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경관-명산과 유적-산사의 역사문화경관, 장성 백암산 백양사 게시기간 : 2026-07-30 13:33부터 2026-08-30 13:33까지 등록일 : 2026-07-30 13:4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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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백학봉과 백암산 백양사 「장성 백암산 백양사 일원」이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2008년에 「장성 백양사 백학봉」 명칭으로 지정되었는데, 구역을 확장해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변경 지정사유는 “백암산 일대의 뛰어난 자연경관과 천년고찰 백양사가 지닌 역사문화적·경관적 가치를 통합적으로 보존하고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2024년 5월부터 국가유산제도가 들어서면서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 체계로 바뀌었다. 이 가운데 「장성 백암산 백양사 일원」은 자연유산에 해당하고, 문화경관 또는 역사문화경관으로 분류한다. ‘역사 문화 공간이 기반이 된 자연경관’, ‘자연 기반속에 형성된 역사 문화 공간’ 등 가치 부여의 관점이 다르기도 하다. ‘역사 문화 공간’ 관점에서 자연유산 「장성 백암산 백양사 일원」을 헤적거려 본다. 백양사는 백암산 백학봉 아래 두골의 계곡을 사이에 두고 연꽃 잎이 겹겹이 피어나는 것처럼 봉우리가 감싸고 있다. 상왕봉, 사자봉, 가인봉, 영축봉, 도집봉, 벡학봉, 금강봉, 월영봉, 수령봉 등이다. 현재의 사격으로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 고불총림의 근본도량이다. 백암사, 정토사, 정토선원, 백양사 백양사는 백암사(白巖寺)로 창건연기가 있다. 암석이 모두 백색이어 붙여진 절이름이라 전한다. 백학봉(白鶴峯) 대표적이다. 고려시대 중연(中延) 선사가 크게 중수하고 정토사(淨土寺)라하였다. 정토선원(淨土禪院)이라고도 했다. 1190년대에 85칸을 새로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1431년(세종 13) 장성감무관 공문서로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국왕을 축복하기 위한 관음존상을 모시어 놓기도 한다. 고려 말기 1330년대에 각진국사 복구(覺眞國師 復丘, 1270~1355)가 중창하고 전장법회(轉藏法會)를 하면서 낙성회를 하였다.
전장법회는 대장경을 건너가면서 읽는 불교 의례를 의미한다. 매 권의 처음, 중간, 마지막 몇 줄씩만 읽고 다른 책장은 넘기는 방식이다. 대장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는 간장(看藏)과는 차이가 있다. 승려만이 아니라 인근의 민인들도 참여하였다. 〈백암산 정토사 사적〉에서 ‘사녀노유(士女老幼)’라 했으니 말 그대로 ‘남녀노소’, ‘상하’가 동참한 것이다. 1341년의 전장법회와 낙성회는 10일간 이어졌다. 승려는 153명인데, 사주(社主)가 30명, 최고 지위라 할 대선사가 9명, 사찰을 30개소에 이르렀다. 1348년의 2차 전장법회, 1353년 3차 법회를 복구가 주창하였다. 1409년에 4차 전장법회가 있었다. 백암산 기우제, 고려시대 국제 백암산은 고려시대에 국가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영험한 명산이기도 하였다. 조선사찰사료에 실린 〈백암산 정토사 사적〉을 간추리자면 “가뭄이 들어 온 백성이 근심하자 조정에서 신하를 보내 백암산에서 기우제를 지내자 비가 내렸으므로, 이 산을 영험한 곳으로 여겨 소홀히 할 수 없었다.[唯我本寺白巖山淨土寺 三南小金剛也 或有天旱地枯 萬民咸愁之際 國家大驚 令使俊臣 親祈於此山 則天成降雨 萬民被恩 此所謂靈異之地也 ]”는 내용이다.
뒤이어 청수 운암(淸叟 雲菴)스님이 불사를 하였다. 1370년 폭우로 무너졌던 교루(橋樓)를 수리하고 1377년에는 교루의 기문(〈백암산 정토사 교루기〉)을 삼봉 정도전(1342~1398)에게 받았다. 1381년에는 목은 이색(1328~1396)에게 누각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여 이색이 쌍계루로 명명하였다.(〈백암산 정토사 쌍계루기〉) 청수 운암은 가각존자(覺儼尊者) 복구(復丘 1270~1355)의 조카이다. 행촌 이암(杏村 李嵒 1297~1364)의 동생이다. 이암은 목은 이색의 스승이다. 조선초기에도 전장법회가 있었다. 조선 중기에는 환양(喚羊)선사의 법화경 독경과 흰양[白羊]의 환생 연기로 인해 백양사로(白羊寺)로 불리게 된다. 임진왜란 때는 장성 남문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일어나는데 의승장(義僧將)으로 처능(處能), 자혜(慈惠), 의관(義寬), 계묵(啓黙), 덕인(德忍), 처한(處閒), 학인(學仁), 계한(戒閒), 혜인(惠仁) 등의 승려가 참여한 기록이 호남오산남문창의비(湖南鰲山南門倡義碑)에 나온다. 그 의승들의 절의의 발현은 백양사가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1910년대에 30본산에 들며 1920년에는 백양사 지방학림과 광성의숙을 설립 운영하였다. 1947년 호남고불회가 설립되고, 1996년에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종합수행도량인 총림이 되어 고불총림 백양사(古佛叢林白羊寺)라 한다. 백양사 창건 역사를 전하는 정도전의 <백암산 정토사 교루기>를 비롯하여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하서 김인후, 사암 박순, 면앙정 송순 등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은 유명인사들이 시문을 남겼다. 쌍계루 관련 시서는 『백양사와 쌍계루』(1987)에 215편이 실려 있고 가운데 173편은 쌍계루에 현판이 있다. 목은이 이름한 쌍계루, 대를 이은 제영 200여편 포은 정몽주는 “청수가 누각 세워 비로소 이름 중해졌고 목옹이 기문 짓자 값이 더욱 높아졌네[淸叟起樓名始重 牧翁作記價還增]”라 역사와 승려에 이어 “안개가 아득하니 저녁 산은 붉은빛이고 달빛이 배회하니 가을 시내물이 맑구나 [烟光縹緲暮山紫 月影徘徊秋水澄]”라 하여 백양사 경관을 상상으로 읊었다. 이후 포은 시에 차운한 시가 많다. 또 한 편의 시는 “기암이 구름 속에 나와 채색비단처럼 밝고 시내는 낙엽 머금어 맑은 빛이 일렁이네 [溪涵落木動淸暉 雲吐奇巖明綵練]”라 하여 백학봉의 풍광을 노래한 굉연무열 선사의 시를 들 수 있다. 무열선사는 고려시대 스님으로 『동문선』에 시가 여러 편 전한다. 이 시도 차운시가 이어진다.
쌍계루와 백학봉
쌍계루 현판 – 포은 정몽주, 포은 시와 굉연무열의 시 차운 외에도 여러 편이 있는데, 손곡(蓀谷) 이달(李達, 1539~1612)의 시는 백양사와 쌍계루의 풍광을 읊고 있다.
백암산 기우제, 고려시대 국제 백양사는 산내에 12암자가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기록이 확인된다. 1350년 각진국사가 창건한 운문암(雲門庵) 1351년 세운 약사암(藥師庵, 1351년)과 물외암(物外庵), 영천암(靈泉庵), 1352년의 청류암(清流庵), 1644년 백곡선사가 세운 천진암(天眞庵), 892년 만암선사가 창건한 금강암(金剛庵), 그리고 서양암(西陽庵), 묘련암(妙蓮庵), 백련암(白蓮庵), 지장암(地藏庵), 청량원(淸凉院) 등이다. 1920년대 기록에서도 운문암, 청류암, 약사암, 물외암, 영천암, 천진암, 서양암, 금강암이 확인되어 백양사 본산은 물론 산내 암자도 면면히 불법이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양사와 산내암자는 조선시대 소요태능, 편양언기, 연담유일, 백파, 학명스님, 그리고 근대에 들어 용성, 인곡, 석전, 만암, 고암 스님 등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불교법통을 이어온 고승 선덕들이 상주한 수행근본도량이다. 특히 운문암(雲門庵)은 고려시대 각진국사가 창건하였고 조선시대 이후 근현대기를 이어 고승 뿐만 아니라 학자나 관인, 유배인들까지도 자주 찾는 경관명소처였다. 17세기 초반에 운문암에 오른 구치용(具致用, 1590~1666)은 “골짜기 깊고도 깊어 오솔길 희미한데 물 끓기고 산 다하니 절간에 이르도다[洞壑深深細路微 水窮山盡倒禪扉]”라 하여 깊은 골짜기, 오솔길, 계곡과 절집 등 백암산과 운문암의 경관을 그림 그린 듯이 읊었다. 고산현(高山縣)에서 성리학에 몰두한 유학자인데 백양사의 운문암 경관을 보기 위해 유상을 한 것이다.(《우교당유고(于郊堂遺稿)》) 유배인도 유상한 백양사 암자, 운문암 1703년에 서파 오도일(西坡 吳道一, 1645~1703)은 유배인 신분으로 백양사와 운문암을 유상한다. 오도일은 대제학과 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숙종임금이 "그대 문학을 보니 남과는 월등한 점이 있었다."고 평했을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였다.
운문암은 깎아지른 절벽과 천년 노송, 눈 덮인 산세와 달빛 머금은 누각이 어우러져 고요하면서도 장엄한 산중 경관을 이룬다. 유배객 처지이지만 겨울 산사의 맑고 차가운 풍광을 섬세하게 담아내며, 자연의 숭고함 속에서 깊은 정적과 운치를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운문암은 미타사(彌陀寺)라고도 했다. 오도일이 다녀간 이후 백파대사 긍선(亙璇, 1767~1852)이 이곳을 화장대(華藏臺) 소림굴(少林窟)이라고 일컬으며 결사를 하기도 했다. 이 선교결사에 대한 기문은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지었다. 송강 정철(1536~1593)은 영천굴(靈泉窟)을 유람하고 “만고 세월 전해온 영천굴은 천계에 이르는 조그만 동굴[萬古靈泉窟 三天小洞門]”이라 시를 남긴다.(《송강원집》) 영천굴은 학바위 정상 부근 벼랑에 있는 동굴로 일명 영천암(靈泉庵)이다. 백양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가을 백양사 단풍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백암산 일원의 자연 자원과 전각과 성보, 암자 등 문화유산은 백양 12경을 구성하고 있다. 쌍계루, 운문암, 영천암, 약사암, 감로천, 대웅전, 비자림, 비림, 용수탕, 천진암, 청류암, 봉황대이다. 청류암에 피신한 전봉준 장군 1703년에 서파 오도일(西坡 吳道一, 1645~1703)은 유배인 신분으로 백양사와 운문암을 유상한다. 오도일은 대제학과 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숙종임금이 "그대 문학을 보니 남과는 월등한 점이 있었다."고 평했을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였다. 동학농민혁명 시기 전봉준장군 이야기도 전한다. 1996년에 남도불교문화연구회에서 백양사 학술조사를 할 때 이준곤 교수가 60편의 설화를 수집했는데, 세편이 동학-전봉준장군 이야기이다. 《선봉진일기(先鋒陣日記)》, 《봉남일기(鳳南日記)》,《일본사관함등(日本士官函謄)》 등의 기록에도 나온다. 설화를 통하여 후대에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봉준(全琫準, 전명숙)은 태인전투 패배 뒤 노령을 넘어 입암산성으로 피신한 뒤 백양사에 머물렀으며, 관군의 추격을 피해 담양·순창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백양사는 전봉준의 최후 피신로와 동학농민혁명 말기의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현장이다. 백양사 스님들도 동학군으로 나서기도 했다. 동학군 지도자 응운(應雲, 1854∼1896)스님의 진영은 진영각에 있고 승탑도 있다. 전봉준장군과 관련하여 전승되고 있는 설화를 보자. “전봉준 장군이 마지막 밤을 여기서 묵고 넘어서 여기 능선을 타고 운문암으로 해서 구암사쪽으로 해가지고 쌍치재로 가서 거기서 잡혔다고 해요. 여기서 마지막 밤을 묵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저기 글씨 앞에 보면 바위에 글씨, 무슨 청감로라고 그런다고 해요. 쫓기는 양반이 여기서 새기고 간 것은 아니고, 여기서 쓴 글씨를 뒤에 새겼던 것 같아요.”(제보 현묵 스님/채록 이준곤. 1996.10. 6.)(「백양사의 설화자료」) 백양사의 문화유산은 국가지정 보물로, 소요대사탑(逍遙大師塔)은 소요 태능(1562~1649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종형 승탑이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임진정유왜란 직후인 1607년(선조 40) 현진(玄眞)스님이 수조각승으로 참여한 존상이다. 아미타여래설법도 및 복장유물은 1775년(영조 51) 수화승 색민 스님과 계헌스님 등 11분의 화승이 조성했고 복장낭도 그대로 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유형문화유산 대웅전, 극락전, 사천왕문, 1825년(순조 25) 선운사의 장유스님이 조성하여 정토사로 이안한 각진국사 복구 진영,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청류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1653년(효종 4)에 조성한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소조시왕상 일괄 등이다. 청류암 관음전은 문화유산자료이다. “경관-명산+유적-산사”의 역사문화경관 복합유산 1998년에 사찰유산 지정격을 높이려는 일이 있었는데, 조계산 송광사·선암사 일원, 대둔산 대흥사 일원, 지리산 화엄사 일원은 사적 및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백암산 백양사도 신청하여 대상에 올랐지만 이루지는 못하였다. 다른 사찰처럼 전각이 국가지정 유산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후 소요대사탑이 보물로 승격되었고, 전각도 새로운 자료를 찾아 승격을 준비중이다. 2005년에는 「남도산사 불교유산군」으로 세계유산 잠정목록을 추진한 바 있다. 본사로서 천년고찰인 송광사, 선암사, 대흥사, 백양사, 그리고 국보 사찰 도갑사와 무위사, 천불천탑 운주사가 대상이었다. 이 또한 이루지는 못했지만 ‘전통사찰 산사’의 연속유산 지정 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자연유산은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비자나무숲과 고불매(古佛梅)가 있다. 국가지정 명승으로 「장성 백양사 백학봉」이 2026년 6월 29일자로 「장성 백암산 백양사 일원」으로 변경 지정되었다. “경관-명산+유적-산사”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장성 백양사 백학봉」은 자연환경과 문화적 요인간의 조화를 보여주는 공간이자 종교생활 장소라는 점에서 보면 역사문화공간, 자연의 뛰어나 경치에 인문적 가치가 부여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복합경관, 세계유산협약에서 규정하는 복합유산에 해당할 것이다. 관련 법규의 지정기준에 따른 명승으로서의 특징을 간추려 본다. 우선, 백제시대 창건 이래 1,400여년 동안 한국불교 전통을 이어 온 성지라 할 고불총림 백양사가 있는 역사문화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명산이다. 그리고 기암괴석과 수림 절경 등 자연경관이 뛰어난 산악이라는 점과 천연기념물[제153호]인 “백양사 비자나무 분포 북한지대”를 비롯하여 1,500여종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동물·식물의 서식지로서 산림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백양사(白羊寺)는 종교와 관련된 경승지로서 축생이 제도되었다는 흰양[白羊]과 관련된 역사구전(口傳)이 500여년 이상 절 이름으로 전해지는 저명한 전설지라는 점, 동학농민혁명군의 자취와 민중 교화의 숭고한 역사와 장 소성을 지닌 곳이기도 하며 서향암의 다비의식, 천진암의 사찰음식 등 고유의 가치를 지닌 점, 백학봉과 쌍계루, 운문암 등 백양사 12경과 12암자 등 저명한 경관의 전망 지점이라는 점도 중요한 경관적 가치이다. 그리고 운문암 등 산내 암자와 쌍계루는 고려시대 창건 이래 불가의 고승 석덕은 물론 문관이나 학자, 그리고 유배인들도 넘나들며 유상하고 강마를 했던 문화경관지구라는 점 등에서 역사적,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뛰어나다. 참고문헌 국가유산위원회, 『제1차 국가유산위원회 지질명승조경분과 회의록』, 2026.06.17.
김재희 감수, 박미향·이대연 역, 호남학연구원 편, 『국역 쌍계루 시·서』, 국립공원관리공단 내장산국립공원백암사무소, 2017. 대한불교조계종 백양사, 『명승 ‘장성 백양사 백학봉’ 지정구역 확대를 위한 학술연구 보고서』, 2022. 변시연 편, 『백양사와 쌍계루』, 한국고문연구회, 1987. 불교중앙박물관·제18교구 본사 백양사, 『백암산 백양사』-2023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 2023. 이계표, 「백양사의 역사」, 『불교문화연구』 제6집, 남도불교문화연구회, 1996. 이병희, 「고려말 조선초 백양사의 중창과 경제문제」, 『한국사연구』 제99ㆍ100집, 한국사연구회, 1997. 최원종, 「쌍계루 제영시의 문화사적 의의」, 『호남문화연구』60, 2016. 글쓴이 김희태 전 전라남도 문화유산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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