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담아낸 취봉 이종원의 《산수6폭일지병풍》 게시기간 : 2026-08-05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6-07-30 11:1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한 폭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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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한국의 시골은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던 가난하고 고단했지만, 끈끈한 공동체 의식과 소박한 정취가 살아 숨쉬는 공간이었다. 마을은 대부분 짚을 엮어 지붕을 얹은 초가집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호롱불에 의지하고 우물물을 길어다 써야했다. 소달구지와 지게가 주요 운반 수단이었고,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거나 이동했다. 초가집과 대나무에 싸인 마을, 작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을 한 폭의 화면에 담아내고 자연에 대한 동경과 고단한 현실 인식을 화제시로 쓴 이종원의 그림은 그 시기 현실의 풍경이자, 자연 속에서 위안을 얻고자 했던 삶의 장면이었다. 목포화단 형성의 주역, 그러나 잊혀진 화가 이 그림을 그린 한국 근현대기 화가 취봉(翠峯) 이종원(李鍾元, 1910-1971)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활동하며 목포화단의 형성과 전개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활동을 알려주는 자료가 많지 않고, 작품 또한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지금까지 충분한 미술사적 조명을 받지 못하였다. 이 글에서는 현재 확인되는 전람회 기록과 작품을 바탕으로 이종원의 화업과 그가 목포화단에서 차지했던 위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종원은 전남 신안군 지도면 출신이다.2)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에 세 차례 입선한 기록이 있다. 그가 초기에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종원의 조선미전 첫 출품기록은 1934년 13회에 <강촌만조(江村晩眺)>로 입선한 것이다. 출품 당시 주소가 전남이었던 것을 보면 이종원은 이 지역에서 화업을 시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미술전람회도록에 실려있는 <강촌만조>는 정사각형의 화면에 근경부터 원경까지 빼곡하게 경물을 그렸다(그림 2). 흑백도판이라 작품의 크기, 표현법이나 묘사기법 등을 자세히 살피는데는 한계가 있지만 축(軸) 형태의 화면이 아닌 전람회에 맞는 정방형으로 화면을 구성하였다. 근경은 작은 언덕과 바위를 선으로 묘사하고 먹으로 주름 등을 고려하며 점을 찍었다. 토파 위의 수목은 짙은 먹으로 나뭇잎을 묘사하였는데, 농담의 변화를 고려하지는 않은 듯하다. 근경에서 중경, 중경과 원경의 거리감은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 연무를 활용하여 구분했지만 자연스럽게 처리되지는 못했다. 잡목이 듬성듬성 표현된 원경의 산은 흰 부분을 남겨놓아 비탈과 언덕을 표현하였다. 먹의 사용이나 묘사에 있어서 초보적인 표현이 눈에 띈다. 전통적인 남종화법은 아니지만 피마준(披麻皴)으로 보이는 언덕과 비탈의 선들을 사용하였다.
그림 2 이종원, <강촌만조>,
그림 3 이종원, <맥랑>,
그림 4 이종원, <만하>, 1939년 제18회 이종원은 <맥랑(麥浪)>으로 두 번째 입선했다(그림 3). 첫 입선으로부터 5년이 지난 후에 출품한 작품이다. 화면 아래 중앙에서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너른 보리밭과 몇 그루의 나무와 초가가 묘사되어 있고 멀리 마을이 안개 낀 들판 너머 사라지듯 표현되어 있다. 앞의 작품과는 다른 구성을 보여준다. 실제 있을 법한 일상적인 경관을 소재로 삼아, 전형적인 삼단구도에서 벗어나 원근법을 사용하였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보리밭을 표현한 표현법에서 작은 묵점을 농담으로 조절해 일렁이는 느낌을 주었다. 전통화법에서 벗어난 표현법이다. 다음 해 제19회에 이종원은 <만하(晩霞)>를 출품해 입선했다(그림 4). <만하>는 앞의 두 작품과는 다르게 근경만 부각했다. 실제 경치를 사생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근경 버드나무를 크게 확대하고 중경에 빨래하는 인물을 아주 작게 표현했다. 연무(煙霧)로 싸인 습윤한 분위기는 이상범의 영향으로 생각되는 부분이다. 청전화숙에서 익힌 사생의 시선 <만하>에서 나타나는 소재와 표현의 변화는 이종원이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의 청전화숙(靑田畵塾)에서 수학한 경험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종원이 정확히 언제 청전화숙에 입문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네 차례 열린 《청전화숙전》에 참여했던 것을 알 수 있다.3) 《청전화숙전》은 이상범의 문하생들이 작품을 발표한 동문전으로, 이종원을 비롯해 배렴(裵濂, 1911-1968)·정종여(鄭鍾汝, 1914-1984)·박원수(朴元壽, 1914-2005)·허건(許楗, 1908-1987)·이현옥(李賢玉, 1909-2000)·심은택(沈銀澤, 1887-1948)· 안태원(安泰源, 1917-?)·이건영(李建英, 1922-?) 등 당시 동양화단에서 활동하던 여러 신진 작가가 참여하였다.4) 청전화숙의 교육은 스승이 그려준 체본을 익히는 데 그치지 않고 근경·중경·원경의 구성과 야외 사생을 함께 지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문하생 이현옥의 회고에서도 이상범이 제자들과 야외로 나가 실제 산천을 사생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5) 이러한 교육은 전통적인 화보나 관념산수의 형식을 반복하기보다, 실제 풍경을 관찰하고 화면에 재구성하는 태도를 기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종원의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1934년의 <강촌만조>가 전통적인 산수 구도와 다소 경직된 묘사를 보여준다면, 1939년의 <맥랑>은 보리밭과 초가, 들판 너머의 마을과 같은 일상적인 경관을 원근감 있게 배치하였다. 1940년의 <만하>에서는 근경의 버드나무를 확대하고, 안개에 싸인 습윤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등 사생을 바탕으로 한 화면구성이 한층 뚜렷해졌다. 따라서 이 시기의 변화는 청전화숙에서 이루어진 사생 중심의 교육과 일정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평론가 윤희순은 《청전화숙전》의 작품들이 상투적인 남화의 화제와 누각, 괴석 등의 표현에서 벗어나 사생을 중심으로 한 사실적 경향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였다.6) 이는 청전화숙이 기존 남종화의 관습을 답습하는 공간이라기보다, 실제 자연을 관찰하여 근대적인 산수화로 전환하려 했던 교육·전시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청전화숙전》의 도록과 작품목록이 전하지 않아 이종원이 어떤 작품을 출품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전시 출품작을 통해 그의 당시 화풍을 직접 규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을 보면 이종원은 이상범의 전형적인 화풍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았다. 사생을 중시하는 태도와 연무를 활용한 공간 표현에서는 이상범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지만, 경물의 배치와 필묵에서는 스승이나 다른 문하생들과 구별되는 면모도 나타난다. 이종원은 청전화숙에서 익힌 사생의 태도를 바탕으로 이후 허건·허림을 비롯한 목포화단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화풍을 형성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목포에서 허건과 함께 《청전화숙전》 이후 이종원은 서울보다는 목포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목포는 일제강점기 개항장으로서 1930년대 상업자본과 근대문물이 대거 유입되면서 근대도시로 성장하였고, 많은 화가들이 목포로 몰리면서 해방 이후 화단으로서 목포미술계는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다.7)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이 1945년 재건되면서 목포에서도 미술동맹이 결성되었다.8) 이종원은 목포미술연맹 동양화부에 허건, 김정현과 함께 참여하였다.
사진 1 취봉 이종원과 임인 허림, 1940년대
그림 5 허림, <朝>, 1935년, 종이에 수묵, 126×130cm, 운림산방소장 이종원은 일찍부터 허건, 허림 형제와 교유하며 그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사진 1). 특히 초기 화풍은 허림과 연관이 있어보이는데, 허림이 1935년 조선미전에 출품한 <조(朝)>는 앞서 이종원의 <강촌만조>와 유사한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그림 5). 작품의 소재도 그렇고, 구도와 표현법에서 이종원이 허림의 작품을 염두에 두고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허림은 이 작품을 허건의 과 이상범의 작품을 참고하여 제작했는데, 이종원은 그런 허림의 작품과 유사하게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9) 허림과의 교류가 이종원이 청전화숙에 입문하는 데 일정한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를 직접 뒷받침하는 자료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림 6 이종원, <금강산10폭병풍>,
그림 7 허건, <금강산 보덕굴>, 이종원은 목포에서 허건과 함께 활동하며 실경을 사생했다. 특히 금강산과 부여 낙화암 등을 자주 그린 것으로 확인된다. 전남미술관에 소장된 1941년 제작된 <금강산10폭병풍> 중 8폭 <보덕굴>은 허건의 <금강산 보덕굴>과 구도가 거의 같다(그림 6, 7).10) 허건은 단 폭에 담아냈지만 이종원은 금강산의 유명한 명소를 10폭으로 구성하였다. 이 작품 외에도 광주미술관에 1940년대에 제작한 <금강산8폭병풍>이 전한다.11) 이종원은 세로로 긴 화폭에 근경·중경·원경의 전형적인 삼단구도의 화면구성에 전통적인 표현법을 사용하였다.
그림 8 이종원, <추경산수6폭병풍>, 1941년, 종이에 수묵담채, 136.5×244cm, 미술관솔소장
그림 9 이종원, <추경산수6폭병풍>, 1941년, 종이에 수묵담채, 137×247cm, 미술관솔소장 부여 백마강과 낙화암은 청전 이상범, 고암 이응노, 허건을 비롯해 김정현 등 많은 화가들이 자주 그린 명소이다.12) 이종원은 1937년 허건, 고재호와 함께 부여 백마강 주변을 사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13) 1941년에 제작된 <추경산수6폭병풍>은 6폭 병풍으로 2점이 전하는데, 사이즈가 거의 비슷해서 두 병풍이 하나로 이어진 작품으로 생각된다.14) <그림 8>은 낙화암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멀리서 부감으로 그린 허건의 <낙화암>과는 다르게, 이종원은 조금 더 아래쪽, 즉 고란사 쪽에서 백화정을 올려다보아 근경과 원경의 거리감을 더 잘 표현하였다(그림 10). <그림 9>는 낙화암 건너 백마강 맞은편 강변 나무와 낮은 산이 겹쳐 보이는 풍경으로 <그림 8>과 이어지도록 그린 것이 아닌가 싶다.
원래부터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해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두 병풍을 나란히 두고 보면 산과 강이 이어져 있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의 풍경을 거대한 화폭에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종원은 이곳을 자주 그렸는데, 1951년 <고도부여지인상>과 1960년 <고도부여지인상>, 연대미상의 <낙화암> 등을 남기고 있다.15)
그림 10 허건, <낙화암>, 1938년, 비단에 채색, 95×226cm, 고려대학교박물관소장 종고산 아래서 그려낸 한국의 산천 이종원은 목포화단에서 활동하며 허건에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40년대~50년대 초 ‘남농산인’ 시기였던 허건은 일본화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색화 기법을 버리고 수묵이 강조된 산수를 집중해 그렸다. 전국을 여행하며 점묘법, 갈필법 등으로 실경을 담아내는 데 힘을 쏟았다. 이런 화풍에 ‘신남화’라는 이름도 붙였다. 허건의 짧은 붓터치와 짙은 초묵을 써서 표현하는 방식이라든가, 화면 한쪽에 근경을 다른 한쪽에 원경을 두고 그 사이에 강이나 바다가 가로지르는 구도는 이종원의 <산수8폭일지병풍>에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림 1-1 이종원, 《산수6폭일지병풍》, 부분
그림 1-2 이종원, 《산수6폭일지병풍》, 부분 <산수8곡병풍>은 어딘가 있을 법한 산촌마을을 화폭에 담아낸 작품이다(그림 1). 전통적인 화면구성과 소재는 사경산수화의 향토적이면서 한국적 정서를 보여준다. 화면 오른쪽 근경에 비탈진 얕은 언덕에 세 그루의 버드나무와 작은 밭을 그리고, 돌담과 나무로 둘러싸인 몇 채의 초가집과 대나무 숲 사이의 작은 마을을 근경에 표현하였다(그림 1-1). 주변은 옅은 안개로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두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마을과 주산을 표현하였다. 약간의 푸른색과 노란색을 사용하여 담담한 시골의 정경을 더하였다. 이종원은 그동안 현장사생에서 익힌 묘사방식과 표현에서 더 자유롭고 능숙한 필치를 보여준다. 이종원은 작품의 관지 말미에 ‘종고산하 경운관주인 병제(鍾鼓山下 耕雲館主人幷題)’라고 썼다. 1950년대 이후 이종원은 여수와 군산에서 미술교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종고산은 여수에 있는 산으로 임진왜란 때 산이 스스로 울어 국난을 알려주었다 하여 이순신 장군이 종고산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산의 정상에서는 오동도와 여수해협과 돌산도, 여수 시내를 조망할 수 있으며, 주변에 몇 개의 학교가 있어서 이곳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여수에 머물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화단에서 잠시 멀어졌으리라 생각되지만 작품 세계를 지속적으로 전개해갔다. 실경을 그린 <금강산 연주담>(1969년, 개인소장), <외금강>(1969년), <진주 촉석루>(1971년, 개인소장) 등과 <산수8곡 일지병풍>(1960년, 미술관 솔소장)을 비롯해 전통적인 화법의 관념산수화도 비교적 많이 제작했다. 지역미술사의 빈칸, 이종원 이종원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화단에 이름을 알리고, 청전화숙에서 사생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산수화법을 익혔다. 이후 목포를 중심으로 허건·허림 등 지역 화가들과 교류하며, 여러 지역을 찾아 실경을 그리는 한편 여수와 군산에서 미술교사로 생활하면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해방 이후 허건·김정현과 함께 목포미술연맹 동양화부에서 활동하는 등 목포화단이 형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종원은 개인전을 열거나 지속적인 전람회 출품같은 두드러진 활동이 많지 않아 이른바 ‘재야작가’로서 잊혀진 화가였다. 한때 광주와 목포 지역의 화랑가에서 이종원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16 이종원의 작품에는 이상범에게서 익힌 사생의 태도와 목포화단 작가들의 영향이 함께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는 이상범이나 허건 등의 화풍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여러 경험을 바탕으로 명승뿐 아니라 평범한 마을과 일상의 풍경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아직까지 그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지 않아 생애와 작품세계에 빈칸이 많이 남아 있지만 흩어진 작품과 기록을 찾아 연결하는 과정은 이종원의 미술사적 위치를 재발견하고 목포와 호남 지역미술사의 모습을 더욱 온전하게 밝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1) 아직 이 시의 원전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른 작품에서도 자작시로 보이는 제화시가 발견되는 점을 고려하면, 이종원이 그림을 그리며 직접 지은 시일 가능성이 있다.
2) 이종원에 대해서는 『광주전남 근현대미술총서』Ⅰ(구한말~1945년)((사)한국미술협회 광주전남지회, 2007), 105쪽. 3) 김소연, 「韓國 近代 ‘東洋畵’敎育 硏究」」(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172-178쪽 참조. 4) 《청전화숙전》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매년 봄 서울 화신갤러리에서 총 네 차례 개최되었다. 제1회전은 1941년 3월 13일부터 19일까지 열렸으며 이종원을 비롯하여 배렴, 정종여, 박원수, 허건, 이현옥, 심은택, 안태원, 이건영 등 13명이 참여하였다. 제2회전은 1942년 3월 18일부터 23일까지 개최되었고, 제3회전은 1943년 3월 24일부터 30일까지 문하생 10여 명의 작품 40여 점을 전시하였다. 제4회전은 1944년 4월 12일부터 16일까지 열렸으며 참여 문하생은 20명으로 늘어났다. 관련 기사는 「靑田畵塾展」, 『매일신보』, 1941.3.18.; 「第二回靑田畵塾展」, 『매일신보』, 1942.3.13.; 「十八日부터開幕한 靑田畵塾展 盛況」, 『매일신보』, 1942.3.20.; 「靑田畵塾展」, 『매일신보』, 1943.3.25.; 「第四回靑田畵塾」, 『매일신보』, 1944.4.11.; 「靑田畵塾展 和信에서 開催中」, 『매일신보』, 1944.4.14. 참조. 5) 이현옥, 「남기고 싶은 이야기李賢玉 靑田畫塾과 上海美專 시절의 추억」, 『계간미술』47(중앙일보사, 1988), 148-149쪽; 이혜지, 「霽堂 裵濂(1911-1968)의 作品世界 硏究」(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23), 13쪽 재인용. 6) 윤희순, 「靑田畵塾展을 보고 上」, 『매일신보』(1941.03.19). 7) 신안나·정태영, 『목포의 화맥』(뉴스투데이, 2006), 74-76쪽 참조. 8) 목포에서는 1928년 4월 1일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 목포지부 설립대회를 개최하려 하다가 소위 목포운동분규사건으로 인하여 중지되었는데, 관련자들이 만기 출옥함에 따라 그해 12월 1일 오후 3시부터 목포청년동맹 회관 내에서 지부 설립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다(『중외일보』 1928. 12. 04.「프로연맹목포지부 설립 준비위원회」). 『목포시사』2(목포시 목포시사편찬위원회, 2017), 27쪽, 각주 15) 9) 이에 대해서는 김소영, 「근대적 공간으로의 도시풍경 임인 허림의 <목포 만호동 소견>」, 『호남학산책』 2025.7.15. https://www.hiks.or.kr/HonamHeritage 10) 이종원 <금강산10폭병풍>은 전남미술관 https://artmuseum.jeonnam.go.kr/ 참조. 11) 이종원 <금강산8폭병풍>, <사계산수10폭병풍>은 광주미술관 https://gjartmuse.jeonnam-gwangju.go.kr/ 참조. 12) 허건은 1938년 <부여소견>(부국문화재단 소장)과 <낙화암>(고려대박물관소장)을 제작하였다. 13) 『남농 허건』, 국립현대미술관(결출판사, 2007), 남농 허건 연보, 220쪽. 14) <그림 8> 화면 상단 왼쪽에 ‘峕辛巳榴夏 翠峰’이라는 관지가 있고, <그림 9>에는 화면 오른쪽 하단에는 ‘翠峰’만 써 있다. 15) 1951년, <古都扶餘之印象>, 8폭병풍, 종이에 수묵담채, 96×333cm, 개인소장; 1960년, <古都泗沘之印象>, 8폭병풍, 부여군 소장; <낙화암>, 연대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88.5×53cm, 개인소장. 16) 앞의 책(『광주전남 근현대미술총서』Ⅰ), 105쪽. 참고문헌 『광주전남 근현대미술총서』Ⅰ구한말~1945년, (사)한국미술협회 광주전남지회, 2007.
『목포시사』 1․2․3․4․5, 목포시 목포시사편찬위원회, 2017. 『조선미술전람회도록』, 조선미술전람회 편, 경성, 1922-1940.신안나·정태영, 『목포의 화맥』, 뉴스투데이, 2006. 한국미술연구소편, 『조선미술전람회 기사자료집』 미술사논단 별책부록, 한국미술연구소, 1999. 김소연, 「韓國 近代 ‘東洋畵’敎育 硏究」」,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이혜지, 「霽堂 裵濂(1911-1968)의 作品世界 硏究」,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23. 최경현,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목포화단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21호, 한국근현대 미술사학회, 2010. 광주미술관 https://gjartmuse.jeonnam-gwangju.go.kr/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www.nl.go.kr/newspaper/ 전남미술관 https://artmuseum.jeonnam.go.kr/ 한국학호남진흥원 https://www.hiks.or.kr/HonamHeritage 글쓴이 김소영 한국학호남진흥원 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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