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성좌] 광주지역 근·현대사의 ‘뿌리 깊은 나무’ 최흥종(崔興琮, 1880~1966) 게시기간 : 2026-08-12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8-05 14:3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항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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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유명한 줄 알았던, 그러나 정작 대부분이 모르는 ‘거성(巨星)’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인물들을 선정할 때 오방(五放) 최흥종은 제외했었다. 필자의 생각에 그는 너무 유명했기에 왠지 식상한 내용이 될 것 같아서였다. 광주의 근·현대사 및 기독교사 연구자, 그리고 YMCA 및 YWCA 관계자들에게 그는 무척 친숙하다. 그리고 누군가 필자에게 광주지역 근·현대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남성은 최흥종, 여성은 조아라라고 대답할 것이다. 필자에게 최흥종은 이 정도로 존경스런 인물이었고, 필자만큼은 아니겠지만 남들도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 가을, 학교 교수 및 학생들과 광주 남구 양림동에서 열리는 몇 번의 문화행사에 참여했고, 주최측의 요청으로 강연 한 꼭지를 맡게 되었다. 장소는 ‘오방최흥종기념관’이었고, 교수와 학생들에게 시간이 되면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다. 민망했지만, 그런 실적도 당시 필자가 맡은 프로그램의 성과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수와 학생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최흥종이 누군데요?”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후 궁금해졌다. 최흥종에 대해 알고 있는 광주시민들은 얼마나 될까. 몇 달 동안 가끔식 기회가 되면 지인들에게 물어봤다. 사회복지학를 전공한 교수 몇 분을 빼면 아무도 몰랐다. 그때 깨달았다. 최흥종은 내 주변의 분들에게만, 달리 말해 광주의 근·현대사 및 기독교사, 아니면 사회복지학을 연구하거나 YMCA 및 YWCA에 관계하는 분들에게만 유명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최흥종에 대한 논문과 저술은 무척 많지만, 그 내용 중에는 필자가 의견을 달리하는 대목도 적지 않다. 그에 대한 많은 연구자들 중 한국근대사 전공자는 필자가 유일한 듯하다. 한국근대사 전공자라고 해서 대단할 것은 없지만, 다른 분야 전공자들보다는 1차 자료를 중시하고 사료비판에 예민하다. 기실 그에 대한 많은 일화들 중에는 ‘전설’을 넘어 ‘신화’에 가까운 것들도 적지 않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 독자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흥종에 대해서는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연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몇 회에 걸쳐 원고를 작성하는 이유다. 오늘은 필자가 존경하는 광주지역 근·현대사의 ‘뿌리 깊은 나무’이자 항일운동계의 ‘거성(巨星)’, 그리고 많은 이들로부터 ‘성자(聖者)’로까지 추앙받는 최흥종의 생애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나오는 최흥종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최흥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다음은 『독립유공자공훈록⑻』(1990)에 나오는 내용이다. 광주 사람이다. 1919년 3월 2일 광주에서 서울에 상경하여 3월 5일에 일어난 학생단체의 제2의 독립만세시위에 찬동하고 동일 8시경 남대문 역전에서 벌어진 대시위에 참가하여 시위하던 중 인력거에 올라서서 『신조선신보(新朝鮮新報)』와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대한문 앞에서는 인력거에 올라서서 조선독립이라 쓴 대형 태극기를 높이 흔들어 시위군중을 선도하며 지휘하다가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9월 1일 조선노동공제회의 광주지회장을 역임하였고, 1927년 10월 29일 신간회 광주지회장을 역임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금 모호한 대목도 있지만 대체로 정확하다. 사소한 지적이지만, 기독교 전도사였던 그가 1919년 3월 5일 대한문 앞에서 흔든 것은 “조선독립이라 쓴 대형 태극기”가 아니라 “조선독립이라 크게 쓴 기(旗)”였다(「최흥종 등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11.06.). 그리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위의 내용은 그의 ‘공적’에서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지 않았다면 그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못했을 것이다. 독립유공자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조금 천박한 표현이지만 ‘사망’·‘투옥’이나 ‘퇴학’과 같은 ‘큰 것 한방’이 필요하다.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이나 신간회 광주지회장도 대단한 것이지만 ‘큰 것 한방’은 아니다. 이것이 독립유공자 선정 시스템의 현실이다.
출생과 성장, 그리고 기독교와의 만남 최흥종의 손자인 최협 전남대 명예교수가 최근 간행한 『五放 최흥종 평전』(한국학호남진흥원, 2024)에 따르면, 최흥종은 1880년 5월 전라도 광주목 부동방면 서문외 지역(현 동구 불로동)에서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용진과 국씨부인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초명(初名)은 ‘영종(泳琮)’이었으며, 5살 때 모친을 여의고 공씨부인 슬하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공씨부인이 낳은 이복동생이 해방 후 초대 전남지사를 지낸 의사 출신 최영욱이다. 최흥종은 1900년 강명환과 결혼하여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15세 되던 1895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방황하는 사춘기를 거쳤다고 하며, ‘광주군의 이름난 주먹’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던 그가 ‘기독교’를 만나게 된 것은 1904년 12월이었다. 1904년 광주 선교를 시작한 미국남장로회의 선교사 배유지(E. Bell)와 오기원(C. C. Owen) 일행은 성탄절인 12월 25일 배유지 선교사의 자택에서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때 호기심에서 참석한 한국인들 중에는 최흥종도 포함됐다. 최흥종과 기독교의 ‘첫 만남’이었고, 이후 그는 평생을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일관되게 ‘청교도(淸敎徒)’처럼 살았다.
순검(巡檢) 생활과 번민, 그리고 정미의병(丁未義兵) 후원 최흥종은 1905년 어느 시점에 광주군 경무청의 순검으로 취직했다. 여기에는 양림동에서 신앙생활을 함께 한 목포의 총순(總巡) 출신인 김윤수 집사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순검 시절 최흥종은 배유지 선교사나 김윤수 집사를 수시로 불쑥불쑥 찾아가 여러 가지 문제를 상담했다고 한다. 하지만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이후 그는 갈등에 빠졌다. 주권을 잃고 껍데기만 남은, 그리고 사실상 일제 통감부가 통치하는 한국의 순검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특히 1905년 ‘을사의병’과 1907년 ‘정미의병’이 그를 고민에 빠뜨렸다. 순검으로서 그 의병들을 체포해야 하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그와 의병에 관련된 많은 일화들이 ‘전설’처럼 회자된다. 안규홍 의병의 부하 12명을 화순에서 호송하던 도중 몰래 풀어줬다거나, 순창에서 총살 직전의 의병 6명을 몰래 풀어줬다거나, 의병 백낙구·이백래·임창모 등이 수감됐을 때 따뜻하게 돌봐줬다거나, 의병장 채기문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고 미리 그에게 알려줘 도망치게 했다거나, 보상의 의병장 임창모의 부하 10여명을 계책을 세워 살펴줬다거나, 체포된 의병장 백낙구와 감방에서 부둥켜 안고 통곡했다거나 하는 등등, 선뜻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을 감안하면, 비록 다소의 과장이나 미화는 있을지언정 그가 의병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갖고 지원한 점은 사실로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그의 근심은 더욱 깊어졌고, 결국 순검을 사직한다. 그리고 그 결정적 계기가 바로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다. 대동의상회(大同義償會)의 설립과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주도 한국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제공받은 차관 1,300만원을 국민의 모금으로 상환하기 위해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이내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러자 최흥종은 순검 신분이면서도 이에 적극 호응하여 1907년 3월 서상기 등과 함께 ‘대동의상회’를 조직했다. 이후 5월 국채보상전남회의와 7월 전남광주국채보상기성회가 설립됐으므로 대동의상회는 광주 최초의 국채보상운동단체였고 최흥종은 그 선구적 인물이었다. 다음은 최흥종의 의연 활동이 실린 기사들이다.
①은 『황성신문』 1907년 3월 29일자로 최흥종 등이 대동의상회를 발기했다는 내용이며, ②는 『황성신문』 1907년 4월 18일자로 대동의상회 최흥종이 40전을 의연했다는 내용이고, ③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6일자로 최흥종이 세 번째로 40전을 의연했으며, 동생 영욱과 모친 공씨도 각각 20전과 40전을 의연했다는 내용이다. 특히 1907년 11월이면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확연히 식어가던 시기임에도 최흥종의 의지는 여전했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순검으로서 이같은 국채보상운동 주도 활동은 오래갈 수 없었다. “국채보상회의 간판을 떼어오고 주동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은 받은 그는 결국 순검을 사직했으며, 7월 농공은행(農工銀行)에 입사했다. 하지만 이 은행이 일본인의 대금업체임을 알고 2개월만에 다시 사직했다고 한다. 따라서 1907년 11월의 기사는 농공은행 사직 이후의 내용이다. 직업이 없는 형편에서도 이처럼 그는 국채보상운동에 매진했다. 글쓴이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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