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의 재발견] 없는 사람 꿔서라도 지(제)는 모셔야 게시기간 : 2026-07-29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6-07-23 14:1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민속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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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은 과거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삶을 살펴 오늘날의 모습과 비교해 보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해 보는 학문이다. 선조들의 삶은 이야기, 노래, 의례, 놀이, 신앙 등에 전승되는 기억의 역사이다.”
1. 마을의 안녕을 빌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마한(馬韓) 사람들의 생활 풍속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常以五月田竟祭鬼神, 晝夜酒會, 羣聚歌舞, 舞輒數十人相隨蹋地爲節.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神, 號爲 「天君」. 又立蘇塗, 魏志曰: 「諸國各有別邑, 爲蘇塗,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蘇塗之義, 有似浮屠.」 建大木以縣鈴鼓, 事鬼神.”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지어 노래부르며 춤춘다. 춤출 때에는 수십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의 추수를 끝내고는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여러 국읍에는 각각 한 사람이 천신의 제사를 주재하는데 [그 사람을] ‘천군’이라 부른다. 또 소도를 만들어 거기다가 큰 나무를 세우고서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 《후한서》 〈동이열전〉 한(韓) -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馬韓人知田蠶, 作緜布. 出大栗如梨)’라고 하면서 ‘씨를 뿌리고 난 5월과 추수를 끝내고 난 10월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귀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춤을 추었던 천신제(天神祭)가 있었다’라고 전한다.
마한의 제의는 그해의 풍작을 하느님께〔天神〕 기원하거나 풍작을 감사드리는 동시에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가적 제의가 각 마을 단위로 세분되어 토착화한 것이 마을신앙이다. 1617년(광해군 9) 홍문관 부제학 이성(李惺) 등이 왕명을 받들어 임진란 이후의 충신과 효자, 열녀 등 1천여 명의 이야기를 그림 한 장과 한문 본문 및 한글 언해를 붙여 만든 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이다. 여기에 실린 성언기(成彦器)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판관 셩언긔 셔울 사이니 어려서 죄 잇더니 어미 병들거를 을 맏보고 손락글 그처 약의 화야 나오니 효험을 얻다 어믜 병이 다시 거 겨헤 모욕고 밤의 새도록 하 빌며 손락글 귿며 다리 버혀 나오니 드여 됴화 셜여 만의 죽다 공헌대왕됴애 졍문시니라”
(판관 성언기는 서울 사람이다. 어려서 지조(志操)가 있었더라. 어미가 병에 걸렸거늘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약에 넣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어미의 병이 다시 걸렸거늘 겨울임에도 목욕하고 밤이 새도록 하느님께 빌며 또 손가락을 자르며 장딴지를 베어[割股] 드리니 병이 드디어 좋아졌다가 서른여덟 해 만에 돌아갔다. 공헌대왕 명종 때 정문을 내렸다.) - 〈언기단지(彦器斷指)〉《東國新續三綱行實圖》 - 병에 걸린 어머니의 쾌유(快癒)를 바라며 밤새도록 하느님께 ‘빌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빌다”는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하여 달라고 신이나 사람, 사물 따위에 간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형태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다. 〈언기단자〉에서 성건기의 소원을 들어줄 초월적 존재는 하느님이다. 하느님께 빌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는 것을 신앙(信仰)이라 한다. 마을신앙은 마을 단위의 생활 공동체가 행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를 포함한다. 예를 들면 마을에 출산이나 초상이 있을 때 아이를 낳은 사람이나 개고기를 먹은 사람은 그 집에 출입을 삼가는 등의 금기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마을의 경계나 중심에 있는 신체를 대상으로 제를 올리는 동제(洞祭)는 대표적인 마을신앙이다. 동제는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는 초월적 존재에게 재앙을 멀리하고 화합과 번창을 기원하는 집단적 신앙 행위를 말한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마을을 수호한다고 믿는 초월적 존재가 좌정하거나 강림한다고 믿는 특정 공간에서 특정인이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준비한 제물을 기반으로 소망을 기원하는 의례를 행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동제에는 풍농이나 풍어를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과 재액을 방지할 목적으로 특정한 날에 지속적으로 지내는 제의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일시적으로 지내는 제의가 있다. 2. 매번 빌다 : 마을 지킴이 마을신앙을 집전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행하는 장소인 제당(祭堂), 신앙의 대상이 되는 제신(祭神), 신성한 의식을 행하는 제일(祭日), 의식을 집행하는 사제자(司祭者)가 필수 요건이다. 제당은 마을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그 신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간의 일상생활과는 격리된 곳이어야 한다. 당산(숲), 당집 등으로 부르며 평소에도 신성한 곳이라 여겨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제신은 경배대상이 되는 신체는 구체적인 상징물이다. 신체에는 신이 머물러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은 곧 신이라는 관념이 있다. 전국적으로 볼 때 가장 널리 분포하고 있는 형태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나무이다. 마을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격(神格)은 당산할아버지나 당산할머니처럼 인격화하여 사람처럼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산신이나 용왕처럼 구체화 되어 표현되기도 한다. 제일은 정월 대보름이 가장 많은데, 한해가 시작하는 정월이라는 시점이라는 점과 만월(滿月)이 갖는 풍요로움의 상징성이 더해진 까닭이다. 사제자는 신을 맞이하여 신에게 인간의 기원을 고하는 동시에 신의 뜻을 탐지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마을에서 선출된 주민이 제관이 되어 사제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지역에 따라 무당이나 스님 등이 그 역할을 맡는 경우도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중략>… 웅(雄)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 즉 태백(太伯)(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중략>… 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壇樹;檀樹)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후략>…”
(古記云, “昔有桓𡆮 謂帝釋也. 庻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 …<中略>… 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中略>… 熊女者無與爲婚故每於壇樹下呪願有孕. …<後略>…) -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 일찍부터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신단수(神壇樹, 神檀樹)는 신과 인간의 세계를 잇는 매개체이다. 그러기에 (당산)나무는 가장 많은 지역에서 마을 신의 좌정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장승은 나무나 돌로 다듬어 만든 사람 모양의 형상물(形象物)로 마을 들머리 또는 고개 등지에 세웠던 일종의 수호신이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 “그 산은 바로 원표(元表) 대덕이 옛날에 머물던 곳이다. 원표는 법력으로 덕을 행하고, 정사에 베풀었다. 그리하여 건원(乾元) 2년(759)에 특별히 장생표주(長生標柱) 세우게 하였고, 지금까지 여기에 남아 있다. (其山則元表大德之舊居也表德以法力施于有政是以𠃵元二年特⎵⎵⎵敎植長生標柱至今存焉)”라는 명문이 남아 있어 장승(장생)의 존재 연원이 오래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문신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은 “길가의 나무 장승〔途上木偶〕”이라 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短木偶人腹有文 / 키 작은 목장승 배에 글자 있으니
文云天下大將軍 / 새겨진 그 글씨는 천하대장군이라네 虛名慣是人間世 / 헛된 이름 인간 세상에서 익히 보았기에 此日無心更笑君 / 오늘 무심코 다시 너를 보고 웃노라 - 《풍고집》 - 김조순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854년에 간행한 《풍고집(楓臯集)》에 있는 글이다. 김조순이 본 장승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인데,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남장승이다. 나무로 깎아 세우면 나무장승(목장승)이고, 돌로 깎아 세우면 돌장승(석장승)이다. 나무장승은 주로 소나무와 밤나무를 이용한다. 김조순은 ‘인간 세상 헛된 이름을 보고 웃는다’라고 하였으나, 눈이 큰 퉁방울과 우뚝 솟은 코, 크게 벌려 이빨이 모두 드러나는 입 등의 해학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웃음을 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실제 장흥 방촌마을의 석장승 두 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 짓게 한다. ‘鎭西大將軍’이라는 글귀가 있는 장승은 남장승으로, 얼굴에는 왕방울 눈과 주먹코가 자리하고, 양옆 볼까지 찢어진 입과 귀밑까지 올라간 입꼬리 등은 전체적으로 익살스럽게 활짝 웃는 형상이다. 미륵석불은 전체적으로 풍만하다. 얼굴 반을 차지한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 우뚝 솟은 주먹코가 인상적이다. 진서대장군 몸통은 교통사고로 부러져 시멘트로 붙여 놓은 상태인데, 보험금을 받아먹었다는 말도 전한다. 솟대는 긴 장대 끝에 오리 모양을 깎아 올려놓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간 역할을 하여 화재, 가뭄, 질병 등 재앙을 막아 주는 마을의 수호신이다. 새 모양은 Y자형 나뭇가지로 만들거나, 기역(ㄱ) 자형 나뭇가지를 머리와 목으로 여겨서 Y 자형 나뭇가지나 넓적한 나무판에 연결하여 만들기도 한다. 새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져와 주고, 화마로부터 지켜주며, 홍수를 막아주는 등 다양한 의미로 마을지킴이 역할을 수행한다.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
미 대예 올아셔 금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얄리얄라셩얄라리얄라”(가다가가다가 듣노라 외딴 부엌을 지나가다가 듣노라 사슴이 짐대에 올라가서 해금(奚琴)을 켜는 것을 듣노라) - 〈청산별곡〉 중에서 -
고려가요 〈청산별곡(靑山別曲)〉에 있는 내용이다. ‘사슴이 짐대에 올라 악기를 켜는 것을 듣느다’라는 것인데,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짐대’라는 단어이다. ‘솟대’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짐대’이다. 이 때문에 강원도에서는 솟대를 ‘진또배기〔짐대박이〕’라 부른다.
솟대는 풍수지리사상과 과거 급제에 의한 입신양명의 풍조가 널리 확산됨에 따라 행주행 지세에 돛대로서 세우는 짐대와 급제를 기념하기 위한 화주대(華柱臺)로 분화 발전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입석(立石)은 가공하지 않은 길고 큰 돌을 수직으로 세워 놓은 신앙대상물로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나 평지에 위치한다. 마을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풍수적으로 부족한 곳을 보충하고, 액을 막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조탑은 돌을 하나하나 쌓아 만든 돌무더기로 풍수에서 땅의 힘을 보충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지는데, 궁극적으로는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번창을 기원하는 목적을 지닌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3. 어쩌다 빌다 : 천재지변 마을신앙에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일시적으로 지내는 제의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기우제(祈雨祭)’이다. 기우제는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지내는 의례를 말한다. 수리 시설이 부족했던 시기부터 많이 행해졌던 농업 관련 의례이다.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행해졌는데, 하나의 예를 들면 조선 태종은 재위 18년간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1403년(태종 3) 한 해뿐이다. 그 외 17년 동안은 해마다 2∼3회씩, 16년 한 해 동안에는 9회의 기우제 기록이 보였다. 아울러 비가 그치기를 기원하는 기청제(祈晴祭)도 18년 6회의 기록이 보인다. “봄부터 비가 적게 왔습니다. 청컨대 옛 법식에 의거하여 억울한 옥사를 살펴 다스리시고 궁핍한 자들을 진휼하시며 길가의 시신을 묻어주시기 바랍니다. 악진해독(岳鎭海瀆)과 여러 산천 가운데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곳에 먼저 북교(北郊)에서 기도하십시오. …<후략>…”
(自春少雨. 請依古典, 審理冤獄, 賑恤窮乏, 掩骼埋胔. 先祈岳鎭海瀆諸山川能興雲雨者於北郊. …<後略>… ) - 《고려사절요》 권4, 정종 2년 5월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있는 고려 정종 2년의 기록이다. 여기에 보면 가뭄 때에는 죄수들을 자세히 심리하여 죄 없이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며, 무덤이 파헤쳐져 밖으로 드러난 해골은 묻어 주었다. 그리고 큰 산이나 강, 바다는 구름과 비를 일으키는 곳이기에 먼저 북교(北郊:북쪽 교외. 예전에 창의문 밖의 근교)에서 기도하게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늘이 가뭄을 주는 이유를 인간사의 잘못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가뭄이란 것이 결국은 인간의 원한이 하늘에 닿아 생기는 일이라 여긴 까닭이다. 민간에서 행하는 기우제는 일반적인 동제와 비슷하다. 제관을 선출하고, 제물을 장만한 다음 명산대천에서 제를 모시다. “전라남도 병영(兵營)에서는 수개월 가믈이 계속하야 하지(夏至)가 지내도록 비가 오지 안흠으로 모판은 말할거도 업스며 우선 식수(食水)로 인하여 대곤란이라는 바 지난 이십이일에는 작천면(鵲川面) 일인 측에서 월출산 천왕봉ᄭᅡ지 올라가서 긔우제를 지냇으며 그 익일인 이십삼일에는 병영에 잇는 일인들이 수인산 로적봉에 올라가서 긔우제를 지냇다더라.” (필자-가급적 원문을 그대로 옮겼으나 읽기 편이를 위해 띄어쓰기했음.)
- <兵營祈雨祭>, 《동아일보》, 1929.06.27. 4면- 사회 기사. 일제강점기에 월출산에서 기우제를 지낸 모습이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은 단순히 산기슭이 아니라 산의 정상이다. 정성을 다해 제를 모시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우제가 일반적인 동제와 차이가 있는데, 제를 모시고 난 후에 행하는 또 다른 행위가 있다. 가장 많이 행하는 것은 산 정상 등지에서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지르는 것이다. 이와 함께 명산의 기운을 한 가문이 독점하거나 명산에 시체를 묻으면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마을 명산에 투장한 묘를 찾아서 시체를 파내기도 한다.
또한 부정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명산대천이나 마을의 식수로 사용하는 식수원 등에 개나 돼지, 닭의 피 등을 뿌리거나 여자들이 오줌을 눠서 신성한 곳을 오염시키는 방식이다. 신성한 곳이 더럽혔기 때문에 부정을 씻어내리고 그곳을 정화하기 위하여 비를 내린다고 여긴다. 하나의 예로 화순 춘향 도장리에서는 부녀자들이 마을 냇가에 들어가 옷을 벗고서 키질로 물을 까불리는 행위를 취했다고 한다. 이는 파격적인 행위로 부정한 오염에 기겁한 용왕이 이를 무마시키고자 비를 내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하나의 협박인 셈이다.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행하는 ‘액맥이 디딜방아 세우기’도 비정기적으로 행하는 의례이다. 물론 정월 보름에 정기적으로 행하는 지역도 있지만, 많은 곳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일시적으로 행하는 의례이다. 이것은 이웃 마을에서 훔쳐온 디딜방아를 Y자 형태로 세운 다음 피 묻은 고쟁이나 황토를 바른 고쟁이를 뒤집어씌워 잡귀의 범접을 막는 행위이다. “도장리에서는 인근지역에 전염병이 돈다는 소문이 있으면 전염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디딜방아를 훔쳐다 이를 거꾸로 세운다. 제보자가 시집온 지 2~3년 된 해 7월에 디딜방아를 세운 적이 있다. 디딜방아를 훔치기 며칠 전에 날짜를 정한다. 이곳에서는 가까운 봉덕마을로 많이 갔는데, 특히 개가 없거나 외딴집을 택한다. 남녀가 함께 가며 만약 주인이 깨면 방문을 꽉 막아 나오지 못하게 한다. 짊어지고 돌아올 때는 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논다. 디딜방아가 무거우면 방아 공이를 빼내 버리기도 한다. 마을로 돌아오면 디딜방아를 그날로 세워야 한다. 거꾸로 세우고 여자의 속옷에 황토를 붉게 묻혀 끼운다. 가랑이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발목 부분을 짚으로 묶는다. 세우기를 마치면 풍물울 치고 술을 마시며 논다. 디딜방아는 그 해엔 세워두며 이듬해 큰 비가 올 때 떠내려 보내야 좋다고 한다.”
- 『화순군의 민속과 축제』 중에서 - 디딜방아를 훔치기 위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데, 때로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움까지 일어나기도 한다. 훔쳐 온 디딜방아는 동네 앞에 세우고, 마치 붉은 것이 묻어 있는 은밀한 여성의 속옷을 입고 거꾸로 서 있는 모습을 만든다. 잡귀의 범접을 막고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4. 사람을 꿔서라도 빌다 공동체를 기반으로 유지되고 전승되는 마을신앙은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 등을 겪으면서 주술성 및 종교성이 약화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젊은 세대들은 마을신앙을 미신화하면서 전승의 불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마을신앙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이를 전승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장흥군 부산면 호계마을은 별신제(別神祭)를 모신다. 매년 정월 14일 밤에 모시며, 제관만 20여 명이 선정될 정도로 규모가 상당하다. 별신제는 1702년 무렵부터 모시고 있는데, 천제(天祭)라고도 부른다. 별신제에서 모시는 신은 모두 3위(位)로서 천(天), 지(地), 인(人)을 신격으로 모신다. 마을 북쪽에는 호계(虎溪)가 흐르는데, 천변을 따라 제방이 쌓아져 있다. 호계 주변에 자갈밭이 넓게 펼쳐져 있어 그곳 자갈밭 위 일정한 자리에 제단을 만들어 제를 모셨다. 제단은 하늘의 28숙(宿)을 뜻하는 28개의 대나무를 한지가 끼워진 왼새끼 줄로 엮어서 냇가에 둥그렇게 세워 만들었다. 2013년부터는 마을 인근에 있는 동백정 아래에 콘크리트로 터를 만들어 놓고 이곳에 제단을 설치, 제를 모시기 시작했다.
호계마을 또한 인구 과소화와 고령화로 인해 마을신앙의 전승 약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호계마을의 별신제를 담당하시는 분들은 7~80대의 노인분들이다. 이분들은 힘에 부쳐 풍물 치기가 어렵고, 추위 등으로 인해 갈수록 제의 참여를 어려워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계마을 사람들은 별신제의 지속을 위해 출향 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즉, 별신제를 모시는 날에 맞추어 출향 인사들을 초청했고, 그들은 별신제 제일에 맞추어 고향을 방문하고 있다. 출향 인사들은 고향 사람들과 별신제에 참여함으로써 마을 공동체라는 동질성을 느끼고, 축제적 분위기를 즐긴다. 별신제를 모실 때 풍물을 치기 위해 서울에서 모여 따로 풍물 연습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출향 인사는 마을신앙 전승에 또 다른 주체가 되고 있다. 마을신앙이 전통문화로서 가치를 현재까지 강하게 유지하고 있는 경우, 전승 단위와 주체를 마을에 한정하지 않고 지역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물론 전승 단위와 주체의 확대가 무작위적으로 이루어지면 오히려 전승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에 심사숙고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없는 사람을 꿔서라도(빌려서라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공동체 의례가 지속되기를 빌어야 할 판이다. 도움받은 자료
《後漢書》
《三國遺事》 《樂章歌詞》 《高麗史節要》 《東國新續三綱行實圖》 《楓臯集》 나경수 외, 『장흥 호계마을 사람들의 삶과 앎』, 심미안, 2004. 남도민속학회・화순군, 『화순군의 민속과 축제』, 전남대학교출판부, 1998. 박종오 외, 『한국의 마을신앙-광주광역시ㆍ전라남도』, 국립민속박물관, 2023. 최인학 외, 『한국민속학 새로 읽기』, 민속원, 2000. 표인주, 『남도민속학』, ㈜박이정, 2023. 한정훈 외, 「호남권 마을신앙의 전승과 전망」, 『무형유산학민속연구』 제9집 1권, 무형유산학회, 2024. 《국립민속박물관》(https://www.nfm.go.kr/) 《국립중앙도서관》(https://www.nl.go.kr/)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https://kyudb.snu.ac.kr/main.do) 《동아일보》(https://www.donga.com/) 《제주학연구센터》(http://www.jst.re.kr/main.do) 《화순군청》(https://www.hwasun.go.kr/) 글쓴이 박종오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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