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근현대 시문학] 남도의 서정과 한의 정조 게시기간 : 2026-07-24 16: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7-2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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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근현대 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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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여울에 몰린 銀魚 떼
가응 가응 수워얼 레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白薔薇 밭에 孔雀이 취醉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 술레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것 갈대가 스러진다 旗幅이 찢어진다 강강술레 강강술레 「강강술레」전문 (『강강술레』, 호남출판사, 1955) 노래인 듯 시인 듯 노래인, 놀이인 듯 놀이가 아닌, 한과 서정이 어우러진 흉내 낼 수 없는 남도의 문화와 남도의 서정을 함뿍 담고 있어, 눈앞에서 강강술래를 보는 듯, 무리 속에서 강강술래를 하는 듯하다. 바다에서 육지를 거슬러 오르는 시작점에서 한반도를 휘감아 돌고 만주벌판을 지나 대륙을 향하던 기상도 여기서 비롯된 것일까. 남도의 끝이 아니라 남도의 시작이고 한반도의 끝이 아니라 한반도가 시작된, 여기서부터 발해와 고구려를 향하여 말 달리던 바람을 타고 세계 곳곳의 문화가 되어 누비고 있나니, 여기는 강강술래의 땅, 달빛을 타고 군무를 펼치며 신명으로 뛰었던, 그 안에 설움을 녹여 살려냈던 문화의 전당, 아름다운 노래인 듯, 춤인 듯, 시인 듯, 달무리를 만들었다 풀었다, 열 두발 상모에 세상을 감았다 풀었다, ‘가응 가응 수워얼 레에~ 가응 가응 수워얼 레에~’ 이 아름답고 섧고 신명의 시를 쓴 이동주를 ‘가응 가응 수워얼 레에~’로 불러본다. 해방에서 한국 전쟁기까지 역사적 혼란기를 겪으면서 작가들은 신념과 가치관을 지킬 것인가, 살아 남을 것인가,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고 반목하고 질시하면서도 숙명처럼 작품을 썼다. 그것이 전하는 무엇이 누군가에게는 좌익 사상으로 읽히고 누군가에는 우익 사상을 읽혔던 시절이었다. 힘의 중심축이 흔들리며 한쪽으로 기울기를 다해 갈 때쯤 무게가 쏠린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발력의 작가는 순수문학 옹호자 되었고, 힘을 잃은 쪽의 작가는 북쪽으로 발길을 놓거나 빨갱이로 낙인찍혀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 노래인 듯 놀이인 듯 한과 서정을 버무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시를 썼던 시인 이동주(1920.2.28.~1979.1.28.)도 해방기에서 한국전쟁기 정치체제의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은 행보 속에서 있었다. 이동주 문학에 관하여 앞선 사람들이 밝혀 놓은 것을 보면 이동주는 ‘1935년, 15세 때 <매일신보>에 「추억」이란 시가 처음’실렸고, 1943년 『조광』 6호에 「귀농」, 9호에 「상열」, 11호에 「별리부」를 발표했다고 한다. 그대로 따르게 되면 이동주가 일제 강점기에 발표한 작품은 4편이고 1943년부터 1946년까지는 발표한 작품이 없다. 이동주가 해방기에 역동적인 활동을 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심지어 1946년에는 4인시집 『네동무』를 내기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를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작가연보」에 1946년 “좌경단체인 목포예술문화동맹”1)에 참여했다고만 기록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목포예술문화동맹’을 ‘좌경단체’로 강조함으로써 의식적으로 낙인을 찍었다는 점이다. ‘좌경단체’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국가/정부의 이데올로기 지향이 분명히 했을 때, 그리고 분명한 지향으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허용하지 않을 때 쓴다고 본다면 해방기의 이동주 문학을 예외 상태로 간주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좌경단체인 목포예술문화동맹’과 이동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알 필요가 있겠다. 그래야 ‘좌경단체’ 활동이라고 찍힌 좌표에서 어떻게 벗어나게 되는지, 그리고 서정주의 추천으로 등단이라는 의례를 통과한 후에 깊이 천착했던 세계, 남도의 서정과 한의 정조를 살린 순수서정, 혹은 전통서정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남게 되었는지를 명확히 할 수 있겠다. 이동주의 생애와 사상적 행로는 그만의 시 세계를 구축하게 한 또 다른 이름이었다. 2. 해방기 이동주 문학의 정치성 먼저 좌표 찍은 “좌경단체인 목포예술문화동맹”에서 활동한 해방기 이동주의 문학을 이동주 문학에서 의미가 없는 예외 상태로 둬도 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동주의 문학적 생애와 이데올로기는 이동주 문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에 있다. 그런데 앞선 연구자들이 밝혀 적은 이동주의 문학적 활동은 일제 강점기부터 공식적으로 등단하기 전까지는 이동주의 문학적 활동을 연구 대상에서 제외했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변곡점인 해방과 한국전쟁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기점으로 상정되어 있다. 그에 따라서 작가들이 어떤 행보를 통해 어떤 작품을 생산하였는지, 작가의 사상적인 행보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연관하여 국가체제와 정치체제가 문학을 어떻게 도구화하였으며, 또 작가는 어떻게 방향 전환했는지, 방향 전환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봐야 한다. 그런데도 이 시기의 활동과 작품을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은 모종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사실 이동주는 해방되기 전까지 전라남도 목포부청에서 일했다. 전남 목포에서 해방을 맞은 이동주는 목포의 작가들과 함께 목포예술문화동맹에서 활동했다. 목포예술문화동맹은 1945년 12월 1일 기관지 『예술문화』 창간호를 발행했다. 단풍이 갖들기 시작할 때 모은 원고를 토대로 발행했으니까 8월 말이나 9월 초에 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해방과 함께 목포의 문화예술인들은 기관지를 발행했다. 『예술문화』 창간호부터 함께 한 오성덕, 심인섭, 정철, 이동주는 1946년 4인시집 『네동무』를 냈고, 네 명의 시인 중에서 이동주를 제외한 3명의 시인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문학장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서 이동주의 문학적 생애와 사상적 행보는 3명의 시인과 연관해서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해방기 이동주의 활동은 대단히 열성적이었다. 『예술문화』만 보더라도 매호에 시와 산문, 평론까지 발표했다. 매우 열정적인 활동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활동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대목이 발견된다. 8·15해방 직후 잠시나마 내가 좌경단체에 휩쓸린 것도 사상의 공명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어려서 이래로 동정이 학대받던 편에 서 있었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합류였다. 이래서 나는 사상적 체계에 교란을 일으킨 회환을 남기고 말았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지방에서 소위 좌경문인들과 어울리면서 김동리씨의 「무녀도」로 매혹 당해 내 문학적 태도를 완전히 뒤집고 말았다.2)
이동주는 목포예술문화동맹을 ‘좌경단체’로 지목하고 ‘좌경단체’에서 활동은 했으나 ‘사상에 공명’된 것은 아니었고, 단순히 학대받는 편에 대한 동정이었을 뿐이라고 썼다. 그리고 ‘사상적 체계에 교란’을 일으켜 ‘회환’을 남았으며 목포문화예술동맹 활동을 후회하고 있다고 썼다. 특히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에 매혹되어 ‘지방’의 ‘좌경문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문학적 태도를 완전히 뒤집’었다고 회고한다. 여러 사람이 해방기의 활동에 시집 『네동무』에 12편의 작품이 실렸다는 것만 언급하고 「작품연보」에도 작품의 제목조차도 넣지 않은 것은 이동주의 전언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예술문화』 창간호에 발표한 시 「무궁화 怨情」은 창간 의도를 담은 「권두언」 바로 다음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고, 목포예술문화동맹 기관지로서 창간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잡지에 그의 시가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상징적이다. 그의 사상적인 행보가 ‘동정이 학대받는 편에 서 있었던 나로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고 적극적이었다는 뜻이다. 작품 「무궁화 怨情」과 「집」의 부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 쓸쓸한 봄을
어여삐 보아온 고마운 사람일랑 白民의 後裔에도 오직 서러운 자녀였오. 영리한 種族이 있어 櫻花木 그늘에 酒宴을 팔아 宮殿을 짓기에 바ᄲᅥᆺ더니 어쩌나! 이제 醉한 웃음으로 가쁜 숨결에 가ᄲᅮᆫ 숨결에 내 ᄲᅮᆯ를 다루어 탐낸다. 「무궁화 怨情」부분3) 歲月이 가니 방개도 늙더라 뜯어 헐으면 묏 터만한 이집을 방개 정들어 소시란이 지켜 아들 딸 앉혀놓고 이집 길이길이 지키라 하였더란다 「집」부분4)
위 두 편의 시를 보면 해방을 맞이한 기쁨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시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꽃인 ‘무궁화’에 대한 깊은 감정을 드러낸 화자는 ‘白民의 後裔에도 오직 서러운 자녀’로서 ‘櫻花木 그늘에 酒宴을 팔아/宮殿을 짓기에 바ᄲᅥᆺ’던 현실로부터 ‘이제 醉한 웃음’을 짓고 ‘내 ᄲᅮᆯ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 시에서의 ‘길이길이 지키라’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집’을 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집을 지키는 존재인 ‘방개’는 집을 지킨 존재로서 ‘백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위 시와 연관하여 살필 글은 「고집」이라는 평론이다. 선전만이 문학인의 국가사업이 아니다. 예술이란 그 폭을 크게 잡어서 정치가 포옹할 수 있는 그윽한 그의 품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즉 소재는 어디까지나 정치에 추종한 그리고 능히 위정자의 지침이 될만한 건실한 사상성을 띠워야할게고, 기교는 또한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마력을 갓추어야한단말이다. 이렇게 되면 사상은 골격이요 기교는 피로이니 사상만도 예술이 아니고 기교만도 예술이랄 수 없다. 뼈가 너무 나와도 앙상하고 곱다고 해도 살만 너무 쪄도 호박살이라 물료다. 사상과 기교 이 두 조건이 구비되는 데서 품있고 향기높은 하나의 예술품을 내놀 수 있다는 것이다.5)
이동주는 예술은 ‘능히 위정자의 지침이 될만한’ ‘건실한 사상성’과 ‘아름다운 마력’의 ‘기교’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사상이 골격이요 기교는 피로’이니 만큼 ‘사상과 기교’가 있어야만 ‘품위 있고 향기 있는 예술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글에 대하여 “정치와 문화인의 관련이며 애정문제를 들어 예리한 분석과 해부에는 지식인의 두상에 일철철이 나린듯하다.”6)는 평이 붙었을 만큼 그는 목포예술문화동맹의 맹원으로 열성적이었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예술문화』 3집 편집후기에 이렇게 썼다. 지방에서 내는 잡지래서 중앙에 비굴하고싶지 안다. 그렇다고 井底蛙노릇으로 편협하지 않으리라/얼마든지 문을 활작 열어제끼고 밀고 나서련다/광주에 있으면 으레 전남을 팔고 서울에만 있으면 으레 중앙 운운연하니 은연히 憤感도 든다/3집을 내도록 종합지 굴레를 못버슴은 유감이나 차차 나가는 동안 이 『예술문화』윤곽이 또렷하여질게다/이번호에 실린 작품을 어엿이 남에게 자부허고 싶은 작품은 없다. 꾸준히 나가는 동안 실력의 무게와 품높은 예술의 향기 남이 저절로 알거케 노력해야 할게다. 두루 바쁜 가운데 집필에 애쓰신 김홍배님께 감사하는 바이며 독자제현의 건강을 빌며 이 싹을 짓밟지 마시고 애호해주시기 바란다. (李)
목포예술문화동맹 문학부는 오성덕과 이동주가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포 지역에서 『예술문화』를 발행에 종이가 부족해서 어렵다는 고충을 토로하기도 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아직 ‘자부헐’만한 작품은 없지만 ‘실력의 무게와 품높은 예술의 향기 남이 저절로 알거케’ 하겠다는 각오까지 다지고 있다. 덧붙여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편협하지 않게 하겠다는 각오를 내비치고 있고 광주와 중앙에 대한 ‘분감’, 즉 상대적인 환경에서 오는 문화적인 수혜와 문학 권력이 대도시에 집중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도 있다. 이것을 보면 이동주는 목포예술문화동맹 활동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박화성은 이동주를 아래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루는 그 소위 국민복이라는 쑥색 군복에 군모까지 쓴 미청년이 찾아왔다. 자기는 목포부청의 임시직원으로 근무하는 이동주라고 하면서 고향은 강진이며 시를 좋아하여 시도 써보았고 김영랑시인도 상면하였다고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차근차근 얘기를 펴갔다. 참으로 반가운 손님이어서 일면이 여구로 맘이 통하였다.
그는 자작의 시라고 「귀농」을 가지고 와서 지도를 바란다면서 내놓았는데 무심코 읽어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믐밤의 하늘에서 작은 별이 반짝 빛나듯이 재기가 번뜩여서 나는 곰곰 그를 다시 보았다. 대견하기 그지없는 청년이었다. 그후로도 이동주는 많은 시와 길게 쓴 산문 등을 가지고 와서 내평을 원하였는데 산문만은 여러군데의 지적을 하였지만 시는 참 자기의 생김새처럼 곱게 산뜻하게 썼다. (박화성, 「교우록」, 동아일보, 1981.2.17.) 박화성의 회고에는 목포부청에서 직원으로 ‘국민복이라는 쑥색 군복에 군모까지 쓴 미청년’ 이동주를 처음 만났던 모습부터 작품 「귀농」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믐밤의 하늘에서 작은 별이 반짝 빛나듯이 재기가 번뜩’였던 산문보다는 시를 더 잘 썼다고 평까지 붙였다. 다만 이동주의 고향을 ‘해남’이 아닌 ‘강진’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는데 아마도 강진이 고향인 김영랑을 직접 찾아가서 만났다고 한 것을 강진으로 기억한 듯하다. 박화성은 목포 문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해방이 되자 목포의 문학열도 높이 솟아올랐다. 우리는 「문학동우회」라는 명칭으로 한 달에 한번씩 내 집에 모여서 작품도 발표하고 작품(현역문인들의)에 대한 독후감 비슷한 단평들도 하였다. 당시 항도여중 교장이었던 수필가 조희관, 시를 쓰는 심인섭, 박정온, 전승묵, 정기영과 소설을 쓰는 박상권, 정철, 백두성, 이가형, 평론을 쓰는 장병준, 차재석, 희곡에 박경창 등등 10여명의 문학인들이 합평과 친목으로 값진 시간들을 보냈는데 모두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그랬는지 지도자격의 내 능력이 모자라서 인지 팜플렛 정도의 출판물하나 못가져본 것이 후회막급의 탄식인 것이다. (박화성,「교우록」, 동아일보, 1981.2.17.)
박화성은 ‘지도자격의 내 능력이 모자라서 인지 팜플렛 정도의 출판물하나 못가져’봤다고 한다. ‘팜플렛 정도의 출판물’을 못가져본 것이 아니라 예술문화』를 4권이나 발행했기 때문이다. 박화성이 회고록을 쓴 1981년은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동하던 때, 굳이 사실대로 써서 의심을 소거한 자기검열로 기억을 조작하여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그는 『예술문화』 창간호에는 「유달산에 올라」, 『예술문화』2집에는 「눈보라」, 『예술문화』3집에는 「시풍형께」, 『예술문화』4집에는 「헐어진 청년회관」을 썼으면서 ‘팜플렛 정도의 출판물’을 내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박화성의 기억 조작/사실 왜곡은 이동주가 사상의 공명에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동정심이 많아서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합류였다는 회고 만큼이나 정치적인 회고인 셈이다. 이동주는 1947년 2월 26일 광주부(광주광역시) 북정유치원에서 열린 “민주주의적인 민족문학을 수립하자는 커다란 리념”7)을 내세운 광주문학가동맹 결성식에서 개회사를 한 광주문학가동맹 지도급 맹원이었다. 그런데도 이동주는 단순히 ‘사상적 체계에 교란을 일으킨 회환을 남기고 말았다’고 한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4인시집 『네동무』를 함께 냈던 오성덕, 정철, 심인섭이 한국전쟁 전후해 모두가 행방불명이다. 그가 「희생과 파탄 속에서」 8)를 쓴 것은 “이념의 시대에 남한 문인들의 첫 번째 생존 조건은 자신이 반공주의자임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특히 부역 혹은 혐의를 받고 있었던 문인들의 경우는 더욱 절실한 문제였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속죄”9)의 의미로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표명해야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나오며 이동주는 자기부정은 결론적으로 한국 시문학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했다. 1950년 1월 『문예』에 「黃昏」, 3월 「새댁」, 4월 「婚夜」가 서정주의 추천으로 중앙 문단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추천완료를 마치고 그는 “시를 알뜰하게 곱게” 쓰고 싶고 “혼이 詩仙이 모이면 멋을 찾는데 그야단 밝은밤 다락에 올라 즈진고치의 美妓와 더부러 梅花酒 한잔 드는 風月멋이야 不소 이참판의 후예인데 안목이 그만 못하랴.”고 낭만적인 발언을 했다. 이전과 다른 시인 이동주 1951년에는 시집 『혼야』를, 1955년에는 시집 『강강술레』를 내면서 전통의 민속과 풍속을 밀도 있게 구현한 시인이 되었다. 2권의 시집을 광주에서 낸 후에 그는 전북 익산으로, 서울로 거쳐를 옮겼고 시집 『산조』와 실명 소설 『빛이 쌓이는 군무』도 냈다. “세월이 흘러 꿈마저 흘러 홀연히 배 위에 오른 초라한 행색의 나그네 일지라도 이렇게 오고 가는 서정이야 별보다 달보다 오래인 자랑일 것”이라던 그의 서정은 오늘도 “금실은 구구 비둘기/열두 병풍 첩첩산곡’(「혼야」)에서 ‘가응 가응 수워얼 레에~ 가응 가응 수워얼 레에~’에 감긴 ‘열 두발 상모’는 백두를 건너 북망을 지나 오대양 육대주를 휘감아 돈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1) 송영순, 「작품연보」, 『이동주시전집』, 현대문학사, 2010, 347쪽.
2) 이동주, 「희생과 파탄 속에서」, 『현대문학』, 1962. 6, 185쪽. 3) 이동주, 「무궁화 怨情」, 『예술문화』 창간호, 1945.12.1, 2~3쪽. 4) 이동주, 「집」, 『예술문화』 2호, 1946.1.1. 26~28쪽. 5) 이동주, 「고집」, 『예술문화』2집, 1946.1, 21~22쪽. 6) 「후예」, 『예술문화』 2호, 1946.1, 114쪽. 7) 동광신문, 1947.2.28 8) 이동주, 「희생과 파탄 속에서」, 『현대문학』, 1962. 6, 185쪽. 9) 서동수, 「한국전쟁기 반공텍스트와 고백의 정치학」, <한국현대문학연구>, 제20집, 한국현대문학회, 2006, 81쪽. 글쓴이 이동순 조선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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