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의 재발견] 신(神)과 인간의 연결자, 무당(巫堂) 게시기간 : 2026-06-24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6-22 15:1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민속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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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은 과거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삶을 살펴 오늘날의 모습과 비교해 보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해 보는 학문이다. 선조들의 삶은 이야기, 노래, 의례, 놀이, 신앙 등에 전승되는 기억의 역사이다.”
1. 성직자(聖職者), 무당(巫堂) 인간은 일반적으로 초인간적, 초자연적 위력으로 화복(禍福)을 관장하는 신(神)을 직접 만날 수 없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신에게 전하려면 인간과 신을 연결 해주는 존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만날 수 있다. 바로 성직자(聖職者)를 통해서 말이다. 성직자는 종교 공동체에서 신성한 의례를 맡아 집전하고, 신과 공동체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미사(제사)를 봉헌하고, 고해성사나 혼인성사 같은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신부님이나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영적 지도자인 목사님 등이 해당한다. 무속(巫俗)의 굿 의례를 집전하고, 인간의 소망을 신에게 전하는 무당(巫堂) 또한 성직자이다. 무당은 지역에 따라 ‘법사(충청도)’, ‘단골(전라도)’, ‘심방(심방)’ 등으로 불리는데, 여자 무당은 ‘만신’이라 하기도 하고, 남자 무당은 ‘박수’나 ‘화랭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중국 최초의 문자학 서적으로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 58경~147경)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무(巫)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巫)는 신에게 비는 사람이다. 여자가 형체 없는 신령을 섬겨 춤으로써 신을 강림하게 하는 자를 말한다. 글자의 모양은 사람이 양쪽 소매를 휘저으며 춤추는 형상을 본떴으며, (천지를 잇는다는 점에서) ‘工’ 자와 그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옛적에 무함(巫咸)이라는 이가 처음으로 ‘巫’라는 글자를 만들었으며, ‘무’와 관련된 모든 글자는 ‘巫’를 그 의미의 바탕으로 삼는다. 발음은 ‘무’라고 읽는다.” (祝也 女能事無形 以舞降神者也 象人兩褎舞形 與工同意 古者巫咸初作巫 凡巫之屬皆以巫 武扶切)
- 《說文解字》 -
위의 내용을 토대로 살펴보면 무당의 중요한 소임은 ‘신을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양쪽 소매를 휘저으며 춤추는 형상’을 본떠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춤으로써 신과 접하여 인간의 소망을 신에게 고하고, 신의 의사를 인간에게 계시해 주는 영매자(靈媒者)의 역할 수행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다만, 무당이란 말의 어원을 문헌에서 구체적으로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무당이 고대부터 존재했던 것은 분명해 보이며,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전통인 무교를 담당해 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무교는 불교나 도교, 유교, 기독교 등의 외래 종교가 유입되기 전부터 있던 종교적 전통이다. 무속에서 중요시하는 제의용 도구인 청동 방울이나 청동 거울 등을 통해 청동기시대에 무속이 존재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오늘날 굿을 할 때 세우는 신간이나 솟대, 당산나무의 원형적인 모습을 단군신화의 신단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조선시대에는 무속이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초까지도 무당의 지위는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의 제2대 왕 남해차차웅은 ‘자충(慈充)’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방언으로 무당을 일컫는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그래서 존장자(尊長者)를 칭하여 ‘자충’이라고 한 것이다. (方言謂巫也 丗人以巫事鬼神 尚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爲慈充)”라고 그 뜻을 설명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무당들은 질병 치료, 점복과 예언, 각종 의례 집행 등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며, 나아가 국가 차원의 일도 수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불교가 유입되고 국가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무속의 기능이 위축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공적 조직에서 배제되었고, 무업(巫業)을 천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고려 명종 때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집 근처에 살던 노무녀(老巫女)가 축출령에 따라 개경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기뻐하며 <노무편(老巫篇)>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무속은 성행했는데, 국가(국왕) 주관으로 행해지는 공식 의례를 무당이 주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무속에 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무속을 음사(淫祀, 정식 제례 체계와 어긋나는 의례)로 규정하고, 도성 내에서 무당의 거주와 출입 및 무업 행위를 금했다. 국가적 차원의 의례 주재 전통은 사라졌고, 축제 형식의 고을굿도 중단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미신(迷信)으로 규정되어 탄압받았으며, 해방 이후에도 서구식 합리주의가 사회에 만연하면서 여전히 미신으로 취급되었다. 더군다나 서구에서 유입된 종교가 널리 퍼지면서 타파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현재 무속은 민속 종교의 지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우호적인 대접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민중들은 여전히 무당들을 찾아 중요한 삶의 결정을 상담하고 있으며, 굿을 통해 치유 받고 있다. 2. 신이 들린 무당 무당 중에서 신이 들려 무당이 되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강신무(降神巫)라 부른다. 이들은 강신 체험을 통해 무당이 되는데, 주로 서울이나 황해도의 만신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강신무는 신이 무당에게 내리는 빙신(憑身) 현상을 겪는다. 따라서 이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으로 일종의 신병(神病, 또는 무병 巫病)을 앓는다. 신병은 신에 의하여 무당이 되도록 선택되었다는 증표이며, 이를 통하여 무당으로서의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신성한 입무(入巫)의 조건이기도 하다. 신병의 현상은 다양한데, 시름시름 앓는 경우가 많고, 신체의 특정 부위가 아픈 경우도 있다. 때로는 헛것이 보이고, 헛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병원 진료를 받아도 그 원인을 찾지 못하고, 대개 신체상의 질환에서 정신상의 질환으로 이행하는 경우가 많다. 신병은 의학적 치료가 어렵고, 병원 치료는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신병을 앓는 이들은 무속적인 질환임을 알지 못하고 오랜 세월 동안 고초를 겪는 경우가 많다. “장성현(長城縣)의 한 여자가 말하기를, “금성대왕(錦城大王)께서 나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네가 금성신당(錦城神堂)의 무당이 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네 부모가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므로 내가 두려워하여 그를 따랐노라.”라고 하였다.” (有長城縣女言 錦城大王降我云 爾不爲錦城神堂巫 必殺爾父母 我懼而從之)
- 《高麗史≫ 권 106, 列傳 19, 諸臣, 沈昜 -
충렬왕 때 나주 금성산(錦城山) 신당의 무녀가 ‘무당이 되지 않으면 부모를 죽이겠다는 금성산 산신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당이 되었다.’라고 말한 내용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금성산 산신의 위협이란 신병 기간에 몸주신이 소명을 내리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자신이 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그 영향(해코지)이 미침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신병에 걸렸음을 알게 되면, ‘내림굿’이라는 의례를 통해 자신에게 들린 신을 받아들인 후에야 치료가 된다. 따라서 신병은 의학적인 질병이라기보다는 종교성의 상징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신령의 부름이 확인되면 신령을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절차인 ‘내림굿’을 한다. 내림굿은 무병(巫病)을 앓거나 몸에 신기(神氣)가 있는 사람에게 신을 내리게 하고 신을 받는 굿을 말하며 ‘신굿’이라고도 한다. 무당이 내림굿을 받는 사람에게 마음에 드는 무복을 골라 입게 한 다음 손에 부채와 방울을 들려서 춤을 추게 한다. 내림굿을 받는 사람에게 신이 내리면 몸을 떨게 되는데, 이때 내린 신명을 평생 ‘몸주신’으로 모신다. 신을 달래어 좌정시킨 다음에는 신복(神服)이나 무구(巫具)를 숨겨두고 이를 찾아내게 하기도 하고, 주신(主神)으로 모실 신들을 불러낸 다음 인간(人間)의 물음에 신의 답하는 ‘공수〔神託〕’를 내리게 하기도 한다.
내림굿을 받은 무당은 신을 중간에 두고 맺는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를 통해 무업을 전승한다. 신굿을 주재한 사람은 경험이 많고 나이도 지긋한 무당이 대부분인데, 남자이면 신아버지, 여자이면 신어머니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 내림굿을 하고 무업을 시작하는 무당은 신아들, 신딸이라고 한다. 내림굿을 받은 강신무는 신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굿을 한다. 이 과정에서 강신무의 의례, 춤, 사설, 공수 등을 배운다. 강신무가 하는 의례는 기본적으로 점, 고사, 굿 등이 있다. 강신무의 점을 신점, 대신점이라고 하는데, 이는 완전하게 ‘신의 뜻’에 따라 점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사는 큰 굿을 할 수 없을 때 하는 간단한 무속 의례로 인간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강신무의 굿은 무가를 불러 신을 불러들인 다음 스스로 신이 들려 신격화된다. 굿거리가 바뀔 때마다 화려한 무복을 갈아입고 신칼, 방울 등과 같은 무구들을 들고서 춤을 추어 신을 기쁘게 하고, 재담을 통해 신과 교통한다. 자신의 몸에 받은 신을 통해 인간이 알고자 하는 신의 뜻을 공수를 통해 전달한다. 그런데, 내림굿을 하지 않고도 신과 만나는 능력을 갖춘 사람도 있다. 일명 ‘손뼉무당’ 또는 ‘무불통신제자’하고 하는 이들이다. 어느날부터 갑자기 말문이 열려 간단한 점을 칠 수 있게 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도 내림굿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내림굿을 통해 일종의 잡귀(雜鬼)인 허주를 물리친 후 몸주로 모실 신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신명(神明, 신이 인간에게 임함)을 편안하게 하고, 제대로 점사(占辭, 점괘에 나타난 의미)를 볼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신령이 보여주는 점사를 올바로 해석해 내지 못하고, 무당으로서의 수명도 짧아진다. 3. 신들리지 않은 무당 무당 중에서는 신들임 없이 집안 내림의 무업(巫業)을 승계하여 무당이 되는 이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세습무(世襲巫)로 불리는 이들인데, 주로 전라도의 당골(단골), 경상도의 화랭이나 무당 등이 이에 해당한다. 세습무는 부모로부터 무당의 신분이나 직능을 물려받은 무당이다. 따라서 세습무는 신을 모시고 굿을 하지만, 무당이 되기 위하여 강신의 과정이나 신이 들리는 일은 없다. 또한 신을 모시는 신단을 설치하거나 굿을 하는 도중 공수를 내리는 일도 없다. 이들은 강신 체험을 대신해 세습무계 출신의 여자가 세습무계 출신의 남자와 결혼한 후 시어머니로부터 기능을 물려받는 ‘시어머니-며느리’ 또는 ‘아버지-아들’의 세습 관계 속에서 무업을 계승하게 된다. “맹인과 무당[巫師]들의 자제(子弟)를 쇄환(刷還)하여 전의사(典儀寺)에 악공(樂工)으로 채워 넣은 것은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 시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호적 없이 이름을 속여 쓴 무리들이 호적이 자기에게 불편하다고 원망하면서, ‘정도전이 한 바이다.’라고 하였고, 또 맹인과 무당들은 이 논의(論議)가 신에게서 나오게 되었다고 저를 저주하고 있습니다.” (刷盲人巫師之子, 充樂工典儀寺, 奉殿下之命而行之者也. 無籍冒名之徒, 怨戶籍之不便於己者曰, ‘道傳之所爲也.’ 肓人巫師, 以此議爲出於臣而詛之.)
- 《高麗史》권 119, 列傳 32, 鄭道傳 - 고려 공양왕 때 정도전이 전의시(典儀寺)에 맹인과 무격의 자식들을 악공(樂工)으로 충원한 것은 왕의 명령에 따른 것인데, 이들이 자신을 저주하고 있음을 말하는 부분이다. 전의시는 고려 후기의 관청으로 국가에서 시행하는 제례(祭禮)를 주관하고 왕의 묘호(廟號, 재임 시 업적을 토대로 종묘에서 부르는 호칭)와 시호(諡號, 죽은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여 붙이는 사후 호칭)의 제정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맹인과 무당의 자제를 악공으로 충원한 것은 그들이 부모를 따라 무업에 종사하면서 가무를 익혔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즉, 어려서부터 부모들이 행하는 무의(巫儀)를 보고 배워 이를 세습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 중에 누구라도 한 사람이 무당이면 자녀는 모두 무당의 신분이 된다. 무당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기와 신분이 동일한 ‘동관’끼리 결혼하여야 한다. 여자들은 결혼한 뒤 시집 식구들로부터 무의(巫儀)를 전수 받는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굿판에 데리고 다니면서 굿하는 기능을 가르쳐 완전한 무당을 만든다. 그런데 이들에게 굿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굿판에서 무의를 익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남자들은 어려서부터 굿판에서 무악(巫樂)과 무의를 배우기도 한다. 세습무는 제의적 행위나 춤, 노래 등을 통해 신을 즐겁게 하고 신에게 인간의 소원을 빌어 준다. 그런 까닭에 굿거리에 따라 무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방울이나 삼지창 등과 같은 무구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또한 곡예나 묘기 같은 특별한 시각적 볼거리가 제공되지 않으며, 신의 입장에서 내리는 공수도 없다. 세습무는 혈연적인 승계로 무업을 잇는 까닭에 무당 집안에서 무당을 배출하는 무계(巫系)를 형성한다. 또한 사제권의 세습과 사회적 지지를 기반으로 일정한 지역에서 무권(巫權)을 행사하는 당골판을 유지하게 된다. 세습무와 함께 신들림 없이 무당이 되는 이들이 또 있다. 독경무(讀經巫)가 그것이다 (물론 강신무가 독경무가 되는 경우도 있다). 독경무는 주로 경문을 외우거나 낭송하며 굿을 진행하는 무당을 뜻한다. 앉아서 북과 징을 치며 의례를 수행한다고 하여 ‘앉은 무당’이라고도 하고, ‘판수’ 또는 경사(經師) 등으로 불린다. 대체로 장님이 많고, 여자보다도 남자가 많다.
이들이 행하는 의례는 일반 굿과 달리 제물이 훨씬 적고 경문(經文) 구송(口誦) 외에는 가무(歌舞)가 거의 없다. 경문(經文)의 내용은 주로 귀신을 협박하고, 귀신을 처치하여 멸하는 것이다. 경문에는 불경이나 도경(道經)을 그대로 옮기거나, 다소 변형시킨 것도 있다. “우리나라의 맹인은 해서(황해도)의 봉산(鳳山)ㆍ황주(黃州) 등지에서 많이 살고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해서에는 땅이 꺼지는 재변이 있기 때문에 맹인이 많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이다. 맹인은 사민(四民)의 열(列)에 끼지 못하여 의식(衣食)을 해결할 방법이 없으므로, 그들은 으레 역복을 배우고 겸하여 경문(經文)이나 주문(呪文)을 외어 생활을 영위한다 (경은 도경(道經)이나 불경(佛經) 따위를 말하는데, 이것을 외어서 잡귀를 몰아내고 병을 다스린다). 사제(師弟) 간의 질서가 매우 엄중하다.” (我東盲人 多出於海西 鳳山 黃州之間 世傳海西有地陷之災 故人多眼眚 其說不誣 盲則不參於四民之列 而無以糊口掩體 故必學易卜 而兼治誦經呪 【經 如道經 佛經 以辟鬼治病 】 以爲生 師弟之分截嚴)
- 《五洲衍文長箋散稿》, <明通寺辨證說> -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명통사변증설(明通寺辨證說)>에 “맹인들은 먹고 살길이 없어 복술을 배우고 경문과 주문의 송독을 익혀 매복(賣卜)과 독경으로 생업을 삼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어 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4. 인간을 치유하는 이들 무당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을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공동체 구성원이 질병에 걸렸거나 마음의 병을 얻었을 때, 이를 주술의 힘으로 치유하는 것이 무당이 수행하는 역할 중 하나이다. 가을 8월에 교사(郊祀, 유교식 제천의례)에 쓸 돼지[郊豕]가 달아나자 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에게 이를 쫓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택(長屋澤) 가운데에 이르러 이를 찾아내어 칼로 그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왕이 그것을 듣고 화내며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지 낼 희생을 어찌 상하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고, 결국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넣어 죽였다. 9월에 왕이 병에 걸렸다.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사과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았다.” (十九年 秋八月 郊豕逸 王使託利斯卑追之 至長屋澤中得之 以刀斷其脚筋 王聞之怒曰 祭天之牲 豈可傷也 遂投二人坑中 殺之 九月 王疾病 巫曰 託利·斯卑爲崇)
-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琉璃王 - 고구려 유리왕 19년 9월에 왕이 병에 걸린다. 무당은 병의 원인이 죽은 사람의 원혼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왕은 죽은 이에게 사과하고, 병에서 벗어난다. 사과 행위는 아마도 무당이 담당했을 것이다. 무당이 죽은 자에게 사과하고, 죽은 자를 달래는 것은 당시 치병 의례의 한 형태였을 것이다. “아내가 밤새 괴로워하며 신음하여 여러 차례 약을 들였고 맥(脈)은 산란했다. 새벽부터 정신이 혼란스러워지고 말도 망령되고 잡스러워졌다. 결코 낫지 않을 것이 확실하니, 망극하도다! … 무녀(巫女) 추월(秋月)이 알현하러 와서 지금은 몸이 건강하다고 한다. 비(婢)를 시켜서 액(厄)에 대해 묻고 또 고사(告事)를 할지 여부를 물었더니, 내일 하면 병 때문에 괴로워도 흉하지는 않다고 한다 ….” (妻氏徹夜苦吟 數度進藥 脈度錯亂 自曉精神昏亂 言亦妄雜 可決不淑 罔極罔極 … 巫女秋月來現 今則身健云云 令婢問厄 且問告事爲否 則明日可爲病苦 而不凶云 …)
- 《默齋日記》 卷九, 壬戌 二月 四日 - 조선 인종 때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낸 이문건(李文楗, 1495~1567)이 지은 《묵재일기(默齋日記)》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1562년 명종 17년의 기록인데, 아내가 아파 약을 지어 먹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무녀에게 고사 지낼지를 묻는 장면이다. 이문건은 젊어 어머니 간병을 기회로 의학 공부를 많이 한 인물이다. 《묵재일기》에는 자신이 앓았던 질병과 약들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주변인들이 치료를 위해 이문건에게 질병에 관해 자문하기도 하고, 특정 약물을 요청하기도 한다. 일정 정도의 의학적 지식을 갖춘 이문건도 무당에게 고사 지내기를 의뢰한다. 약물 치료와 함께 무속 치료를 병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무속 치료는 민중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것으로 여겨진다. 무속에서는 질병의 원인을 신귀(神鬼)의 작용이라고 여긴다. 그러기에 무당은 신귀가 침입하는 요인을 제거하거나 회피함으로써 병을 치료한다. 무당은 치료 대상을 기준으로 개인 치병굿과 공동 치병굿을 한다. 개인 치병굿은 방술(方術), 비손, 독경(讀經) 등이 있다. 방술은 주술의 한 방법인데, ‘주장맥이’가 하나의 예이다. 주장맥이는 상가(喪家)에 다녀온 후 병을 얻어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사다리 위에 환자를 눕히고, 상여를 운상(運喪)하듯이 사다리를 들고 나간다. 사다리를 메고 나가면서 상여소리를 하는데, 이는 마치 환자가 죽어 상여가 나가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환자가 낫는다. 비손은 무당을 불러서 환자가 있는 방에 제상을 간단히 차리고 축원하는 작은 굿이다. 독경은 판수나 법사를 불러 잡귀와 액살(厄煞)을 쫓아내 질병을 고치는 것이다.
5. 무당의 손님, ‘단골손님’ 특정 가게나 거래점을 두고 고정적으로 이용하는 손님을 이르는 순우리말이 ‘단골손님’이다. 이 단골손님은 무당과 신자 사이의 관계 맺음에서 생겨난 말이라고 한다. 무당에게도 신자(信者)가 있다. 신자는 종교적 직분 없이 그냥 종교를 믿는 사람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무당은 일정 구역 또는 일정 사람들과 특정한 관계를 맺고 활동을 해왔다. 이 활동 속에서 신자가 생겨나고, 관계가 유지된다. 무당은 끊임없이 신자들의 말을 들어주고, 심리적 불안감을 달래는 일을 수행하기도 한다. 크든 작든 간에 집안의 복을 기원하고, 액을 막고자 ‘비손’을 해주고, 궁금한 사항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답해주면서 상담자 역할을 해준다. 이 관계 맺음을 ‘단골’이라 한다. 호남이나 충청 등지에서는 무당을 ‘당골[단골]’이라고 하고, 서울 등지에서는 신도를 ‘단골’이라고 한다. 제주도에서는 무당[심방]과 연결된 공동체를 ‘단골’이라고 한다. 지역에 따라 말의 쓰임새가 조금씩 다르지만, 무당과 공동체 또는 신도들 사이에 맺어진 특정한 관계를 ‘단골’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당골제는 전조선에 다퍼저잇는것으로 무당과신도사이에 맺은일종의미신적결합입니다. 특히 삼남지방으로는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경상남도로 그 내용을 보면이당골관게가잇는 무당을”당골무당“이라하고 이것을믿는집을”당골댁“”당골집“이라고 부릅니다, 한당골무당이 다수의 당골댁에 전속하야 기도나제사一체를 맡아하고 당골댁은 이무당을 부양하야한개의 미신단체를 이룬것입니다 …”
- <동아일보>, 1934.08.08. 기사 - 무당과 신자들의 관계 맺음이 이루어지는 관계, 혹은 공간이 ‘당골판[단골판]’이다. 무당과 신도는 어떤 의례를 위해 일시적으로 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평소에 다양한 교류를 통해 관계를 맺는다. 이에 따라 단골판 안에서는 절기에 맞춰 또는 수시로 무당에게 의례를 요구하기도 하고, 무당은 그 의뢰에 따른다. 이 당골판은 주민들도 인정하는 무당의 경제적 이권과도 관련 있다. 그러기에 당골은 자기가 맡고 있는 당골판의 주민들로부터 경제적 부양을 받았다. 이와 같은 경제적 기반은 강신무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신무라고 해서 개인적인 영적 카리스마만으로 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공동체성을 담보하고 있다. “전악(악사), 계대(여성 장구 연주자), 자비(여성 징잡이)는 단골(甘骨)이 있으면 일일이 이름을 기록한 후에 혹 단골을 매매할 적에는 매인처(賣人處)에 표를 붙이고 새로 산 사람의 성명을 기록한다.” (典樂啓對自備有甘骨 一タ錄名於後 惑有甘骨賣買之時 則所賣人處付標 以新買人姓名改書事)
- 『朝鮮巫俗の硏究』 중에서 - 서울 노량진에 있었던 무속인들의 단체인 풍류방(風流房) 문서 중 1853년 12월 15일 회의의 결정 사항을 적은 완의문(完議文)의 내용이다. 이 내용을 보면 1850년대 강신무 지역인 서울에서도 단골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단골들을 사고, 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강신무들에게도 단골판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호남에서는 세습무가 전통 무당으로 인정받아 왔다. 하지만 세습무만 유일하게 존재한 곳도 아니다. 호남지역에는 세습무 외에도 강신무 계열의 점쟁이도 있고, 독경쟁이도 있으며, 주장맥이를 하는 일반인도 있다. 지금 호남지역 단골판은 그 위세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 강신무인 점쟁이들은 집 앞에 신대를 세워놓고, 집 안에는 신단을 설치하고서 무업을 한다. 강신무가 세습무에게 굿을 배워 굿판을 열기도 하고, 마을 내에서 이루어지던 굿판은 굿당에서 행해지고 있다.
요즘 한국 문화가 조명을 받으면서 우리 전통문화에 관한 관심도 많아지고 있는 모양새다. 무당도 예외는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무당에 관한 내용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무당의 역할보다는 ‘샤머니즘적 행위’와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무당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더욱더 중요하게 살펴야 하는 것은 무당들이 담당하는 상담자로서의 역할이다. 무당들은 여전히 심적, 육체적 치유 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신도들과 ‘단골’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대소사를 함께 논하고, 해결책을 함께 고민하면서 상처를 보듬어주고, 다독여 가면서 치유하는 참된 상담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렇지 못한 이들도 분명히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무속은 여전히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하는 현재 진행형의 문화인 것이다. 도움받은 자료
《說文解字》
《三國史記》 《高麗史》 《默齋日記》 《五洲衍文長箋散稿》 『朝鮮の巫覡』 국사편찬위원회, 『무속, 신고 인간을 잇다』, 2011. 나경수, 「진도씻김굿의 연구」, 『호남학』 제17집, 전남대학교호남학연구원, 1988. 우현식, 「典籍에 나타난 巫의 고찰」, 『Culture and Convergence』 제32집, 한국문화융합학회, 2005. 이경엽, 「세습무 사례를 통해 살펴본 강신무․세습무의 구분 검토」, 『한국무속학』 제7집, 한국무속학회, 2003. 이복규, 「조선전기 사대부가의 점복과 독경 : 이문건의 『묵재일기』를 중심으로」, 『한국민속학』 제10집, 한국민속학회, 1999. 이용범, 「강신무․세습무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무속학』 제7집, 한국무속학회, 2003. 최길성, 『한국무속의 연구』, 아세아문화사, 1990. 《국립민속박물관》(https://www.nfm.go.kr/home/index.do)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https://kyudb.snu.ac.kr/main.do) 《동아일보》(https://www.donga.com/) 글쓴이 박종오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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