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문극겸, 고간원으로 후손을 모으다 게시기간 : 2026-07-08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7-0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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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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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극겸, 무신들 속에서 빛난 문신 주운(朱雲)이 난간 부러뜨린 건 명예를 구하려던 것 아니고
원앙(袁盎)이 수레 막은 일이 어찌 제 한 몸 위해서였으랴. 한 조각 붉은 충정을 하늘이 비춰주지 않으니 여윈 말 채찍질하며 물러 나와 머뭇거리네. 문극겸이 공주 유구역 근처를 지날 때 지었다는 시이다. 1163(의종 17)에 좌정언을 지낼 적에 상소문 한 편을 올렸다. 상소에서 지목했던 이들은 내시 백선연(白善淵) 궁인 무비(無比) 술인(術人) 영의(榮儀) 최유칭(崔褎偁) 등이었다. 백선연은 상벌 주는 일은 제멋대로 했고 무비와 추잡스런 행위를 벌였다. 영의는 왕에게 아첨하고 사사롭게 재물을 쌓았다. 특히 이 일을 백선연과 함께 했다. 최유칭은 탐욕이 끝이 없어 백성들의 재물을 탈취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꼭 해를 입히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문극겸은 이들이 나라에 해를 끼치므로 쫓아내거나 목을 베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일로 벼슬을 잃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시에 나오는 주운은 한나라 성제 때 사람이다. 황제가 안창후와 장우를 특진시키려고 하자 적극 반대했는데 강제로 끌려 나갈 때 난간을 붙잡고 버티니 난간이 부러졌다고 한다. 원앙은 효문제가 수레를 타고 급하게 몰아 다칠까봐 걱정하여 수레를 멈추게 했다. 나라와 왕을 위한 충심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이들은 후대에 충언하는 신하의 본보기로 자주 등장한다. 문극겸은 억울하게 쫓겨났지만 여전히 왕을 위해 걱정하는 충정이 깊었다. 그러다보니 개경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시를 남기고 공주를 떠났고 시는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퍼져나갔다. 이후 황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 때 많은 문신들이 죽었다. 그러나 문극겸은 직간했던 신하라는 명성을 들었던 사람에 의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명종대에 지추밀원사, 판예부사, 판병부사, 권판상서이부사 등을 역임했다. 명종대는 무인이었던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이 차례로 권력을 잡았던 이른바 무신 집권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극겸은 문신으로서 왕을 힘껏 보필했다. 그가 죽었을 때 명종은 3일 동안이나 조회를 정지했다. 충숙공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명종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오래된 무덤 찾기에는 곡절도 많아 1765년 즈음 남평 문씨 집안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천안에 사는 문덕수(文德壽)가 영남에 갔다가 돌아와서 ‘충숙공의 묘가 공주 신상면 고간원(叩諫院)에 있다.’고 말했다. 묘가 있는 장소가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이다. 소식을 접한 문도규는 공주로 가서 이리저리 정보를 탐색했다. 마을 사람들은 외떨어진 무덤을 가리켜 문상공 묘라고 했다. 금계산 아랫마을에 10여 대 동안 계속 살았던 조씨 집안 사람인 조정무(趙挺茂)도 문상공 묘라고 했고 심지어 비갈의 윗부분에서 이름까지 보았다고 했다. 다만 비갈의 아래 부분은 땅에 묻혀 있다고 했다. 문도규는 집으로 돌아와 7월 1일 즈음 종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충숙공 선조의 선영이 공주 신상면 고간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미 알고 계신지요. 올해 봄 천안에 사는 문덕수가 영남에서 와 말하기를 각도에 사는 종인들이 마곡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저는 옥구에 사는 종인들과 갔었는데 다른 지역 종인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산 아래 동네에서 자면서 알아보니 모두 문상공의 묘라고 말했습니다. 조정무는 10여 대가 이 땅에서 살았다는 집안의 사람인데 산소를 가리켜 문상공의 묘라고 하고, 부근의 묵은 땅을 밭으로 개간할 때 비갈이 나타나 이름까지 직접 보았다고 합니다.
1765년 7월에 문도규 등이 발송한 편지. 문극겸 묘를 확인하기 위해 가을에 비갈을 찾아볼 계획임을 알리고 있다. 여러 종인 40여 명과 상의하여 다시 조정무를 찾아갔습니다. 조정무는 처음에 우물쭈물 숨기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그 비갈이 너무 깊이 묻혀져 있어 자세한 장소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선조의 묘가 황량하고 봉분도 무너져 있는데 비갈의 문자를 직접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저 내버려두어서는 될 것입니다. …(중략)…먼저 영남의 종인들에게 통문을 발송하고 이후 본도에 보낼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능주에 사는 문봉양이 고간원에 왕래하는 편이 있어 한 통 써서 보냅니다. 오는 가을에 그 비갈을 찾는 일에 대해 종회할 날짜를 확정하여 알려드릴 것입니다. 신상면으로 가 그곳 주민들의 말을 들은 문도규는 기어코 비갈을 찾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비갈이 묻힌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직접 가서 땅을 파서 비갈을 찾고 봉분을 다시 정비하며 제사를 지내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7월 27일에는 각지의 종인들에게 통문도 띄웠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뜻을 모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문계렴 등 영남의 종인들은 신중하게 다루기를 요청했다.
공주 마곡사에서 종인들이 모인 일은 처음부터 서너 명의 종인들이 섣불리 말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중략)…처음부터 근거 없는 민간의 이야기를 갖고 옛 무덤을 선조의 묘라고 지목한 것부터가 이미 경솔했습니다. 만약 선조의 묘라고 의심했더라도 묘을 파헤쳐 가며 증거를 얻고자 한 것은 사리에 맞지도 않습니다. 또 끝내 한 글자의 기록도 찾지 못했는데 봉분을 쌓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요.
1765년 12월에 영남의 문계렴, 문계탁, 문계동 등이 보낸 편지. 문극겸 묘소를 확정하는 일을 신중하게 다루기를 요청했다. 전주와 옥구의 여러 종인들의 생각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능주 등의 여러 종인들의 뜻은 우리 영남에 있는 종인들과 같을 것입니다. …(중략)…충숙공 선조의 묘소에 대해서는 웅치골(熊峙洞)에 있다고도 하고 고간원에 있다고도 지목합니다. 그런데 모두 믿을 만한 자취를 못 봤고 증험도 없습니다. 혹 다시 일을 거행한다고해도 믿고 따르겠다는 마음은 없습니다. 전주와 옥구의 종인들은 대체로 공주 고간원에 있는 무덤을 문극겸의 묘소로 인정하는 편이었고 영남의 종인들은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때까지 신중하게 진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뜬소문에 기대어 조상 무덤을 결정하려는 마음은 전혀 없다고 잘라 거절했다. 공주 고간원 묘소 일에 대해 계속 추진하려는 이도 있었지만 신중하게 다뤄야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호남과 영남의 종인들이 논의하는 사이에 5,6년이 훌쩍 지났다. 1773년 즈음 문도규는 몇몇 종인들이 모의하여 묘 관련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즉시 통문을 돌렸다.
우리 충숙공의 묘는 공주 고간원 금계산 아래에 있습니다. 그곳의 노인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문정승의 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을유년(1765년) 10월에 가서 이야기를 듣고 찾아본 지 5, 6년이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믿을 만한 자취를 찾지 못했습니다. 당시 팔도에 있는 종인들의 의견은 훗날 진짜 자취를 얻은 연후에 수호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천안의 문덕수, 연산의 문선갑, 진잠의 문진함, 옥구의 문응주 등 네 사람이 관북에 사는 문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부탁하여 족보까지 만들었습니다.
1773년 문도규가 발송한 통문 그러면서 삼남의 여러 종친들에게는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중략)…계산(곧 金鷄山) 분묘의 일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있어 허실을 분별하기도 어렵습니다. 지난 1765년 을유년에 모였던 것은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불과할 뿐입니다.그런데 저 네 사람과 서북 사람이 함께 족보도 만들고 옛날에 관아에 올렸던 문서를 근거로 삼아 하나의 오래된 무덤을 충숙공의 무덤이라고 하면서 봄가을로 제사도 올리고 비갈도 세우려고 합니다. 또한 삼남의 종인들에게는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문도규는 1765년에 공주까지 갔다 왔고 문극겸의 비갈을 캐내자고 했다. 다만 그 동안 확실한 물증인 비갈을 찾지 못했다. 그곳이 진짜 문극겸의 묘라고 확정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네 사람이 서북 사람들과 공모하여 공주 금계산에 있는 묘를 문극겸 묘로 단정하고 비석을 세운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족보까지 만들면서 다른 지역 종인들에게는 아무말도 전하지 않은 것이 더 화를 돋우었다. 영남의 종인들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엇보다 같은 조상의 후손이건만 시비를 분별하는 데에 서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여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살까 부끄러워했다. 먼 옛날 조상의 자취가 희미한 만큼 후손들의 생각도 갈라졌다. 몇 백 년이나 흐른 뒤에 조상의 묘역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희미한 자취, 기록도 제각각 문극겸은 문익점과 함께 남평 문씨 집안에서 손꼽는 훌륭한 선조이다. 자랑할 만한 선조의 묘를 찾아 정비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사는 후손들에게 문극겸은 아주 옛날의 조상이었다. 그러다보니 문극겸의 묘 위치에 관한 정보도 들쑥날쑥했다. 1735년 진주 오대사에서 간행한 족보에는 문극겸 묘소 관련 정보가 없다. 이 족보는 묘소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경우 그 장소를 썼는데 묘소 정보가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지 못한 상황 때문이었을 터이다. 1796년의 족보에는 ‘공주 신상면 고간원 금계산 갑좌(甲坐)’로 기록했다.
1808년 능주 쌍봉사 간행 족보와 1846년 능주 원동 간행 족보에는 ‘남평에서 40리 즈음에 있는 웅치산 골짜기 북향 자리에 합영(合塋)’ 이라고 써 있다. 웅치산에 부인과 함께 묻혔다는 말이다. 1854년 옥구 은적사에서 펴낸 족보에는 ‘묘가 남평 웅치산 골짜기 북향 자리’라고 하면서 ‘정임(丁壬)의 족보에는 공주 금계산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라는 말도 써 넣었다. 1864년 족보에는 ‘공주 신상면 고간원 금계산 갑좌, 그리고 남평 덕룡산에 합장했다고도 한다.’라고 썼다. 덕룡산은 곧 웅치산인데 이곳이라고 확언하는 어조는 아니며 다만 그런 말도 있다는 태도를 보여준다. 1873년 족보에는 ‘옛 족보인 정임(丁壬)에서는 공주 금계산 갑좌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 공주읍지를 보니 고간원이 공의 체백(體魄) 곧 시신이 있는 곳이라 쓰여 있기에 이렇게 고쳐 썼다.’고 했다.
1874년 족보에 실린 문극겸의 묘도 공주읍지인 <공산지(公山誌)>는 1859년에 간행되었는데 이를 보고 묘 위치를 수정한 것이다. 한편 1920년에 발행된 <남평문씨세보>에서는 ‘공주 금계산 갑좌, 철종 계해년 곧 1863년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그 글은 조득림(趙得林) 지었다.’고 썼다. 남평문씨 족보이건만 문극겸의 묘 위치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1873(계유년)의 족보에는 공주 고간원이 공의 묘자리이므로 수정한다고 하였다.
왼쪽 :1808년 능주 쌍봉사에서 간행한 족보에 기록된 문극겸 묘 위치.
한데 모여 하나로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에 고간원(叩諫院) 건물과 문극겸의 묘가 있다. 고간은 말고삐를 끌어당기면서 왕에게 충언을 했다는 백이와 숙제의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문극겸이 의종에게 직언하던 일을 기억하고 그곳에 무덤이 있어 마을 이름도 고간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간원 옆에 문극겸의 묘가 잘 정비되어 있다. 제사를 올릴 때면 각 지역의 문씨 종인들이 이 한곳에 모여 마음을 함께 한다. 한때는 비록 남평 웅치산이다 공주 고간원이다라고 하면서 서로 엇갈린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가 되었다. 묘역은 죽은 이가 묻힌 곳이라는 의미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종인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넘어 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긍지를 갖게 하는 공간이다. 고간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문극겸의 묘역은 후손들이 서로 고간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여 조화를 이뤄 결속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1859년에 나온 『공산지(公山誌)에 기록된 문극겸 묘소 위치. <도움 받은 글들> 한국고전종합 DB db.itkc.or.kr/
한국학자료센터 https://kostma.aks.ac.kr/ 『남평문씨족보』 『남평문씨세보』, 1920. 우리조상뿌리찾기편찬위원회(2009), 『공주세거 남평문씨 충숙공 문극겸의 사적』, 공주문화원. 신수정(1999), 「무신정권과 문극겸」, 『실학사상연구』 10-11, 역사실학회. 임영희(2022), 「고려 이의민 집정시기 명종의 정치적 위상」, 『역사학연구』 87, 호남사학회. 허경진(2000), 「유구역루(維鳩驛樓)와 간신거국도(諫臣去國圖)」, 『인문과학』 9, 목원대 인문과학연구소.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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