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근현대 시문학]「목포의 눈물」은 누가 왜 썼을까? 게시기간 : 2026-09-04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6-09-02 11:0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호남 근현대 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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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포의 눈물」을 쓴 시인을 찾아서 한국 대중가요는 일제 강점기 민중들의 한을 달래주는 데 있었다. 대중가수의 등장과 근대 가요의 출발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수가 이난영이다. 단성사 전속 「신무대」에서 공연의 막간에 특별 출연자였던 무명 가수 이난영은 OK 레코드의 전속가수로 「목포의 눈물」을 부르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을 가요계 부동의 자리에 있게 한 것이다. 이른바 유행가와 트로트라는 장르를 정착시킨 존재가 된 그의 생가터 목포 양동에는 흉상이 세워졌다. 유달산에는 노래비가 세워졌으며 그는 삼학도에 묻혔다. 이렇게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로 목포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반면에 「목포의 눈물」을 쓴 문일석(文一石)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노래가 나온 지 9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알려진 바가 없고 문일석(文一石)의 생몰을 비롯한 실존 인물 여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문일석도 목포에서 살던 젊은 시인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현재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1)는다. 존재를 확인해줄 음원 저작권료를 수령한 이도 없다. 그나마 알려진 것도 확인되지 않은 여러 가지 ‘설’만 있다. 이 ‘설’이 지면을 채우면서 ‘설’을 기정사실화하고, 사망과 관련해서도 요절했다거나 옥사했다는 사망설로 채웠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반복적으로 재생되면서 오류는 오류가 아닌 기정사실이 되었다. 노래 「목포의 눈물」을 썼다는 ‘문일석은 도대체 누구인가?’. 문일석에 대한 ‘여러 ‘설’’을 정리하면서 문일석 찾기의 여정에 나서보려고 한다. 2. 모신문사와 OK 레코드사의 ‘향토노래’ 공모 문일석이 「목포의 눈물」 작사자인 것은 분명하다. 이난영이 취입한 레코드판에도 작사자는 문일석(文一石)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목포의 눈물」이 조선일보에서 공모한 애창가요에서 뽑힌 작품인 것인가? 그리고 조선일보 공모작 제목이 「목포의 눈물」이 아니라 「목포의 노래」였다거나 「목포의 사랑」이었다는 것은 사실인가? 이철의 OK 레코드사는 모신문사와 공동으로 손목인의 곡에 붙일 가사를 현상모집했다. 전국 6대도시 애향가 공모였는데 레코드회사가 가사를 현상모집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전국에서 쏟아져 들어온 3천여통의 응모작 중에서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이 지은 「목포의 노래」가 당선작으로 뽑혔다. 이 가사에 손목인의 곡을 붙여 이난영이 취입한 레코드는 선풍적인 호응을 불러 일으키면서 삽시간에 히트곡이 됐으며 「황성옛터」와 함께 겨레의 설움을 대변하는 노래로 널리 불려졌다.2)
위의 글에 언급된 내용을 확인하면 두 가지의 의문이 모두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OK 레코드사는 ‘모신문사와 공동으로 손목인의 곡에 붙일 가사를 현상모집’을 했는지, ‘한 신문사와 공동으로 향토가요 가사를 공모’했는지 확인이 가능하다면 ‘설’이 아니라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가요 「목포의 눈물」이 태어난 것은 그 뒤 우리 산하가 일제의 손에 들어가 신음하던 1934년이었다. 손목인씨에 따르면 당시 조선일보사는 일제의 갖는 탄압 속에 위협받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붇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OK레코드와 손잡고 향토노래 가사를 공모했다. 여기서 1등으로 당선된 게 바로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의 「목포의 눈물」이었다.3)
위 글을 통해 ‘모신문사’이거나 ‘한 신문사’는 바로 ‘조선일보사’라는 사실이 「목포의 눈물」 작곡가인 손목인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앞의 글에서도 ‘OK레코드’와 ‘향토가요 가사를 공모’했고 문일석의 「목포의 눈물」이 1등으로 당선되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조선일보사에서 ‘OK레코드’와 ‘‘전국6대도시 애향가 공모’나 ‘향토가요 가사를 공모’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1935년 1월 28일 자 <조선일보>에는 「제1회 향토노래 현상모집」 광고, 1935년 2월 15일 자에도 동일한 광고가 확인되는데 광고는 다음과 같다.
이 광고는 OK-레코드사가 낸 광고다. 이 「朝鮮十大都市讚歌募集」광고에는 ‘조선10대도시찬가’를 모집하는데 ‘경성, 평양, 개성, 부산, 대구, 목포, 군산, 원산, 함흥, 청진’을 10대 도시로 지정했다. ‘향토애의 배양’은 ‘자기를 찾고 흙을 친하는 우리들의 필연적 의무’이기 때문이고 ‘지방특색을 여실히 표현’해야 한다는 내용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 ‘3연이나 4연’으로 구성하라는 형식 제한도 두었다. 공모 자격이 ‘당 도시 또는 부근 재주 남녀에 한’함으로써 지역성을 살린 작품을 공모하겠다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2월 말을 마감 기한으로 두고 작품은 OK-레코드사 문예부에서 접수 및 선정하고 당선자에게는 소정 고료를 지급하겠다는 내용도 있다. 그리고 일정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안내했는데 당선자는 OK-레코드사 ‘목록 4월호’에 발표하며 OK-레코드사 작곡부에서 책임 작곡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 ‘OK-레코드사’와 ‘조선일보’가 공동으로 공모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朝鮮十大都市讚歌募集」 광고는 있는데 당선작 발표는 찾아볼 수가 없다. ‘1등으로 당선된 게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의 「목포의 눈물」’인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또 「목포의 눈물」은 제목이 「목포의 노래」였다거나 「목포의 사랑」이었다는 것도 어떤 자료에서도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OK 레코드사에서 낸 광고 「목포의 눈물」에는 “제1회 「향토찬가」 당선작품”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표기되어 있고 “문일석 작시”로 표기되어 있으며 “지방신민요”로 소개하고 있다. 아래는 그 광고다.
음반 발매와 더불어 5만 장이 팔린 유행가 「목포의 눈물」은 목포 출신의 작사자 문일석과 가수 이난영이 합작한 결과로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동포의 강제 이산의 애수와 노적봉 등 배일 전설을 도입하여 저항을 잠재시킨 노래로, 민족감정에 금실이 들어”4)맞았다. ‘조선10대도시찬가’ 모집 광고를 통해서 서우석과 이규태가 말한 ‘전국 6대 도시의 애향가’ 가가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된다. 누가 먼저 썼느냐 하는 선후와 관계없이 ‘조선10대도시찬가’ 공모 당선은 어디로 사라지고 ‘전국 6대 도시의 애향가’ 공모 당선으로 바뀌었다. 오류인지 모르고 이것을 기정사실로 알고 있었으나 이제 「목포의 눈물」 ‘조선10대도시찬가’ 공모 당선작으로 바로 잡으면서 작품 공모 시기도 ‘1935년’으로 바로 잡는다. 제목이 「목포의 노래」였다거나 「목포의 사랑」이었다는 설은 확인되지는 않으나 작곡자 손목인의 말이 신빙성있다.
3. 「목포의 눈물」은 표절인가? 다음은 1935년에 발매된 문일석의 「목포의 눈물」 원문이다. ![]() 문일석의 「목포의 눈물」 가사 문제다. ‘300년 원한 품은’이라는 노랫말이 조선총독부의 사전 검열에 문제가 되자, 작곡가 손목인이 “아무래도 인쇄 과정에서 착오가 생긴 것 같다”며 “이건 오타다. ‘300년’은 백두산 연못이라는 ‘300연’이라는 의미고, ‘원한 품은’이 아니라 ‘원앙 품은’이다”고 기지를 발휘하여 가까스로 검열에 통과할 수 있었다.5) “여담이지만 고인이 되기 전 오성덕씨는 「목포의 눈물」 가사는 자기 것인데 문일석군이 표절해서 응모했다고 뇌까리곤 했습니다”6)라는 기록도 있는데 오성덕은 목포에서 문일석과 함께 성장한 친구이자 『호남평론』에도 작품을 발표한 문학적 동지였다. 따라서 오성덕의 작품을 문일석이 표절의 여부를 가릴 수는 없지만 오성덕의 시 「露積峰」과 유사성이 있어 옮겨본다. 스러지는 녯싸홈터에 문어진 성터
삼백월도 눈물로 속절업스니 서러웁다 功싸은 로적봉이여 재넘는 나그레만 슬품ᄭᅳ으는 처참한 용용풍만은 로적봉 녯소리를 그리여말업시섯노라 충무공 녯자취더욱그리워 기럭이도 처량이 ᄯᅥ우는이밤 로적봉아 로적봉아 웨!말없느냐 오성덕, 「露積峰」, 조선일보, 1928.10.16 오성덕이 1928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露積峰」과 문일석의 「목포의 눈물」의 핵심에는 ‘노적봉’이 있다. 유달산에 있는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지형지물을 활용한 전략으로 왜구를 물리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봉우리로 목포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노적봉 아래에는 목포진이 있다. 오성덕 시의 중심에는 ‘무너진성터’와 ‘삼백월’, ‘슬픔’과 ‘노적봉’과 ‘이순신’과 ‘울음’이 있다. 시상의 중심에 역사적인 공간과 사건이 있고 인물이 있고 시간이 있다. 문일석 시의 중심에는 ‘삼학도’와 ‘눈물’, ‘노적봉’과 ‘유달산’, ‘그리움’ ‘이별’과 ‘목포’가 있다. 시상의 중심에 역사적 공간과 사건이 있다. 그 가운데 ‘절개’라는 정서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막아냈던 이순신의 자취가 있는 노적봉에 올라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젊은이가 느꼈을 슬픔과 비애를 문일석은 ‘임’과 이별의 슬픔으로 전환했다. 시상의 중심에 있는 ‘로적봉’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성에 유사성이 있으나 전후 사정에 관해서는 오성덕과 문일석만이 알 수 있는 문제다. 4. 문일석은 누구인가? 「목포의 눈물」을 쓴 문일석은 누구인가? 문일석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설을 기정사실로 삼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6년 4월 10일 4월 10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탄생 비화에서도 “ok 레코드사에서 주최한 가사 공모전인 '전국 향토 노랫말 경연 대회'에 응모했다. 그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노랫말을 써냈고, 자신의 글이 하나의 힘이 되길 바라며 부모님 몰래 응모했다. 또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라는 의미인 문일석이라는 필명을 사용했으며 놀랍게도 그가 응모한 노랫말은 3000:1의 경쟁을 뚫고 1등을 차지했다. 작곡은 손목인이 맡았고, 노래는 신인가수 이난영이 부르게 됐다. 그 곡은 바로 「목포의 눈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래의 대성공에도 작사가 문일석의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일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사람들은 그를 윤재희라는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프로그램 시청자들은 「목포의 눈물」 작사자 문일석은 본명이 ‘윤재희’라고 인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문일석의 본명이라고 거론된 윤재희는 누구인가? “작사자는 당시 20세이던 문일석(본명 윤재희)이며, 작곡가는 22세 손목인(본명 손득렬)이다. 두 사람 다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이다.”7)는 데 목포보통학교와 전주고보를 거쳐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는 윤재희는 목포보통학교 졸업자 명단에 없을 뿐만 아니라 『와세다대학 동창회지』8)의 졸업자 명단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윤재희는 문일석의 존재를 해명하기 어려워서 후대에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이거나, 실존 인물이었을지라도 잘못된 정보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윤재희는 문일석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죽마고우이자 문학적 동지였던 오성덕이 남긴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서 문일석의 존재를 알 수 있다. 筆者와도 이삭의 「삼백년 원한깊은」 李舜臣장군께서 바위덩이 하나로 大功을 세운 露積峯에 철상 잘 올라 갔었다. 그는 木商 在學 當時부터 巴人 金東煥씨에게 私淑하였고 그말미었던가는 몰라도 相當히 많이 珠玉같은 作品들을 中央의 各 紙上에 발표함을 보았다. 大多數는 都會와 群像 또 鄕土詩었다. (중략) 筆者와 좋은 벗이었으면서 한때는 憎惡로 서로 敬遠하기도 했으나 아까운 天才였다. 感傷期의 소년시절의 大部分을 유달의 어느 틈사귀 하나 떼냄없이 逍遙(소요)하면서 山에게 陶醉(도취)되어 魂마자 홀린 純粹한 유달의 詩人으로 불리었다.9)
위의 오성덕 기록에 따르면 문일석은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재학했다. 파인 김동환에게 사숙했으며, 상당한 작품을 중앙의 지면에 발표했다. 주로 도회와 군상, 향토시였다. 문일석과 ‘感傷期의 소년시절의 大部分을 유달의 어느 틈사귀 하나 떼냄없이 逍遙하면서 山에게 陶醉’되었고 ‘「삼백년 원한깊은」 李舜臣장군께서 바위덩이 하나로 大功을 세운 露積峯’에 자주 올라가서 놀았던 벗이자 ‘魂마자 홀린 純粹한 유달의 詩人’ 문일석이었다. 문일석은 “비록 流行歌 「木浦의 눈물」로 이 江山의 坊坊曲曲을 風謠시켜 그의 名譽를 後世에 남겼지만 그는 차라리 詩人이었기 보다 小說로서 데뷔할 날을 기대리면서 精力을 文學 一路에 쏘다드리고 여름이면 곧잘 뒷개로 나가 쿠로루를 연습하든 水泳選手”였으며 “그의 習作 大部分의 背景이 유달이었으며 옹기종기하게 성냥개비를 들여놓은 듯한 유달계곡의 貧民層 골방이 描寫의 對象이었다.”10) 실재로 그는 소설 2편을 발표했다. 문일석은 「목포의 눈물」만 썼을까? 「목포의 눈물」을 쓴 1935년을 전후해서 문일석이 발표한 작품은 1935년 목포에서 발행한 『호남평론』에서 3편의 작품을 찾을 수 있다. 문이석(文伊石)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 「목매는 줄」이 『호남평론』 제2권 제12호(1936. 12.), 「기차」가 『호남평론』 제3권 제7호(1937.7)에 실렸다. 그리고 일석(一石)으로 시 「바다가에서」가 『호남평론』 제3권 8호(1937.8)에 실렸다. 이 지점에서 문이석(文伊石), 일석(一石)이 동일 인물인지, 그리고 문일석(文一石)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나는 용감히 붓을 놓고 고향에 돌아가 내 고장에 살면서 문학을 사랑하는 청년애호가들을 만나 보았다. 저 유명한 「목포의 눈물」의 作詞를 한 文二石君은 꽤 영롱한 시를 쓰더니 夭死하였지만 소설을 쓰려는 오성덕, 정철, 시를 쓰려는 심인섭, 정기영 등이 가끔씩 그들의 글을 가지고 와서 나의 지도를 받기도 하였었다.11)
박화성은 ‘「목포의 눈물」의 작사를 한 문이석군’은 시를 쓰던 문일석이 요사한 것으로 적었다. 그리고 ‘오성덕, 정철, 시를 쓰려는 심인섭, 정기영’이 함께 작품활동을 한 것으로 회고했다. 박화성이 기억하는 문일석(文一石)은 ‘文二石’으로 「목포의 눈물」을 쓴 시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논의했던 『호남평론』에 소설 「목매는 줄」과 「기차」를 발표했던 ‘문이석(文伊石)’이 문일석일 것이다. 그리고 성씨 ‘문(文)’이 생략되었지만‘ 꽤 영롱한 시’를 쓴 시인이었다는 점에서 일석(一石)으로 시 「바다가에서」를 쓴 이도 문일석(文一石)이라고 할 수 있다. 박화성의 회고가 맞다면 「목포의 눈물」을 쓴 문이석은 일찍 사망했다. 아래는 문일석의 사망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글이다. 初期의 零細한 木浦의 詩壇에 있어서 그래도 慧星같이 빛나든 詩人 몇 분이 開花를 보지 못한채 凋落하고 말았으니 이름마저 아련풋이 記憶나는 郭鍾守, 金玉峰, 崔義順 및 文利朔 朴東和(박동화)의 詩友(시우)들이다. 그들은 一九三二年代(1932년대)에서 一九四六年(1946년) 까지에 혹은 二十四, 五才로 혹은 三十 內外로 하여 生滅이 灰燼 되어버린 不幸한 이 땅의 자식들이다. (중략) 허지만 그들의 臨終이란 詩人답지 않은 最後였다. 주검에 분류된 詩人型이 있을까만은 종수 의순은 肺(폐)로 옥봉은 腹膜(복막)으로 이삭은 장질부사로 동화는 出獄 後 심한 飢餓와 神經異狀으로 平凡한 運命을 하고 보니 몹시도 다 애석한 鬱憤과 追憶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12)
오성덕의 글이 신빙성이 있는가를 확인하려면 언급한 인물 곽종수는 북교초등학교(현) 12회(1921년) 졸업생이고, 김옥봉은 북교초등학교(현) 16회 (1925년) 졸업생이며 박동화는 『호남평론』에 희곡을 발표한 실존 인물이다. 곽종수와 최의순은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김옥봉은 복막(복막염)으로 사망했다. 오성덕이 기록이 정확하다면 문일석의 사망원인은 장질부사(장티푸스)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의 사망과 관련한 또 다른 글이 있다. 李永海兄이 그렇고 羅千洙 文一石 吳德 兄들은 木浦가 나은 詩人이요 木浦의 愛人이요 나의 愛人이기도 하다. 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버렸다. 활작 피여 보지도 못하고 장미꽃보다 진한 사랑을 남긴체 幽明을 달리했다.(중략) 三鶴島와 榮山江과 전설의 로적봉을 노래한 文一石. 그와 나는 호남평론지에 같이 투고도 하고 같이 일도 하였다. 그게 엊그제 같구나. 문형은 목포를 노래했다. 그 노래는 모든 사람의 입에서 불러지고 있지만 그는 가버렸다. 그는 불행한 사람이였다. 가난에 쪼달려 本意아닌 流行歌도 써 보았고 流浪의 길을 더듬다가 他鄕에서 죽엄을 當하였다. 죽는 瞬間에도 그 곁에는 孤獨만이 남아 있었음에 틀림없다.13)
호남평론사에서 ‘같이 투고도 하고 같이 일도’ 했다는 박동화는 문일석이 ‘가난에 쪼달려 本意아닌 流行歌’를 썼는데 그것이 「목포의 눈물」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流浪의 길을 더듬다가 他鄕에서 죽엄을 當’했다고 기록했다. 문일석은 가난해서 고료를 받을 수 있는 ‘조선10대도시찬가모집’에 응했으며 그는 유랑 중에 타향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박동화가 쓴 글에는 본명을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있다. 이름, 즉 본명과 관련하여 ‘호남평론지에 같이 투고도 하고 같이 일도 하였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호남평론』에 ‘文伊石과 ‘一石’으로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이것은 여러 이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본명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확신할 자료는 『호남평론』 제4권 제3호에 실린 「社告」였다. 그것은 『호남평론』에 소설 「목매는 줄」과 「기차」를 발표했던 이름 ‘文伊石’을 기자로 임명한다는 알림이다. 「社告」는 객관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이름으로 인사 발령을 낸다. 「社告」의 이름이 필명이나 이명이 아닌 본명 ‘文伊石’인 것이다. 목포에서 함께 활동했던 나천수도 “서로 다투어 두각을 내세우던 북초, 노변, 항인, 태현, 伊石, 무두인, 덕상 모다 불우의 천재들이었다”14)고 거론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일석(文一石)의 본명은 소설가로 시인으로 호남평론사의 기자였던 ‘문이석(文伊石)’으로 실존이 확인되고 본명도 확인했다.
5. 설움과 울분을 달래준, 시인 문일석 어린 시절부터 유달산에서 뛰어놀았던 유달산의 모든 것을 벗 삼았던 그리고 유달산에 도취해서 영혼마저 순수했던 그는 이른 사망으로 잊혔다. 그를 찾기 위해 나선 10년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확인한 것은 1935년 조선일보사와 OK레코드사에서 공모한 ‘조선10대도시찬가’에 당선된 작품이 「목포의 눈물」이고 문일석(文一石)의 본명은 ‘문이석(文伊石)’이며 그는 이른 나이에 장티푸스로 타지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문일석의 생몰 연대를 밝히지 못했고 학적도 확인하지 못했다. 앞으로 해결할 과제로 남긴다. 덧붙여 문일석이 작사한 노래는 「목포의 눈물」만 있는 것은 아니라 「홍등야화」, 「사나이 걷는 길」, 「목포의 추억」, 「향수의 휘파람」, 「뒷골목 청춘」, 「그 여자의 눈물」, 「가로등 일기」도 있다.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이 작곡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가로등 일기」는 1941년 작품이니 본명이 ‘문이석(文伊石)’인 시인 문일석(文一石)은 1941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문일석이 쓴 「목포의 눈물」만으로 충분히 칭송받아 마땅하다. 그는 가고 없지만 그가 쓴 ‘목포’라는 도시를 노래한 찬가이자 향토가는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인의 설움을 달래주었고, 1980년 이후 무등경기장에서 해태 타이거즈 응원가로 호남인의 울분을 달래주었으니, 그는 이름 없는 무명의 시인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있는 시인으로 될 것이다. 문일석이 「목포의 눈물」을 쓴 이유다. ps: 이 글은 필자가 논문 『한류문화연구』제6권3호(한국한류문화학회, 2026.7)에 발표한 논문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연구 -오류 수정과 작사자 문일석(文一石)의 존재 규명을 중심으로-」을 수정한 것이다. 1) 권혁종, 「이 산하 이노래-삼학도 자락 설움의 눈물만 깊어」, 조선일보, 1990.9.2
2) 서우석, 「가요에 담긴 근세백년 –목포의 눈물」, 경향신문, 1984.5.16 3) 권혁종, 「이 산하 이노래-삼학도 자락 설움의 눈물만 깊어」, 조선일보, 1990.9.2 4) 이규태, 「‘타향살이’ ‘홍도야…’ 감정 복받쳐 자살소동 –100년의 뒤안길에서 40, 유행가 이야기」, 조선일보, 1999.12.17 5) 권혁종, 「이 산하 이노래-삼학도 자락 설움의 눈물만 깊어」, 조선일보, 1990.9.2 6) 차재석, 『삼학도로 가는길』, 세종출판사, 1991, 133쪽. 7) 유차영, 「이난영을 가왕으로 만든 불멸의 애창곡」, 국방일보, 2014.3.2 8) 신익희, 『와세다대학 동창회지』, 와세다대학동창회, 1950, 2 9) 오성우, 「문학과 목포-지루한 유달산의 이야기」, 『호남평론』, 호남평론사, 1950, 10) 오성우, 「문학과 목포-지루한 유달산의 이야기」, 『호남평론』, 호남평론사, 1950, 11) 박화성, 「나의 교유록」33, 동아일보, 1981.2.17. 12) 오성우, 「문학과 목포-지루한 유달산의 이야기」, 『호남평론』, 호남평론사, 1950, 13) 박동화, 「목포의 애인들」, 『목포문학』2권, 항도출판사, 1963, 89쪽. 14) 나천수, 「호평 차일담」, 『호남평론』복간호, 호남평론사, 1950, 82쪽. 글쓴이 이동순 조선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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