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정려(旌閭)는 산 사람이 세운다 게시기간 : 2026-05-1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6-05-12 10:2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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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임씨, 죽은 이를 위해 죽다 1808년 (음)2월에 전라도 고산현 북면에 있는 마을에서 여성 한 명이 불에 타 죽었다. 처음 불이 난 곳은 그녀의 옆집이었다. 때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어 불길이 그녀의 집까지 옮아붙었다. 그녀는 남편의 영연(靈筵)이 있는 초막에서 남편의 상을 치르던 중이었다. 남편이 죽었을 때 따라 죽으려고 100여 일 동안 누워 있으면서 물조차 마시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이 이리저리 달래어 겨우 마음을 돌렸다. 불이 옮아오자 가족과 종들까지 흩어져 도망갔다. 그녀는 초막에서 나와 사당으로 달려갔다. 불길은 벌써 사당에도 뻗쳐 있었다. 불꽃 사이로 사당에 들어가 시고조부와 시증조부의 신주를 품에 안고 나와 종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불길을 헤치며 시조부와 시아버지 신주를 들고 나왔다. 종들은 안도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남편의 혼상이 있는 초막으로 향했다. 초막도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종들이 말릴 사이도 없이 불속으로 뛰어들었다. 남편 혼상을 번쩍 든 후 나오려고 몸을 돌렸지만 이미 불은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에 옮아 붙어 순식간에 그녀를 삼켜버렸다. 그녀는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녀는 국치권의 아내 평택 임씨였다. 충청도 연산의 사대부인 임사갑(任思甲) 딸로 태어나 전라도 고산현으로 시집와 30여 년을 살다가 고산현에서 죽었다. 죽은 이들의 신주를 위해 죽었다. 효열부, 추천서 속에서 출현하다 1808년 (음) 3월. 고산현 사람 유봉채는 평택 임씨가 한 일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한다고 생각했다. 유관(柳瓘) 이주민(李周民) 등 4명과 함께 논의했다. 그들은 임씨가 효부이며 열부라고 생각했다. 14여 년 전인 갑인년(1794년)에 임씨는 혼자 힘으로 도적들의 칼날로부터 시아버지를 구해내지 않았던가. 또한 시아버지와 함께 불길 번진 사당으로 뛰어들어 신주들을 내오느라 머리도 다쳤다. 그런데 이번에도 신주와 남편의 혼이 깃든 혼상(魂箱)을 지키려고 불 속에 뛰어들었다가 죽지 않았는가. 평범한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건장한 장부조차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임씨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산 사람이 해야할 일이었다. 국씨 가문에 대한 효행, 남편에 대한 열행(烈行)은 온 세상에 알려지고 그에 대한 보답을 받아야 마땅했다. 임씨를 효부, 열부로 추천하여 정려를 받아내자고 결의하고 현감에게 올릴 상서를 작성했다.
저희들이 보고 들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보았기에 그 실상을 아룁니다. 북면에 사는 국치권의 처 임씨는 연산의 선비 임사갑의 딸입니다. 시집와서 시부모를 잘 섬겼고 예로써 자신을 엄격히 단속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여자 중의 선비라고 칭송했습니다. 갑인년 화적 10여 명이 쳐들어와 집에 불 지르고 임씨의 시아버지를 꽁꽁 묶고 때리면서 재물 있는 곳을 말하라고 겁박했습니다. ⋯(중략)⋯임씨는 불길을 무릅쓰고 도적들 앞에 나아가 재물을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말하고서는, 도적들을 꾸짖으며 “너희들도 사람인데 어찌 늙고 아픈 사람이 이렇게 묶어 놓고 겁박하느냐? 차라리 나도 시아버지와 함께 죽겠다.”고 했습니다. 도적들은 결박을 풀고 재물을 훔쳐 갔습니다. 그때 임씨는 시아버지와 함께 불이 붙은 사당으로 뛰어가 3대의 신주를 들고 나왔는데 급하게 움직이다가 넘어져 머리도 다쳤습니다.⋯(중략)⋯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1808년 3월에 유봉채 등이 그러다가 지난 달 이웃집에서 시작된 불이 센 바람을 타고 임씨 집으로 옮아 붙었을 때 불길을 무릅쓰고 사당에서 신주를 구해내 사람들에게 주었고, 아직 구해내지 못한 신주도 마저 구해냈습니다. 그런데 죽은 남편의 혼상은 풀로 엮은 제청(祭廳)에 있었는데 이미 불 기운이 더욱 세찼으니 어찌 임씨가 살아나올 수 있었겠습니까.⋯(중략)⋯겨우 불길을 잡아 끄고 여기저기 찾아보니 불에 탄 시신이 여막의 문 근처에 있었습니다. 다시 불길로 뛰어들면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임씨가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불에 가까이 가고 불꽃을 밟기를 마치 평지에 나아가는 듯했으니 남편 따라 죽고자 했던 그 마음이 여기서 더욱 잘 드러난 것입니다. 우선 시아버지를 도적의 겁박으로부터 구해낸 일, 불길 속에 뛰어 들어 신주를 2번이나 구해낸 일을 말하고, 남편의 혼상을 구하려다 그 혼상과 함께 죽은 일을 차례로 썼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삼강행실도』 『소학』 등에 나오는 노씨(盧氏), 영녀(令女) 등의 행적에 비해 뒤질 것이 없다고 했다. 노씨는 당나라 정의종(鄭義宗)의 아내인데 도적들이 시어머니를 칼로 쳐 죽이려고 할 때 시어머니를 감싸 안고 대신 칼을 맞아 거의 죽을 뻔했다. 영녀는 위나라 사람인 조문숙(曹文叔)의 부인인데 남편이 일찍 죽어 자식도 없었다. 친정에서 개가하라고 압박하자 자기 귀를 자르고 수절했다. 유봉채는 이런 사례를 들어 임씨가 효를 다하고 남편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고 했다. 임씨의 행적은 삼강록이나 소학 같은 책에 올라갈 만하니 상을 내리고 정려를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상서를 완성하자 유봉채는 써야할 내용 중 빠진 것은 없는지, 현감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지 살피고 재봤다. 죽음 장면, 극적으로 재구성하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는 법. 고산현감 한극유(韓克裕)도 놀라면서 임씨의 행적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서두르지는 않았다. 감영에서 연락오기만을 기다렸건만 한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유봉채는 현감에게 채근하는 상서를 올렸다. 5명만 연명하였기에 지역 여론으로서 충분하지 않아서 현감이 미적거린 것은 아닐까하여 이번에는 유관, 이주민, 구용(具溶), 구한채(具漢采), 심석윤(沈錫胤) 등 35명을 모아 연명했다. 지난 번 글을 올렸을 때 분명 감영에 보고할 것이라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 답답하다고 간략하게 썼다. 현감은 이번에도 꼭 감영에 알릴 것이라 했건만, 여전히 그냥 두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한 달 더 지난 5월에 유봉채는 아예 전라감영에 곧바로 글을 올렸다. 전라 감사 이조원(李肇源)은 탄복할 만한 일이지만 식년(式年)을 기다려야한다고 알렸다. 조선후기에 효자, 열녀 등을 뽑는 일은 3년에 한번씩 이루어졌다. 대개 간지 중 자(子), 묘(卯), 오(午), 유(酉) 글자가 들어가는 해에 전국의 효자, 열녀 등을 추천하여 선발했다. 1808년은 무진년이어서 앞으로 2년 후인 경오년에야 조정에 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식년마다 행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1810년 경오년. 식년이 되자 송계흠(宋啓欽)이 앞장서서 전라감사 이상황(李相璜)에게 글을 올렸다. 이번에는 글의 앞부분을 바꾸었다.
칼날을 무릅쓰고 도적을 꾸짖은 일은 『소학』에 있는 노씨의 효행이고, 불 속에 뛰어들어 신주를 안고 죽어 정려를 받은 일은 김씨의 열행입니다. 효 하나, 열행 하나로도 이미 숭상합니다. 효행과 열행을 한 일을 어찌 그냥 없어지도록 놔둘 수 있습니까. 고산현에 살았던 국치권의 아내 임씨는 칼날을 무릅쓰면서 도적을 꾸짖어 시아버지를 구했으니 노씨의 효행을 한 것이요, 불길에 뛰어들어 신주를 안고 죽었으니 지아비에 대해 그 열(烈)을 다한 것입니다. 고산현이 벽진 곳이고 집안도 보잘 것 없어 드러낼 길도 엾어 효부와 열행이 풀더미 속에 버려지게 되었으니 이는 사론이 무너진 것일 뿐 아니라 정치를 하는 데에 빠뜨린 것이 있음입니다.
1810년에 송계흠 등이 맨 처음으로 고산현감에게 올린 상서에서는 임씨의 행적을 차례로 서술하고 그것을 노씨, 두씨, 영녀의 행적에 견주었다. 그러나 송계흠은 아예 내용을 바꾸어 곧바로 노씨와 김씨의 일을 근거로 댔다. 1721년 신천에 사는 김정구(金廷九)의 아내 김씨는 불 속에서 신주를 갖고 나오다 불타 죽었고 이 일로 열녀에 뽑혀 정려를 받았다. 임씨의 열행을 드러내 정려를 받게 하기 위해서는 개가하지 않은 영녀의 일보다 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주를 구하고 정려까지 받은 김씨 사례가 훨씬 설득력이 강했다. 이어서 이런 임씨 행적을 버려두는 것은 세상 여론이 어그러지고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표징이라며 은근히 압박했다. 여기에 풍천 임씨 가문이 대대로 효자와 열녀가 많았다고 하면서 임씨의 효와 열이 근본이 있다는 사실도 넌지시 보여주었다. 특히 집에 불이 났을 때 임씨가 사당에 있는 신주를 하나씩 차례로 구해내느라 여러 번 불길 속에 뛰어들었고, 남편의 혼상(魂箱)을 빼내기 위해 또 다시 불 속으로 뛰어들었던 장면을 더 자세하게 극적으로 묘사했다. 임씨는 불 속으로 뛰어들어 신주 하나를 내오고, 또 신주 하나를 내왔습니다. 이렇게 차례로 일을 마친 다음 곧바로 남편의 혼상이 있는 제청(祭廳)으로 들어갔습니다. 제청의 불은 이미 거세져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고 임씨도 많은 재를 뒤집어 쓴 상태였습니다. 막 (남편의) 혼상을 갖고 나올 때 임씨의 머리카락에 붙었던 불이 옷까지 번졌습니다. 그런데 임씨는 그저 평지를 걷는 듯했습니다. 이것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본 것이고,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똑같이 말하여 조금도 서로 어긋남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전의 글에서는 임씨가 시아버지 구한 일, 신주를 구해낸 일을 간략히 썼던 반면, 이번에는 임씨가 불 속에서 어떻게 신주를 갖고 나왔는지 생생하게 묘사했다. 신주를 빼낼 생각에 여러 차례 뜨거운 불 속을 드나든 임씨의 모습을 장면화했다. 이런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믿기도 어렵다. 그래서 송계흠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봤고, 모든 사람의 말이 한 사람 입에서 나온 듯 한결같다고 했다. 또 이전보다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해 송계흠을 포함하여 68명이 연명했다. 지역의 주된 여론임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딸과 유림의 호소, 하늘까지 움직였다.
많은 이들이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정려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1816년에는 임씨의 딸까지 가세했다. 그녀는 한글로 쓴 원정(原情)을 4번이나 제출했다. 원정이란 억울한 사연이 있어 그것을 풀어달라고 관청에 호소하는 글이었다. 임씨의 딸은 8여 년 동안 어머니 임씨의 일에 대해 현감과 감사에게 알렸건만 여전히 포상 받지 못했다면서 원망스런 말을 풀어냈다. 그 사이 남동생도 어머니를 위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원한 품은 귀신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딸의 호소도 효과는 미미했다. 고산현감은 영문에 보고하겠다고 하고, 감영에서는 ‘해당 고을에서 감영으로 보고가 없기 때문에’ 포상이 어렵다고 했다. 딸의 애원도 통하지 않자 구용, 구한채, 유관 등은 다시 시도했고, 1822년에는 심석윤이 전라도로 내려온 암행어사에게 곧바로 글을 올렸다. 그러나 ‘이미 계문을 올리는 시기가 지났다.’라든가 ‘식년을 기다릴 것’이라고 하고, ‘대신 감영에 글을 직접 올리고 처분을 기다리라.’ 등의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려를 향하여 포기란 없는 법. 또 다른 방식이 있었다. 1824년 전주 유생 유만주(兪萬柱)는 전라도 유림들이 한데 뭉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여겼다. 고산현 유생 구한채, 심석윤은 물론이고 익산, 함열, 여산, 태인, 금산 등 15개 지역 유림까지 합세하여 전라감사에게 글을 올렸다. 유만주를 포함해 49명이 연명했다. 그 동안 관청에 올렸던 글들을 참조하고 내용과 서술 순서도 조금 바꾸었다. 첫줄부터 효행이나 열행 중 한 가지 행적만으로도 포상이나 정려를 받는데 임씨는 둘을 겸비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도적이 쳐들어왔을 때와 집에 불이 났을 때 사당의 조상 신주를 구해낸 일을 먼저 부각했다. ‘사당의 신주가 잿더미가 되지 않은 것은 임씨 덕택’이라는 말도 더 넣었다. 신주를 먼저 챙기려는 그 마음이 곧 효라고 했다. 또 남편의 혼상을 챙기다가 죽은 것은 남편을 따라 죽겠다던 하종지심(下從之心)을 보인 것이니 열행이라고 했다. 이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감사 박기수(朴綺壽)는 ‘더 자세하게 실제 상황을 살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사실을 자세히 알아보고 조정에 보고하겠다는 희망 섞인 언질이었다. 그러자 전주 유림들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이기섭(李基燮) 등 23명이 연명하여 고산 향교에 통문을 띄웠다. 임씨의 행적을 자세히 더 조사해서 보고서를 작성해 감영에 제출하라고 채근했다.
1816년 임씨의 딸 국씨가 전라감사에게 올린 글. 어머니가 불 속에서 신주를 구하던 일을 자세히 서술, 한글로 작성했다.
1824년 전주 유림들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처럼 고산현 사람, 전라도 유림들은 임씨를 위해 온 노력을 기울이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돕는가보다. 1832년 (음)4월 13일에 예조는 포상 명단에 임씨를 올렸다. 포상 등급은 ‘정려’였다. 순조는 보고한 대로 시행하라고 명했다. 1808년 (음)3월부터 시작하여 30여 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정려, 죽은 이는 말 없고 산 이가 세운다
정려란 충・효・열을 탁월하게 실천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그집 앞이나 또는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이다. 문을 붉게 칠해서 홍문(紅門)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충효열을 행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포상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초기에는 해마다 선발했지만 조선후기에는 식년 곧 3년에 한 번씩 시행했다. 포상 등급도 정했다. 천민의 경우 면천해주기, 물건을 상으로 주기, 각종 부역이나 세금 면제해주기, 벼슬을 주거나 추증하기 그리고 정문 내려주기 등이다. 정려가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정려를 받게 되면 정문을 세우는 데에 드는 비용을 국가에서 지원해주었다. 아울러 나라에서 부여하는 각종 부역을 면제 받고 세금까지 면제받기도 했다.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이 따라왔다. 무엇보다 집앞, 마을 앞에 세워진 정문은 집안의 명예를 높여주고 지역의 명문가로서 부상할 계기로 작용했다. 이득이나 부수적 효과나 가치를 생각하면 정려를 받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충효열등제등록(忠孝烈等第謄錄)』에 높은 가치, 보다 큰 이득을 얻기는 쉽지 않다. 지역민들의 여론을 만들어 지역 관청에 보고 역 한다.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의 지지나 유림의 지지가 있다면 유리하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면 더 좋다. 보고 받은 지역 수령은 감영에 알린다. 감영에서는 사실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고, 포상 요건이 충족되면 예조에 문서를 올린다. 예조에서 심사하고 각 등급을 결정하여 임금에게 보고한다. 임금은 신하들과 논의하여 최종 결정을 내린다. 글 내용은 수령, 감사, 예조 관리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할 만큼 강렬하거나 논리적인 글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실 채집도 열심히 하며 되도록 극적인 부분을 뽑아낸다. 조선초기 열녀 기준은 수절과 재가하지 않음이었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선별 기준이 높아져 남편을 따라 죽는 여성이 열녀로 뽑힐 가능성이 높았다. 남편이 죽자마자 아무 연고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여성들이 열녀가 되는 일이 많았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여성들이 열녀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 죽음도 남과 다른 점이 있어야 했다. 세태가 이러하니 평택 임씨가 정려를 받은 시대에는 죽는 장면 또한 극적이어야 했을 터이다. 송계흠은 불 속에서 신주를 안고 죽어 정려 받은 김씨 사례를 들고, 임씨가 처했던 불길 장면을 더 상세하게 썼던 것이다. 정려는 또 한두번 정도의 노력으로 받을 수 없었다. 대를 이어 노력하는 사례가 많았다. 전북의 김채상 집안은 효자 정려를 받아내기 위해 거의 60여 년간 여론을 모아 상서를 올렸다. 영남의 천성태 집안은 1752년(영조28)부터 1903년까지 150여 년 동안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정려를 받지 못했다. 어떤 마을을 지나다 보면 붉은 홍살문이 서 있거나, 한모퉁이에 붉은 색의 작은 문들이 있다. 잘 관리된 것도 있지만 풀숲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도 있다.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친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죽은 이의 고난과 희생, 산 이들의 노고가 쌓여 있다. 완주 비봉면에 있는 임씨의 정문을 지난다면 한번쯤 눈길을 머물고 임씨와 그녀에게 효열부라는 이름을 안겨 준 이들의 수고를 떠올려보자.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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