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좋은 묏자리가 복을 낳는다? 친족도 원수로 만들지! 게시기간 : 2026-08-21 07:00부터 2030-12-16 21:21까지 등록일 : 2026-08-19 10:2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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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사람이 제기하는 산송 1789년 8월 27일. 이후원(李厚源)은 나주 목사로 부임했다. 나주는 예부터 경치 좋기로 유명했다. 조선 초기에 서거정(徐居正)은 ‘나주는 곡식과 물산이 풍부하다.’고 말했고, 성종 때 나주 교수였던 박성건은 ‘천년의 승경지요, 백성은 편안하고 물산은 풍부하다.’고 <금성별곡(錦城別曲)>에서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랬기에 자못 기대감이 컸다. 그런데 부임하자마자 머리 아픈 송사가 앞에 놓여 있었다.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임홍원(林鴻遠)이란 사람이 산송을 위한 단자를 올렸다. 산송은 판결하기 쉽지 않다. 두 집안이 싸우는 일이라 판단을 내리기도 어렵거니와 권세나 명망 있는 집안끼리 다투면 처결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20여 년 전에 있었던 윤관과 심지원의 묘를 둘러싼 산송 사건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묘가 파주 분수원에 있는데, 윤관의 후손들인 파평 윤씨 집안에서 윤관의 묘를 확인하겠다고 주변 묘를 파헤쳤다. 청송 심씨 집안에서도 맞섰다. 심지원의 손자 심정최가 나섰다. 파주와 황해도 수령들이 해결하려고 애썼지만 결판을 내지 못했다. 결국 이 소송은 조정까지 올라가 임금인 영조가 나섰다. 윤관은 고려 때의 명신이고 심지원은 현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명망 있는 두 집안이 다투다 보니 지방 수령들이 적극 나서기 어려워 임금이 판결해야 했다. 영조는 현재 있는 상태로 두고 각각 자기 집안 묘역을 지키라고 명했다. 하지만 두 집안에서는 다툼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 일로 조정이 시끄러웠고 너무 유명해져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산송은 임금도 깔끔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소송이었다. 임홍원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창계 임영(林泳)의 증손이었다. 임영은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였고 그의 집안은 나주의 명문가였다. 임영의 증손자가 산송을 제기했는데 소송 상대 또한 같은 집안 사람인 친족이었다. 친족끼리 묏자리를 놓고 다투는 상황이었기에 이후원의 마음은 더 무거웠다. 일단 앞뒤 사정을 살펴야 했다. 단자를 펼쳤다. 화민 임홍원이 성주합하께 말씀 올립니다.
저의 숙부의 묘가 나주 서쪽 신걸산 선영 기슭에 있습니다. 지난 봄 생각지도 못했는데 족질 임형진(林瀅鎭)이 그의 선조 묘를 우리 묘역의 산줄기 근처로 옮기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놀라 얼른 편지를 써서 못하게 했더니 형진이 밤낮으로 애걸했습니다. 그리고 5월 초4일에 와서 말하기를 “이미 개토했으니 와서 보고 묻을지 말지 결정해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가서 보니 이미 내맥(來脈) 위에 개토해 놓았는데 맥을 짓누르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진에게 “네가 내맥을 짓누르지 않는 곳에 묻는다고 하더니 지금 이게 무슨 일이냐?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임형진은) 제 옷자락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패악을 부리는데 원수를 해치는 듯이 했습니다. 그래서 형진의 오촌(五寸)인 임화원(林華遠)을 불러서 형진의 지친이며 웃어른으로서 형진의 패악을 막지 못한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형진이 제 집 안팎을 드나들며 발악하고 욕을 하고 또 목메고 죽겠다면서 저를 두렵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패악스럽기는 하나 이미 같은 종족의 조카입니다. 법으로 다스리는 일은 풍속을 해치는 일이고 또 산에 그 선조를 묻지 않아 저로서도 손해본 일이 없어 너그럽게 용서했습니다. ⋯(중략)⋯그런데 8월 18일에 형진이 금장(禁葬)했던 아래쪽에 밤에 몰래 그의 아이의 시신을 묻었는데 내맥을 짓누르는 지점과 가까웠습니다. 사람이고서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아이의 무덤은) 저의 산 내맥을 누를 뿐이 아닙니다. 그 아래 동쪽에는 형진의 5대조 무덤이 있습니다. 중앙은 저의 집안에서 가장 높으신 분의 무덤이고 그 사이에 저의 숙부의 무덤이 있습니다. 형진이 차지하여 몰래 묻은 곳은 세 분 무덤의 맥을 누르니 예에 맞다고 할 수 있습니까. 법으로도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산송이라면 산송이겠지만 선조를 모욕하고 예를 무시하는 것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중략)⋯잘 살피시어 형진에게 아이 무덤을 파 가라고 하시고 지금 이후라도 맥을 누르는 곳에 장사지내는 것은 선조와 집안 어르신의 묘를 곧바로 짓누르는 일이라는 뜻으로 다스려 주십시오.
사정을 보니 임씨 집안 사람끼리 묏자리를 두고 싸우는 친족 간 분쟁이었다. 임홍원의 숙부는 임익하(林翊夏)인데 그의 무덤이 나주 신걸산 기슭에 있었다. 내맥(來脈)은 무덤 위쪽에 있는 종산(宗山)으로부터 내려오는 산줄기이다. 사람들은 이 산줄기에 기운이 흐른다고 생각했다. 신걸산 기슭에 무덤을 만든 것은 산과 산줄기의 기운이 좋아 길지 곧 명당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형진이 5월에 자기 선조를 그곳으로 이장하지 못하자 3개월이 지난 8월 즈음에 내맥 근처에 암장(暗葬)했다는 것이다. 암장은 남의 시선을 피해 밤을 틈타 몰래 시신을 묻는 일이다. 하룻밤 사이에 새 무덤이 생겼으니 임홍원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임홍원은 그 무덤이 내맥을 눌러 좋은 기운을 끊어놓거나 약하게 만들어 숙부의 묘소가 험한 곳으로 될까 산송을 냈다. 임홍원 입장에서는 숙부가 묻힌 곳은 좋은 땅이므로 그 기운을 보호해야 했고, 임형진 입장에서는 기운이 좋은 곳에 선조나 아이를 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속내가 서로 달랐기에 산송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급한 쪽은 임홍원이었다. 내맥 기운을 이어주고 되살리려면 무덤을 없애야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남의 무덤을 제멋대로 파헤치는 사굴(私掘) 행위를 엄격히 금지했고 이를 어기려면 귀양갈 각오를 해야했다. 무덤을 없애는 방법으로는 묻은 이가 스스로 파가는 방법, 수령에게 호소하여 묻은 사람에게 묘를 파 가라는 명령을 내리도록 하는 방법이 있었다. 임홍원은 임형진의 자식 무덤을 함부로 파헤칠 수 없었기에 나주 목사에게 호소했다. 이후원은 즉시 아이의 무덤을 파가라고 처결했다. 이 소송이 이제 끝나기를 바랐다. 난동과 자해 소동으로 번진 산송 임형진은 무덤을 파서 옮기라는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친족 사이에 아이 무덤 하나 정도는 허용해도 될 터인데 야박하게 구는 임홍원이 못마땅했다. 그 사이 목사에게 또 단자를 올렸는지 빨리 무덤을 파가라는 독촉도 받았다. 몇 달 동안 곱씹어 볼수록 분한 마음이 더 커졌다. 임홍원을 죽이고 싶은 생각도 했다. 대장장이 소동에게 잘 드는 낫도 주문하고 임홍원을 죽이겠다고 사방으로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6개월 정도 흐른 1790년 3월 18일에 낫과 돌을 챙긴 후 아내와 아들 임종택(林宗澤)을 데리고 임홍원 집으로 쳐들어갔다. 낫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겁박하고 돌을 던져 문과 벽을 부수었다. 심지어 안채로 들어가 기물도 부수었다. 갑자기 변을 당한 임홍원은 피하느라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다. 이웃 사람들이 와서 도와준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 뜻밖의 일을 당하니 황당했다. 친족 간 항렬로 보나 나이로 따져도 임홍원은 임형진의 어른 항렬이었다. 그런데 아내와 아들까지 끌고 와 친족 어른의 집에서 난동을 부린 일이 괘씸했다. 게다가 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일어났다. 3월 18일 난동 사건으로 임종택이 잡혀가자 그 어머니가 집으로 쳐들어와 자해 소동을 벌였다. 줄로 목을 감고 대바늘로 몸을 찌르며 “여기서 죽어버리겠다.”고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자해했으니 몸에 상처가 생기고 아프게 된 것인데도 임종택과 그 아들 임보갑은 임홍원에게 맞아 그렇게 된 것이라며 고소했다. 이 일로 임홍원 집의 종이 대신 잡혀갔다. 임홍원은 억울했다. 4월 초에 관청에 글을 올렸다. 그 동안에 일어났던 일도 해명하고 임형진 부자를 처벌할 겸 종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나주 백성 임홍원이 겸성주합하께 아룁니다. 제가 임형진에게 모함을 당한 일은 합하께서도 이미 잘 살피셔서 다시 볼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임종택의 어머니가 제 집에서 악행을 피울 때 저희들은 문을 닫고 가만히 있었고 터럭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아픈 줄도 몰랐고, 이웃들도 모두 보았으며 저들 부자도 사람들에게 통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거의 죽을 듯한 모양이 되자 고소했고 처결 내용에 ‘위급하면 지난번 처결한 대로 거행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상황을 잘 살피라는 말이었는데 유향소에서 사람을 보내 저를 잡아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임종택의 어머니가 아픈 데가 없었다는 내용을 밝히려고 종을 보내 좌수에게 말했는데 좌수가 제대로 듣지 않고 저의 집 종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진실인지 아닌지 분별하지도 않고 아프다고 한 임종택 어머니에게 차도가 있었는지 아닌지 등을 논하지도 않고 한쪽 말만 듣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1790년 4월에 임홍원이 겸성주에게 올린 단자. 겸성주합하에게 올린다고 했으니 이후원이 받은 것은 아닌 듯하다. 당시 이후원은 1790년 3월 12일에 이임했고 그 다음에 부임한 이우규(李禹珪)는 4월 11일에 부임했다. 이 단자에 적힌 처결 날짜는 4월 7일이다. 약 한 달 동안 나주 목사 자리가 비어 있었다. 임홍원은 새 목사가 부임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겸성주가 처결해주기를 바랐다. 자신은 임종택 어머니가 아팠다는 사실도 몰랐고 그녀를 때린 적도 없었다고 했다. 다만 유향소에서 처결 내용을 잘못 이해하여 자기 집 종이 잡혀 갇혔으니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다툼은 묏자리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난동과 자해소동으로 인한 상해 사건으로 바뀌었다. 무덤 자리는 죽은 이가 묻힌 곳인데도 산 사람들에게는 폭력을 만들어내는 곳이 되었다. 친족보다 묏자리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 때 화장문화가 성행했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유교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매장문화로 바뀌었다. 상장례를 치르는 데에 묏자리 선정이 중요해졌다. 묏자리 선정 기준도 생겼다. 동기감응(同氣感應)은 그 중 하나였다. 선조와 후손이 같은 기로 감응한다는 말인데 선조의 기운이 편안하면 후손도 편안하고 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풍수지리에서 많이 언급되었는데 성리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성리학 대가인 정이(程頤)는 ‘땅이 좋은 곳은 신령이 편안하고 자손이 번성한다’거나 ‘부모, 조부모, 자손은 기를 같이하여 조상이 편안하면 자손도 편안하고, 조상이 위태로우면 자손도 위태로운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했다. 주자는 1194년 송 황제 영종에게 올린 「산릉의장(山陵議狀)」에서 ‘부모의 묘터를 정하는 데에 불길한 땅을 택하면 신령이 불안하게 되어 자손 또한 죽거나 대가 끊기는 우환이 생긴다.’고 했다. 「산릉의장」은 조선시대 왕의 능침 장소를 정하거나 사대부들이 묘지를 선별할 때에 지침이 되었던 글이다.
송시열이 엮은 『주문초선(朱文抄選)』에 실린 「산릉의장」, ‘길지 곧 좋은 땅을 골라 선조를 묻으면 후손들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묏자리 발복 논리가 정착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길지라면 남의 땅이나 묘역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몰래 무덤을 만드는 일이 성행했다. 또 명당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몇 번이고 이장(移葬)하다가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예산의 가야산 기슭이 ‘2대에 걸쳐 황제가 되는 곳’이란 말을 듣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원군 묘를 가야산으로 옮겼다. 천년 사찰인 가야사도 없애버리면서 이장을 감행했다. 좋은 묏자리를 고르고 그곳 기운을 잘 보존하는 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돌아가신 선조들이 기 눌림 없이 편안히 있도록 하는 것은 효도이다. 그런데 산 사람들이 다투는 것을 보면 오히려 산 사람 자신을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정약용은 살인 사건을 다루다보면 50%는 산송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자기 집안 복록을 위해 온힘을 다해 싸우거나 살해 시도, 살인까지 감행하는 일도 마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익은 때때로 인간 관계를 변질시킨다. 묏자리 발복 신념은 친족 간 도리도 묻어 버리고 친족 관계를 이웃보다 못한 관계로 만들어 버린다. 친족보다 묏자리가 더 중하게 될 때 산송 본래의 성격은 뒷전으로 밀린다. 갈등이 증폭되어 폭력 사건으로 바뀐다. 다툼의 초점이 묏자리가 아니라 누가 폭력을 썼고 누가 어떻게 당했는지로 바뀌는 것이다. 선조를 편안하게 모시려는 효도 명분 뒤에 복록을 향한 욕망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산송과 관련한 옛 문서에 폭력이나 상해를 호소하는 문서가 따라붙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묏자리에 산 사람의 욕망이 겹쳐지는 순간 친족도 원수가 된다. <도움 받은 글들> 한국고문서자료관 https://archive.aks.ac.kr/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s://kyudb.snu.ac.kr/ 김경숙(2002), 「18, 19세기 사족층의 분산 대립과 산송」, 『한국학보』28(4), 일지사. 김경숙(2011),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遠地墳山과 遷葬:해남 해남윤씨가의 사례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103, 한국사학회. 김기덕(2011), 「조선의 매장문화와 풍수사상」, 『역사학연구』44, 호남사학회. 손경찬(2018), 「조선시대 분묘에 관한 소송」, 『법학논문집』 42(1), 중앙대 법학연구원. 신재훈(2015), 「조선 후기 음택풍수의 유행과 정약용의 풍수 인식」, 『장서각』 34, 한국학중앙연구원. 전경목(1996), 「조선후기 산송 연구:18, 19세기 고문서를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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