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석도(石棹)와 석장(石檣)으로 표기된 담양 석당간 게시기간 : 2026-05-2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5-18 14:4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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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객사리 석당간>은 고려시대의 유산이다. <나주 동점문밖 석당간>과 함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전국적으로 귀한 사례이다. <담양 석당간>은 1969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석당간은 불교유산인데 조선시대에는 ‘석도(石棹)’나 ‘석장(石檣)’으로 기록된 자료가 있다. 주민들은 읍세의 형국과 관련하여 ‘돛대’로 인식했던 것이고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불교유산으로 기능한 고려시대 기간 보다, 더 오랜 기간인 조선시대에 ‘석도’나 ‘석장’으로 인식하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문화유산의 명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논의도 있었다. 설립 당시 기능과 연관되고 당 시대가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시대인 점에서 불교유산으로서의 ‘석당간’, 그리고 불교가 비주류가 되버린 조선시대에 주민들이 인식하고 불렀던 ‘석도’와 ‘석장’. 문화유산 명칭 변경에 대한 건의도 했었지만, 원래 기능을 그대로 살려 ‘석당간’ 명칭이 유지되었다. 담양 석장(潭陽 石檣)
돌을 깍아 만든 기다란 장대 허공을 떠받치니 斲石成竿拄半旻 착석성간주반민 벼슬길 도리를 내려다 봄이 그 천년 세월이구나 俯臨官道幾千春 부림관도기천춘 예건 이제건 다니는 길손들의 일 많고 적음 아려니 古今行客知多少 고금행객지다소 누가 바로 공평과 청렴함에 첫째 가는 사람인지를 誰是忠淸第一人 수시충청제일인 길에서 만난 우뚝 솟은 돌을 깍아 세운 석장(石檣), 하늘을 반쯤이나 허공을 떠받치고 있다. 그 높은 곳에서 벼슬살이 하는 사람들 내려다 본지 천년세월. 그냥 보고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오간 것, 그들이 한 크고 작은 많은 일들 다 알고 있고, 그 안에는 분명 공평과 청렴함에 있어 일인자도 있었을 것. 아니다 하늘이 내려다 보고 있으니 첫째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많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 곳을 지나면서 다짐해 본다. 함연의 ‘관도(官道)’는 순찰길 나들이의 도로, 오늘날로 치자면 국도에 해당될 것인데, 이를 ‘벼슬길의 도리’로 풀어 보았다. 언제쯤일까? 또 어디이며 누가 남긴 글인가. ‘담양 석장(潭陽 石檣)’이란 부제가 달린 시이다. 바로 〈담양 객사리 석당간〉을 말한다. 시의 제목은 ‘담양으로 가면서(發向潭陽)’.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 1526~1586)의 문집 『백담선생속집(栢潭先生續集)』에 실린 칠언절구(七言絶句)이다. 구봉령은 16세기 중후반을 살았던 문신이다. 구봉령이 이곳을 지난 건 아마도 전라도관찰사 재임시절 순찰의 임무를 띠었던 때가 아닐까 싶다. 구봉령은 1583년(선조 16) 6월부터 1584년 4월까지 열달간 전라도관찰사를 지낸다. 문집에 실린 시의 전후로 보아 순창쪽에서 담양을 향해 오다가 만난 석장이다. 부임 초기에 첫 순찰을 했을 터이니 1583년 가을일 것 같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전의 문화유산 현장과 거기에 담긴 사람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비록 문학작품이기는 하지만, 현장을 지나면서 직접 보고 형상화 한 점, 전라도관찰사라는 관인의 공식 순찰 일정이었다는 점, 당시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 등 눈여겨 볼만하다. 구봉령의 ‘발향 담양(發向潭陽)’ 시는 2수인데, ‘담양 석장’ 앞의 시는 ‘담양 연덕원(潭陽 延德院)’이다. 연덕원은 담양도호부 동쪽 5리 거리에 있던 당시 공공기관이다. 담양 연덕원 潭陽 延德院
추월산 저건너 푸른 기운은 낮은 기슭 감싸고 秋月山前翠麓低 추월산전취록저 작은 나무 흔들리는 그림자 푸른 시내에 깃드네 小欄搖影碧溪西 소란요영벽계서 문득 뜻 밖에도 수풀사이의 새들 사랑스러우니 丁寧却愛林間鳥 정녕각애임간조 술병들어 손에게 권하는 듯 정답게 지저귀는구나 勸客提壺款款啼 권객제호관관제 순행 길임으로 연덕원을 지남을 알 수 있다. 각 고을을 도는 순행, 길 위의 풍광은 때로는 백성의 삶을 비추는 배경이 되고, 관아나 강산은 임금을 향한 충성과 목민의 마음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담담한 시어 속에서도 평온한 풍경과 선비 관료의 내면세계를 함께 보여 준다. 구봉령의 문집에는 담양과 창평 관련된 시가 몇 수 더 보인다. 담양 오리원(潭陽五里院), 제 담양 축요루(題潭陽祝堯樓), 담양 추월산(潭陽秋月山), 발향담양(發向潭陽), 창평 유둔현(昌平油芚峴), 창평 선화루(昌平宣化樓), 창평 선화원(昌平宣化院) 등이다. 오리원, 선화원, 유둔현, 추월산, 축요루, 선화루 등 지명과 시어를 따라 시상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축요루는 담양도호보 객관 동쪽에 있던 누각이다. 정유재란기에 피해를 입기 전의 경관을 알 수 있다. 담양 축요루에 짓다[題潭陽 祝堯樓]
대궐을 떠난 뒤 문득 가을이 지나니 身違鳳闕忽經秋 신위봉궐홀경추 화악산 봉우리 꿈속에도 시름이라네 華岳峯巒夢裏愁 화악봉만몽리수 일편단심 해 향한 해바라기 마음으로 向日葵心丹一寸 향일규심단일촌 아침마다 홀로 축요루에 오른다네 朝朝獨上祝堯樓 조조독상축요루 담양의 누정 문화와 고즈넉한 지역 풍광 속에 관찰사의 내면 정서가 드러난다. 축요루는 단순한 경승지가 아니라, 조정을 향한 해바라기 마음[葵心]으로 일편단심을 다스리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축요루에 홀로 오르는 것은 관료의 고독과 책임 의식을 깊게 드러낸다. 담양 누정 문화와 선비 관료의 내면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구봉령은 유둔현 고갯길 풍경 속에 순행 길의 정취를 섬세하게 담아낸다. 창평은 담양과 함께 독립된 고을로 있었다. 창평 유둔현(昌平 油芚峴)
산허리에 석양 한 줄기 붉게 걸렸는데 半嶺斜陽一抹紅 반령사양일말홍 가는 말 그림자 어지러운 구름 속에 사라지네 征鞍影沒亂雲中 정안영몰란운중 서릿바람에 좋은 일 이만한 게 있을까 霜風好事能如許 상풍호사능여허 단장한 가을 풍경 맑고도 진하네 粧點秋光淡復濃 장점추광담부농 ‘유둔현’은 지명으로 보면 유둔을 만드는 마을을 넘나드는 고개일 것 같다. 유둔(油芚)은 넓은 종이 또는 무명을 이어 붙여 기름을 먹인 것으로, 비를 막는 데 쓰인다.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천막의 재료이기도 하여 군수물자로서도 중요하였다. 그런데 생활에 필요한 물자이지만, 무언가 거리를 두었던 듯한 고개. 붉게 물든 석양이 산허리를 감싸고, 말 탄 나그네의 그림자가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창평 고갯길의 깊고 고요한 분위기. 서릿바람 속에 더욱 선명해지는 가을빛은 창평 자연의 맑고도 은은한 아름다움. 예로부터 누정과 산수가 어우러진 창평의 풍류 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길위에서 만나는 창평의 정취와 선비 관료의 감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앞의 저 시의 제목에 ‘석장(石檣)’이라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담양 객사리 석당간’이다. 국가지정 문화유산 보물[제505호]이다. 1969년에 보물 지정을 하면서 ‘담양 읍내리 석당간’이라 하였는데, 2002년에 ‘담양읍 석당간’, 2010년에 ‘담양 객사리 석당간’으로 변경하였다. 석당간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대(臺)를 말한다. 고려시대의 문화유산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명칭 변경 과정에서 자료를 검토하면서 저 ‘석장(石檣)’ 시를 본 것이다. 또 하나의 용어는 ‘석도(石棹)’이다. 1872년 「담양부지도」나 『담양읍지』, 『추성지』, 「중수비」(1839년) 등에 ‘석도(石棹)’라 표기되어 있다. 사공석(沙工石)도 있다. 담양 선비 남석관( 南碩寬, 1761~1837)의 문집 『이안유고(易安遺稿)』에 ‘영 석도(詠石棹)’라는 제목의 시가 보인다. 『담양부읍지』(1871년) 고적조에는 석당간-석도의 규모와 무게, 세우게 된 연유, 중수, 재료 등 제원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담양부)관아의 동쪽 5리에 석도(石棹)가 있다. 높이는 백여 자[尺]이며 크기는 한 아름 남짓인데, 쇠사슬로 그 위에 관(冠)을 잡아매어 놓았다. 또 50자 남짓의 석탑이 있다. 세속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처음 고을을 만들 때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추성(秋成)의 땅 형세가 마치 배가 가는 모습처럼 생겼기 때문에, 석탑을 만들어 두어서 배를 정박시킨 것이라고 한다. … 정조 갑인년(1784년)에 석도가 바람에 부러진 뒤로 46년이 지난 기해년인 지금 임금 5년(1839, 헌종 5)에 고쳐 세웠다.(府之東 五里有石棹 高百餘尺 大一圍餘 以鐵索 鎻之冠其上 又有石塔 高五十餘尺 俗傳 初設府時 所置也 秋成地勢 如行舟形 故置石塔 使鎭泊云 … 正廟甲寅 石棹爲風毁折 後四十六年己亥 當宁五年改建 … )
석도(石棹) : 돌 기둥이 여섯 모서리에 3층이며, 높이는 26자이다. 내부 상층의 높이는 5자, 중층의 높이는 7자, 하층의 높이는 14자이다. 둘레는 6자 5촌이다. 둥근 무쇠통[水鐵桶] 3층의 높이는 13자이다. 내부 상층의 높이는 4자이며, 무게는 5백 58근 8냥이다. 중층의 높이는 4자이며 무게는 6백 14근이다. 하층의 높이는 5자이며, 무게는 6백 69근 8냥이다. 둘레는 4자이다. 모두 합한 무게는 1천 8백 42근이며, 모두 합한 높이는 39자이다. 무쇠를 부어 만든 삿갓처럼 생긴 모자를 노[棹] 위에 쓰고 있는데, 둘레는 13자이며 무게는 3백 93근 8냥이다. 시우쇠[正鐵]로 만든 삼지창의 높이는 2자이며 무게는 11근인데, 노 위에 꽂혀 있다. 놋쇠로 만든 풍경(風磬)의 무게는 1근 1냥이며, 비용은 모두 합해서 8백 9냥 2전 1푼이다.(石棹 石柱六稜 三層 高二十六尺 內上層 高五尺 中層 高七尺 下層 高十四尺 圍 六尺五寸 水鐵桶圓三層 高十三尺 內上層 高四尺 重五百五十八斤八兩 中層 高四尺 重六百十四斤 下層 高五尺 重六百六十九斤八兩 圍四尺 合一千八百四十二斤 合高三十九尺 水鐵鑄如笠形冒冠於棹上 圍十三尺 重三百九十三斤八兩 正鐵三枝鎗 高二尺 重十一斤 揷于棹上 鍮鐵風磬 重一斤一兩 合所費錢 八百九兩二戔二分)
1839년 기해년 담양도호부사 홍기섭(1839.06~1839.04 재임)이 중수한다. 석당간 곁의 비석에도 기록이 있다. 당간에 새기기도 하였다. 들판 형세가 배나가는 듯하여
석도를 우뚝 굳건하게 세우니천만년에 이르도록 이어지고 나라와 더불어 길이 보존되리 (野形行舟 石棹屹然 於千萬年 與國偕存 己亥暮春 知府 洪耆燮) 1884년 11월 18일 점심 무렵 외국인이 석탑[보물]과 석당간 일대를 둘러본다. 그리고 고대에 거대한 사찰이 있었을 것이는 글을 남긴다. 조지 클레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이다. 조선에 파견된 미국 공사관의 무관으로, 대리공사를 역임했다. 한자 이름은 복구(福久)이다. 11시 40분에 상태가 좋은 6층탑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부근에, 멀리서 볼 때 커다란 장대라고 생각했던 것이 서 있었다. 하지만 발견한 것은 매우 특이한 기둥이었다. 불교 유물이었다. 높이는 40피트였고 작은 종이 매달린 이중으로 주조된 반지 모양의 쇠고리가 얹혀져 있었다. 그 위는 쇠스랑처럼 뾰족하게 갈라졌다. 전체 기둥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많은 부분이 서로 묶여 있었다. 커다란 철제 밴드로 마디를 두르고 조였다. 하지만, 위쪽 세 번째는 나무였는데 원통형으로 주조된 철로 꼭대기까지 덮었다. 돌로 된 부분은 8각형이었고 상당히 잘 깎았다. 석조 부분은 6개가 세워졌고 나머지는 철이었다. 밑단은 두 개의 커다란 돌기둥 사이로 엄청나게 큰 철제 쇠테가 조여져 돌기둥이 고정되었다. 줄무늬 따위가 새겨진 장식이 보였다. 두 번째 묘비석 같은 돌에는 이 기둥의 기원을 알 수 없다는 비문이 남겨졌는데 220년 전에 강풍에 무너진 석조 부분을 교체하기 위해 맨 윗부분 철조 부분이 세워졌다고 했다. 기둥은 오래되어 닳은, 작은 돌판 혹은 주춧돌 위에 세워졌다. 이 기둥은 탑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기둥과 탑 모두 들판의 수많은 작은 돌무더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길가의 몇 군데에서 마치 옷을 입고 건물 안에 있어야 할 것처럼 보이는 크지 않은 돌들을 봤다. 기둥과 탑 서쪽에, 다시 말해 북북동 방향의 담양쪽으로는 오래된 나무들이 두 줄로 뒤얽혀 쭉 심어져 있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종합해 보면 이곳은 고대의 거대한 사찰이 있던 절터라는 생각이 들었다.(조지 클레이튼 포크 저, 사무엘 홀리 편집, 조법종·조현미 번역, 『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알파미디어, 2021, 249~250쪽) 석장이나 석도는 돛대 또는 노(櫓)를 상징한다. 담양 읍내의 지세가 배형국이라 노로써 세웠다는 내용이 『담양지』 등에 나온다. 어쩌면 담양천이 휘감아 도는 담양도호부 읍치의 형국과 관련하여, 여름이면 반복되었을 수해를 경계하려는 바람도 있었을 것 같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유산 석당간으로 세워졌지만,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16세기 1583년 시에는 ‘석장’, 18세기나 19세기 읍지류나 문집, 고지도에는 ‘석도’로 나온다. 사찰유산으로 기능했던 시기보다 더 오랜 기간을 생활사유산으로 주민의 인식 속에 깃들어 있는 셈이다. 구봉령 관찰사가 석당간을 지나면 석장 제목으로 시를 지을 무렵의 담양도호부사는 김경헌(金景憲, 1562~1583 재임), 박세현(朴世賢, 1583 재임), 장응정(張應禎, 1583~1584 재임)이다. 창평 유둔현을 지날 때의 창평현령은 홍진(洪津, 1582년~1583.08 재임), 홍여순(洪汝諄, 1583,08 도임)이다. 이들이 담양 또는 창평에서 남긴 기록은 있을까. 혹여 저 ‘석장’ 시에 차운한 시도 찾을 수 있을까.
글쓴이 김희태 전 전라남도 문화유산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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