 천보구여도는 안중식과 이도영의 작품이 가장 이른 시기의 천보구여도로 알려져 있다. 이도영의 <천보구여도>는 1911년에 제작된 것으로, 이 작품에는 천보구여의 구체적인 도상은 드러나지 않는다. ‘천보구여’라는 화제가 없으면 단순한 화보풍의 구도를 기본으로 한 평담하고 담박한 분위기의 산수화로 생각되는 작품이다.8) 안중식은 본격적으로 천보구여도를 제작한 화가로 여러 점의 천보구여도를 남기고 있다. 선행연구에 의하면 안중식은 ‘구여도’ 제작을 시작으로 1914년 <천보구여도>를 제작하면서 이 작품은 근대 천보구여도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그림 4).9) 그의 <천보구여도>는 구불구불 각지고 중첩된 모양의 산의 모습과 푸른색 태점이 가득 채워진 청록산수이다. 화면 중앙에 언덕과 소나무·잣나무, 주산과 붉은 해, 초승달, 그리고 계곡물까지 ‘구여’의 요소가 등장하며, 화려한 채색과 묘사로 천보구여도를 구현했다. 제발에는 환갑을 축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안중식은 특유의 화려한 정형산수의 형식을 빌려 한국 근대 천보구여도를 탄생시켰다. 이후 여러 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었으나 그 가운데 허백련이 천보구여도를 가장 많이 그렸다. 산수에 깃든 장수, 허백련의 〈천보구여도〉 허백련의 <천보구여도>는 세로로 긴 화면에 근경, 중경, 원경의 삼단구도로 구성되었다. 근경 아래쪽 언덕의 소나무 등 수목이 그려져 있고 중경의 바위산이 표현되어 있다. 중경과 원경의 주산은 옅은 안개로 구분하였다. 주산 양쪽으로 해와 달이 떠 있다. 짧고 부드러운 필선을 반복해 표현한 피마준과 반두준으로 원산을 묘사하였는데, 산봉우리의 윤곽을 먼저 세우고 내부에 점과 짧은 선, 담묵을 더하였다. 푸른색과 노란색 등의 엷은 담채로 화면을 담담하게 채웠다(그림 1-1). 허백련은 아홉 요소를 하나씩 분리하여 설명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산·언덕·산등성이·구릉은 겹쳐진 산세 속에 통합하고, 강물은 아래에서 이어지는 계류와 물가로 표현했다. 해와 달은 상단에 붉은 색으로 둥글게 표현되었고 반면 달은 달 주위에 먹을 바림하여 음영을 주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근경과 중경에 그려진 수목을 통해 강조된다.
그림 1-1 허백련, <天保九如>, 부분, 이 그림 오른쪽 상단에 “병인년(1926) 10월 18일에 백두산인이 멀리서 부탁을 하여 삼가 소행 노선생 환갑을 축하하며 의재 허백련(歲丙寅小春之望越三日 因白頭山人之遠囑 謹祝小杏老先生六十一壽 毅齋許百鍊生)”이라 써 있는데, 백두산인은 천도교 사상가 이돈화(李敦化, 1884-1950)로, 그의 부탁을 받아 허백련이 소행선생의 회갑을 축하하며 그림을 그린 것이다.10) 허백련은 일찍부터 천보구여도를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기년이 있는 가장 이른 작품은 1924년에 ‘석우선생(石愚先生)’을 위해 제작한 <천보구여도>이다(그림 5).11) 비단에 그려진 이 작품은 허백련의 초기작으로 일본에서 배운 남종화법이 엿보인다. 화면 왼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근경과 중경의 소나무 등 수목과 중앙의 우뚝 솟은 주산은 구분되지 않고 이어지며 아스라한 안개로 공간감을 주었다. 화면 오른쪽 원경의 폭포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이 시내로 이어진다. 연두색과 초록색의 설채로 정갈하면서도 맑은 느낌을 준다. 허백련이 1940년과 1941년, 1943년에 연달아 제작한 <천보구여도>는 앞의 두 작품과는 다른 작풍을 보여준다. 이 작품들은 허백련의 ‘의재산인(毅齋散人, 1930년대 중반-1950년)’ 시기에 제작된 것들이다.12) 허백련은 40대 중반에서 50대 말까지 ‘의재산인’이라는 호를 주로 썼다. 이 시기 허백련의 화풍은 초기 미산 허형 문하에서 배운 소치 허련의 필묵과 고무로 스이운에게 배운 남화의 고법에 충실한 형식주의를 비롯한, 이전 시기의 다양한 시도를 종합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해나가고 있었다. 1940년에 제작한 <구여도>는 “경신년 봄, 오방선생의 61세 수를 위하여 백련이 그리다(庚申仲春寫爲五放先生六十一壽 百鍊)”라는 제발이 적혀 있는데, 허백련이 오방 최흥종(崔興琮, 1879-1966)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한 작품이다(그림 7). 두 사람은 무등산을 중심으로 교육과 농촌계몽, 민족문화 진흥의 뜻을 함께했던 각별한 벗이었다. 그 다음해인 1941년에도 <천보구여도>를 그렸다. 동강선생(東岡先生)의 회갑을 축하한다는 제발이 있는데, 동강선생은 미상이다(그림 8). 마지막으로 1943년 <천보구여도>는 “계미년 동짓날, 삼가 암재 방백(方伯)의 예순한 번째 생신을 축하하며 의재 허백련(癸未南至節敬爲巖齋方伯六十一壽 毅齋許百鍊)”이라는 제발이 있다(그림 9). 일제강점기에도 지방의 최고 행정 책임자인 도지사를 전통적인 표현으로 '방백'이라 지칭했는데, ‘암재(巖齋)’이라는 호를 가진 이를 위해 이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5 허백련,
그림 6 小室翠雲,
그림 7 허백련,
그림 8 허백련,
그림 9 허백련, 위의 세 작품은 비슷한 구도와 구성을 보여준다. 특히 1940년 <구여도>와 1941년 <천보구여도>는 화면 오른쪽에 무게를 두고 근경에 언덕과 토파에 소나무와 잣나무로 보이는 수목을 배치하였다. 중경에는 작은 폭포를 두고 물이 흘러나오며 주산 양쪽에 해와 달을 배치하였다. <구여도>는 근경과 원경에 안개를 두어 거리감을 주었으나 1941년 <천보구여도>는 경물로 화면을 꽉 채웠다. 주산이 화면 오른쪽에 있기 때문에 좌우로 배치하던 해와 달을 한 공간에 같이 두었다. 달은 주변을 먹으로 옅게 선염하여 희미하게 표현하였다. 1943년 <천보구여도>는 주산을 중앙에 배치하고 근경 언덕에 소나무, 잣나무를 그렸으며 중경에 폭포를 두었다. 근경과 원경 사이는 옅은 안개로 구분하였다. 이들 작품에서는 허백련의 개성적인 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소나무를 묘사하는 방식이나 언덕의 피마준, 미점 등 살짝 물기를 머금은 붓으로 필치가 무르익어 변화가 있고 화면은 생동감이 있다. 앞서 1924년작 <천보구여도>의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필치와는 다르다. 또한 담채에 있어서도 1924년 작품이 부드럽고 색감의 화사한 채색이라면, 1940년대의 천보구여도는 물기가 많은 시원하면서도 담담한 담채를 사용했다. 허백련의 초기화풍과 중기화풍의 차이로 생각되는 부분이다. 허백련은 일찍이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화단을 경험하였다. 특히 그의 스승 중 한 명인 고무로 스이운 문하에서 남화를 배웠기 때문에 그의 영향이 허백련 초기화풍 형성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천보구여도>의 제작배경에는 고무로 스이운을 비롯한 일본작가들이 제작한 천보구여도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허백련의 <구여도>(1940)와 <천보구여도>(1941)는 고무로 스이운의 <천보구여도>와 구도와 구성이 비슷해 한 것을 알 수 있다(그림 6).13) 전통을 배우던 젊은 화가, 허백련의 초기 화업 허백련은 근‧현대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로, 전통 남종화를 근대적 환경 속에서 계승‧변용한 작가로 평가된다. 그는 1938년 연진회(鍊眞會)를 창립하여 ‘전통적 남종화의 부흥’을 표방하였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광주 전통화단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허백련의 초기 화업은 두 명의 스승에게서 비롯되었다.14) 한 명은 조선 남종문인화의 거장인 허련의 아들인 미산 허형이고, 다른 한 명은 일본 남화계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이다.15) 허형에게서는 묵화의 기초를 익혔고, 고무로 스이운에게는 남화의 정신을 배웠다. 허백련은 “나는 처음부터 내 그림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미산 그림 같았고, 후에는 소치 그림, 또 중국의 대치 그림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내 그림은 미산 것도 소치 것도 아니다. 개성은 어디까지나 전통 위에서 꽃피워야 하며, 처음부터 자기 독단의 개성은 생명이 길지 못하다. 전통을 철저히 갈고 닦으면 자연 자기 것이 된다.”고 하였다. 허백련은 자신이 그림을 배우게 된 이유가 ‘화가가 되기 쉬운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유년시절을 진도에서 보낸 허백련은 옆 마을에 살던 증조부뻘인 허형을 5세 무렵에 만났다. 어려서부터 허형의 그림을 보아왔던 허백련은 11세 때 허형에게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수업방식은 붓 쓰는 법이나 먹 쓰는 법을 가르쳐 준 뒤 허백련에게 그대로 그려보게 하는 도제식 교육이었다. 허형은 화보와 허련이 임모했던 방작과 임모작 등을 통해 옛 화가들의 화법을 익혔던 그 방식대로, 즉 자신이 허련에게 배웠던 방식대로 허백련을 가르쳤다. 허형은 허백련에게 옆에서 그리는 것을 보고 배우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그림은 묵모란부터 시작하여 임모하거나 모사하는 방식이었다. 어린 허백련은 허형의 그림을 흠모했고 일획일점을 그대로 그리려고 했다. 그러한 허백련에게 허형은 “내 그림을 본따지 말고 소치할아버지 그림을 본따라”며 자신의 그림을 임모하는 것을 말렸다. 당시 세간의 평이 “소치의 묵화, 미산의 산수”라고 알려졌으나, 허백련은 나중에서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허백련에게 허형은 ‘작대기 산수’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작대기 산수’는 허형 산수의 지향점이었다. “소치할아버지는 내게 작대기 산수를 그리라고 했다만 그게 되지 않는구나.”라고 했던 허형은 허백련에게 “그분은 작대기 산수를 그려야만 산수로 대성할 수 있다고 하셨다.”라며, 작대기 산수에 대해 “아마 두껍고 무거운 산수를 말하는가 싶은데 속이 비어서인지 붓끝이 말을 안 듣는다.”라고 설명하였다. 허백련으로서는 이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허형은 “네가 여러 번 그 말을 내게 물었다만 딱 집어 말해줄 수가 없구나”라면서 허련이 그에게 그림을 가르칠 때, 자신이 임모한 원말사대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의 그림을 보여주더라고 했다. 허백련은 이를 이해하기 위해 화본을 구해 황공망의 그림을 들여다보았고, 허련이 임모한 것들도 모조리 봤다고 하였다. 허련이 김정희로부터 배운 서권기(書卷氣)와 문기 높은 화격의 남종문인화 정신은 그의 작품을 통해 허백련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허백련이 추구한 회화의 본질 역시 원말사대가로 지칭되는 남종화 즉 정신적 사의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허백련의 학습은 주로 대가들의 화풍을 모방하고 방(倣)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는 초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형식주의적인 경향의 직접적인 연원이 된다. 이러한 전형 학습은 그가 일본 유학 후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모색할 때 '전통'이라는 명확한 출발점을 제공했다. 일본에서의 남화 수업 허백련은 1912년부터 1918년까지 1년 남짓한 유학생활을 포함해 7년간 일본에서 생활하였고, 1923년에 5개월간 체류하고 귀국한 후 1927년에 또 다시 방문해서 3년 동안 머물다 돌아왔다. 세 번에 걸친 약 10여년 동안의 일본에서의 근대 체험은 허백련의 화가이력에서 결정적인 부분이다. 교토[京都]와 도쿄[東京], 니가타[新潟], 치바[千葉], 구마모토[熊本], 오사카[大阪] 등 일본 곳곳을 다니며 화가로서 정체성을 찾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허백련의 첫 번째 일본행은 법학 공부를 위해 교토로 유학을 떠난 1912년이다. 허백련은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1858-1936)의 권유로 법률공부를 하기로 하고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에 입학하였다. 1년 다닌 후 도쿄로 옮겨가 메이지[明治] 대학 청강생을 하다가 그만두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허백련이 화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게 된 배경에는 법률공부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 그리고 그동안 ‘여기(餘技)’의 차원으로서 그림 그리는 일을 이른바 직업 ‘화가’로서 미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에서 ‘화가’라는 직업을 통해 예술에 대한 재발견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허백련은 도쿄의 여러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전시회를 보았다.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에서는 중국과 일본 역대 화가들의 진적을 보았다. 진적을 접하기 어려웠던 우리나라에 비해 일본은 역대 화가들의 진적과 고화를 직접 감상할 수 있는 대중적인 관람이 가능했다. 20세기 초부터 중국 내 미술품이 개인수집가와 미술상‧골동상을 통해 일본으로 유입되었고, 이를 감상하고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동안 화보나 허련 또는 허형이 그렸던 방작들만 보았던 허백련은 중국의 역대 명화와 일본 대가들의 작품을 진본으로 감상하며 남종화와 그 화풍을 더욱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학으로 배우며 익혔던 미불‧미우인의 미점산수와 황공망, 심주, 문징명, 동기창 등의 실물그림을 직접 보면서 남종화에 대해 더욱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원‧명대의 명화를 모사하고 일본 역대 대가들의 작품을 방작했지만 한계에 다다랐다. 결국 본격적인 그림수업을 위해 두 번째 스승인 남화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을 찾아갔다. 고무로 스이운은 일본에서 1906년에 일었던 남화부흥운동 때 두각을 나타내며 남화의 전통을 강조하였던 인물이다.16) 허백련이 고무로 스이운의 문하에 들어갔던 1910년대는 기존의 전통 남화단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신남화’는 1910-1920년대의 일본화단 및 일제강점기 한국의 동양화단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신파’와 ‘구파’로 나뉜 남화단에서 구파에 속했던 고무로 스이운은 문부성미술전람회와 신문부성미술전람회 등 관전에 출품하며 활동하면서 일본 근대 남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17) 허백련은 고무로 스이운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를 받았다. 산수를 그린 허백련은 고무로 스이운에게 “붓끝이 황공망을 닮았다”며, “솜씨 있는 그림이다. 노력하면 대성할 수 있겠다. 열심히 그려라.”라는 답을 받았다. 허형을 통해 습득했던 남종화풍에 대한 평가로 해석된다. 허백련은 일본에서 체험한 화단의 동향과 미술교육 등에 관해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고무로 스이운과의 화풍상의 영향에 대해서 언급된 적이 없으며 작품에서도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상의 영향관계나 연관성은 특별히 연구되지 않았다. 일본화가들의 개인 화숙에서 이루어진 교육은 알려진 바가 적지만, 작가의 활동을 통해 교육관 또는 교육방식을 알 수 있다. 고무로 스이운은 1903년 간토화숙[環堵畵塾]을 설립하였다. 허백련의 회고에서 이 화숙에서는 대체로 그가 독학한 화법을 수련하면서 잘못된 곳이 있으면 이를 지적받고 고쳐나가는 방식이었으며, 스승이 자리에 없을 경우 선배 제자들에게 배우는 방식이었다고 하였다. 허백련이 공부하던 1910년대의 고무로 스이운의 화풍은 중국의 화보를 근간으로 삼았던 스승들의 양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가며 ‘관전’에 적합한 작품을 제작해 발표하던 실험적인 전람회 양식이었다. 1910-1920년대를 거치며 구파와 신파의 요소를 모두 수용하면서 양식이 혼용되는 양상을 보였던 고무로 스이운은 전통 화보풍의 작품을 그리는 한편, 화보적 요소를 토대로 부분적 사생을 가미한 남화를 이중적으로 제작하였다. 허백련이 역대 명화와 함께 “일본 역대 대가들의 그림을 본뜰 때도 남화만을 골랐다.”라고 한 증언은 그가 일본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며 일정 부분 일본 화가들의 영향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허백련의 초기작에는 고무로 스이운과 그 시기 일본 남화가들의 영향이 일부 엿보이며, 특히 고무로 스이운이 전통화법과 대가들의 방식을 자기화시키던 1905-1908년 사이의 작품과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이와 함께 허백련은 고무로 스이운에게 남화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한 고무로 스이운은 “옛 사람의 명화를 배우고 또 형상을 寫하여 점차 필치의 묘미와 고원한 이상이 표출되는 형태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며, 이것이 현대에 있어서 남화를 배우는 가장 중요한 점”이라 하였다. 고무로 스이운 문하에서 막 그림을 배우기 시작할 때 그는 허백련에게 “남화라는 것은 붓끝의 재주만으로는 안되네. 마음의 감동에 붓이 따라야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붓끝이란 기술이야.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이 붓을 따르지 않고 붓이 마음을 따를 수 있겠나. 그것은 시와 철학이 없으면 안되지. 자기를 반성하는 생각,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 그런 철리에 밝지 못하면 힘들어.”라고 했다. 결국 허백련은 고무로 스이운에게 그림의 실제와 이론을 배우며, 남화에 동양예술의 특질인 자락(自樂)의 경지 및 전통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일본의 남종화를 창출해내려는 고무로 스이운의 예술사상에 점차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백련은 일본에 방문할 때마다 고무로 스이운을 만났다. 고무로 스이운과의 이와 같은 정신적 교류가 오가는 가운데 그는 보다 발전된 남종화로의 이행을 위해서 전통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일본 유학기 허백련의 화풍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허백련이 고무로 스이운이 가진 예술정신, 즉 전통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일본의 남종화를 창출해내려는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이후 보다 발전된 남종화로의 이행과 ‘남종화 부흥’이라는 과제의 실현을 확신했다는데 있다. 가학으로서의 조선 남종화 전통과 일본 유학 시기 경험한 근대 남화 수업이라는 이중적 연원은, 허백련이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근대적 환경에 적응하는 독자적 양식을 모색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허백련은 1927년 마지막으로 도일(度日)하였는데 1927년은 도쿄에서 1년을 보낸 후 구마모토시에서 10개월 정도 머물다가, 다시 도쿄와 오사카, 시마네현의 마츠에시[松江市]를 거쳐 1930년 말에 돌아온 여정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허백련은 회고에서 “늘상 생각하는 것도 일본에 가야 그림을 연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18) 일본에서의 경험이 허백련에게 회화적 역량을 키우는데 중요한 요소였음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발언이다. 구마모토시에서 10개월을 머물렀던 허백련은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글과 그림을 그리는 ‘필우회(筆友會)’라는 모임에 약 3개월 동안 일요일에 나가 그림을 가르쳤다고 하였다.19) 허백련이 처음으로 제자를 받아들인 경험이었고, 이 경험은 그가 이후 1938년 연진회의 창설과 이후 교육방식으로 이어진다. 허백련 초기 화풍에서 축적된 전통의 재해석과 관전 양식에 대한 대응 경험은, 연진회의 활동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토대’를 이 시기에 마련했다. 즉 사의적이고 전통적인 문화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그의 독자적 양식을 토대로 한 허백련의 화가로서의 역할은 연진회를 중심으로 한 ‘남종화 부흥’ 운동과 광주‧호남 전통 화단의 정체성 형성에 선행하는 실험기이자 준비 단계를 갖게 되었다. 1) 『詩經』 「小雅」 篇 <第一鹿鳴之什> ‘天保’.
2) <천보> 시는 선왕이 지은 ‘鹿鳴’ 이하 다섯 편의 시로써, 하사를 받은 신하들 중 소호가 이 시를 노래하여 선왕에게 바친 獻詩이다. 3) 천보구여도에 대해서는 김소연, 「天保九如圖의 성격과 그 근대적 계승」, 『동양예술』제21호(한국동양예술학회, 2013); 김정민, 「天保九如의 思想과 視覺的 傳承에 대한 考察」, 『문화와 융합』제43권11호(한국문화융합학회, 2021)를 참고하였다. 4) 도판은 김정민, 위의 논문, 805쪽에 수록된 도판 1을 재인용했다. 5) 『方氏墨譜』와 『程氏墨苑』의 ‘천보구여’의 이미지는 거의 동일한데, 이는 명대 화가 정운붕(丁雲鵬, 1547-1628)이 두 묵보 제작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6) 김소연, 앞의 논문, 81-84쪽 참조. 7) 강관식, 『조선 후기 궁중화원 연구』(돌베개, 2001), 365-367쪽. 8) 관재 이도영의 <천보구여도>에 대해서는 김예진, 「貫齋 李道榮의 미술활동과 회화세계」(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192쪽. 9) 김소연, 앞의 논문, 84-92쪽 참조. 10) 小杏先生은 미상이다. 이돈화의 부탁을 받아 제작한 것이므로 허백련보다는 이돈화의 교유범위 내의 인물에게 그려준 것으로 생각된다. 11) 관지에는 “갑자년(甲子年) 설날 아침, 인곡(仁谷) 사형의 정중한 부탁을 받아 석우(石愚) 선생의 장수를 삼가 축원하다(甲子元旦爲仁谷詞兄雅囑恭祝 石愚先生希齡 毅齋許百鍊作).”라 써있다. 仁谷은 인천의 사회운동가이자 사업가이며 출판사 백양당의 대표였던 裵正國(?-?)으로 추정된다. 석우선생은 미상이다. 12) 허백련 화풍의 시기구분은 호에 따라 구분하는 毅齋기(1910년대-1930년대 중반), 毅齋散人기(1930년대 중반-1950년), 毅道人기(1950-1977년)를 따른다. 13) 小室翠雲의 <天保九如圖> 도판은 김소연, 위의 논문, 83쪽 도 6) 재인용. 14) 허백련의 초기 화업에 대해서는 김소영, 「의재 허백련의 초기 화풍의 연원과 조형적 특성 연구」, 『남도문화연구』제56집(남도문화연구소, 2025)을 요약·수정하였다. 15) 이에 대한 내용은 허백련이 직접 기고한 허백련, 「나의 이력서」⓵-㊶, 『한국일보』, 1975.7.15.~1975.10.15.를 참고하였다. 이외에도 문순태, 『의재 허백련』, 중앙일보·동양방송, 1977; 김은호, 『서화백년』(중앙일보사, 1977) 참조. 16) 고무로 스이운에 대해서는 황빛나, 「小室翠雲의 남화진흥론과 山水畵風 연구」(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고무로 스이운의 생애와 화풍」, 『미술사논단』제22권(한국미술사연구소, 2006), 243-277쪽 참조. 17) 일본 남화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였다. 이중희, 『일본근현대미술사』(예경, 2010), 109-118쪽;황빛나, 「‘南畵’ 탄생-용어의 성립 시기 및 개념 변천에 관한 小考」, 『美術史論壇』41(한국미술연구소, 2015); 동저, 「근대 동아시아의 ‘南畵’연구」(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6); 박지혜, 「1910年代 日本 近代 畫壇의 新南畵 談論과 實際」(홍익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8) 허백련, 「나의 이력서」㉖, 『한국일보』, 1975.8.19. 19) 구마모토 사람들은 허백련의 그림을 좋아했는데, 그 이유가 ‘규슈파[九州派]’와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규슈파와 허백련 작품과의 연관성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우나 이곳에서 화회를 열어 호평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때 40여 점의 산수화를 출품하였다. 허백련, 「나의 이력서」㉖, 『한국일보』, 1975.8.19. 참고문헌 김소연,「天保九如圖의 성격과 그 근대적 계승」, 『동양예술』제21호, 한국동양예술학회, 2013.
김소영, 「근대기 광주 전통화단의 형성과 전개」, 『호남학』제67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20. 김소영, 「의재 허백련의 초기 화풍의 연원과 조형적 특성 연구」, 『남도문화연구』제56집, 남도문화연구소, 2025. 김예진, 「貫齋 李道榮의 미술활동과 회화세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김정민, 「天保九如의 思想과 視覺的 傳承에 대한 考察」, 『문화와 융합』제43권11호, 한국문화융합학회, 2021. 朴아름, 「근대 한국화단의 祝壽畵 연구」, 『미술사연구』30호, 미술사연구회, 2016. 문순태, 『의재 허백련』, 중앙일보·동양방송, 1977. 박정혜, 『왕과 국가의 회화』, 돌베개, 2011. 최혜영, 「의재 허백련과 연진회 연구」,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7. 글쓴이 김소영 한국학호남진흥원 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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