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성좌] 전남지역 노농운동과 문화운동의 선봉 나만성(羅萬成, 1896~1936) 게시기간 : 2026-04-30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4-28 15:2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항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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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지역 농민운동과 문화운동에 헌신한 일생’ 10여년 전, 필자는 전남 신안군(옛 무안군) 지도(智島)의 농민운동을 공부하면서 나만성이란 인물을 알게 되었다. 이 분야를 공부했지만 생소한 인물이었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지도란 섬이 일제강점기 암태도 못지않게 농민운동으로 유명했던 곳인지라 더욱 관심이 갔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선행연구는 없었고, 사전 항목에서조차 찾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살펴보니 1993년 건국포장에 추서된 독립유공자였다. 다음은 그의 공적조서 내용이다. 전남 무안 사람이다. 1918년 무안군 지도면에 청년회관을 건립하고 양명여학교를 설립하여 청년층에 대한 민족의식 고취와 여성교육에 힘썼다고 전해진다. 1922년 12월 서울에서 조선물산을 장려하여 자급자족정신을 기를 목적으로 자작회가 조직되자, 이듬해 2월 전남 무안자작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소비조합부를 설치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24년 봄 향리에서 소작인공조회를 조직하여 지주의 횡포에 대항하면서 소작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힘썼다. 그러던 중 1925년 2월 27일 소작인공조회의 소작쟁의를 탄압하려는 일경에 의해 다른 간부 6명과 함께 붙잡혀 같은 해 7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 10월에는 무목(務木:무안·목포)청년연맹 대의원으로 활동하다 목포경찰서에 검속되어 다시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가 결성되어 지방지회를 설립하여 가자, 같은 해 6월 전남 목포에서도 신간회 목포지회가 결성되었다. 신간회 목포지회는 같은 해 12월 제1회 정기대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개선하였는데, 이때 서병인·김명진 등 10여 명과 함께 간사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1932년 1월부터 1933년 6월까지 활동하였고, 이어 1934년 4월 창간된 종합잡지 『호남평론』의 편집책임자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생애를 간추린 것이지만 계몽운동가, 노농운동가, 청년운동가, 언론인으로서 그의 활동이 골고루 담겨 있다. 특히 ‘운동가’ 출신으로 전남지역의 대표적 잡지인 『호남평론』의 편집책임자였다는 점도 관심을 끌었다. 오늘은 전남지역 노농운동과 문화운동에 헌신하다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고(故) 나만성군(羅萬成君)을 곡(哭)함” 나만성(호는 霞峰)은 1896년 3월 19일 전남 무안군 지도면 감정리에서 출생했으며, 1914년 지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후술하듯이 1922년 9월 그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는데, 보통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유학하지는 못했을 것이나 그가 어느 상급학교에 진학했는지는 찾지 못햇다. 공훈록에는 그가 1918년 무안군 지도면에 청년회관을 건립하고 양명여학교 설립했다고 나오는데 그가 혼자 ‘건립’하고 ‘설립’한 것은 아닐테지만 그가 청년운동과 계몽운동에 나선 것은 사실이다. 1936년 6월 나만성이 별세하자 『호남평론』 1936년 8월호에는 그의 지인이 삼송자(三松子)란 필명으로 쓴 추도문인 「故 羅萬成君을 哭함」이 실렸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호남평론』 1936년 5월호: 국립중앙도서관 나군은 小學時代에는 一覽捷記의 총명이 있음을 신동이란 칭예를 받엇으며 멀니 현해탄을 건느여 동경에서 僅히 1년간의 유학이다가 때마츰 己未年을 당하여 바로 행장을 돌이여 故土에 밟게 하엿다. 그리하여 계몽사업으로 야학강습소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주력하엿으며 계급의식으로 청년운동과 노농운동을 일으키며 사상운동 종사하엿스며 언론계에 있어서는 조선일보 기자로서 필봉을 날니여 主義를 선양하엿음은 우리에 기억에 다시금 새롭거니와 壽盡하든 몇날 전까지는 본지(주: 호남평론) 편집의 중임을 한몸이 짊어지고 風風雨雨 2개 성상에 악전고투하든 그의 공적이야말로 잊을라야 이즐 수 없는 혁혁한 遺蹟이다.
여기에는 공훈록에는 없는 내용들이 나온다. 그가 1년간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다가 기미년, 즉 1919년 3·1운동 이후 귀향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청년운동·노농운동 및 사상운동에 종사하며 조선일보 기자와 호남평론 편집자로 활동하던 중 2년간 투병하다 별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만성이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다가 3·1운동 이후 귀향했다는 부분은 오류이다. 그는 1922년 4월 지도청년수양회의 지육부장 겸 외교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친구인 김순과 함께 “사회철학을 연구할 목적”으로 일본 동경으로 유학했다. 이후 그는 1923년 2월 창립된 자작회(自作會)의 회장에 선임되었으니 그의 유학 기간은 몇 달에 불과했다. 지도면을 중심으로 계몽운동과 노농운동·청년운동에 투신 귀향 후 나만성은 우선 계몽운동에 착수했다. 즉 1923년 3월 결성된 지도면 금주단연회의 이사로 선출되었으며, 1924년 12월 지도 유지들과 함께 지도유치원의 설립에 대해 협의했다. 앞의 추도문에 나오듯이 “야학강습소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주력”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몽운동보다 노농운동과 청년운동에 집중했다. 1924년 3월 지도소작인공조회의 이사에 선임되었고, 9월 임은노동조합(賃銀勞動組合)의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5년 1월 지도청년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같은 달 열린 무목청년연맹 창립기념 강연회에서 「빈자(貧弱)의 양의(良醫)」란 제목으로 연설했다.
『조선일보』 1923년 5월 12일자: 그런데 그 사이 지도에는 큰 사건이 있었다. 1923년 5월 지도공립보통학교와 지도청년회 학술강습소 학생 및 지도청년회 회원 등 4백여명이 5월 1일 이른바 ‘메이데이’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 사건의 주모자는 보통학교 학생 이광백·이용백·황하일 등이었는데, 나만성의 연루 여부는 알지 못한다. 1925년 5월에도 지도면 주재소 앞에 ‘대한독립만세’가 적힌 태극기가 내걸려 지도청년회 회장이자 나만성의 절친한 친구인 김상수가 검속되기도 했다. 이때도 나만성의 연루 여부는 알지 못하나, 김상수와 나만성이 주도하던 청년운동의 항일성을 엿볼 수 있다. 1923년 5월 만세시위로 수감되었던 황하일 등이 2년 형기를 마치고 1925년 4월 석방되자 나만성와 김상수 등의 발기로 청년회관에서 위로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후 나만성은 1925년 1월 목포에서 무목청년연맹이 창립될 때 지도면 대표로 참석하여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2월 지도면의 14개 마을 소작농을 중심으로 을축동맹(乙丑同盟) 결성을 주도했다. 그러자 경찰은 지도면에 출장하여 나만성과 김상수를 불러 을축동맹 결성을 위한 연합순회는 보안법 위반이라고 경고하며 5명 이상의 순회를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그는 지도소작회 위원회에서 지주들이 결성한 번영회 박멸 결의를 주도하다가 경찰에 검속되어 5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6년 1월 석방되었다. 이어 그는 1927년 4월 신간회 목포지회 제1회 정기대회에서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처럼 그는 김상수와 함께 1920년대 지도면의 노농운동·청년운동을 선도했다. 그리고 1923년의 만세시위사건과 1925년의 태극기게양사건에서 보듯이 이들이 주도한 운동은 항일성이 뚜렷했다. 『조선일보』 기자와 『호남평론』 편집을 통한 문화운동 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와 나만성의 활동 분야는 언론과 출판으로 바뀌었다. 즉 1932년 1월부터 1933년 6월까지 『조선일보』 목포주재 기자로 활동했으며, 1932년 조직된 목포기자단의 서무간사에 선임되었다. 이같은 기자 활동은 노농운동이나 청년운동의 연장선상이었다. 즉 일선에서 직접 활동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지면을 통해 보도함으로써 여론을 환기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기자로 재직하면서도 그는 1932년 4월 목포시민대운동 발기를 주도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은 항일적 문화운동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나만성은 1932년 7월부터 『조선일보』에 소설 「어부(漁夫)」를 연재했으며, 1934년 창간된 당시 전남 유일의 잡지 『호남평론』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하며 소설 「가로(街路)에 피는 꽃」, 희곡 「심청전」 등을 발표하여 문인으로서의 면모도 선보였다. 그리고 1936년 호남평론사가 주식회사로 전환할 때 상무취체역에 선임되었다. 이에 앞서 그는 『전남공론」(1932년 창간)과 그 후신인 『목포평론』 및 『전남평론』의 간행에도 참여했으며, 이 때문에 그는 “아사(我社: 『호남평론』)의 창립자로서 『목포평론』·『전남평론』 시대부터 자기 일신으로 분투 노력하여 온 그 은덕으로 금일의 아사(我社)는 기초가 반석 위에 서게 된 것이다(『호남평론』 1937년 7월호, 51쪽)”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2년간의 투병 끝에 1936년 6월 8일 목포부 남교동 자택에서 별세했으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나만성 연구의 단초가 되기를 바라며
이렇게 나만성의 생애에 대해 소략하게 살펴봤다. 1920~1930년대 지도면뿐 아니라 목포지역, 나아가 전남지역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 『신안군지』에도 그에 대한 정보는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으져 있다. 오히려 국문학계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가 나와 있다(김남석, 1930년대 나만성 <심청전>으로 살펴본 비극 <심청전>의 경계와 위상」, 『철학·사상·문화』 31, 2019). 그 역시 암울한 시기를 치열하게 헤쳐나갔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숱한 인물 중 하나인 것이다. 필자는 한때 나만성이 주도한 지도면의 농민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런데 자료를 정리하던 중 이 주제를 다룬 빼어난 논문이 먼저 나오는 바람에 포기했다(탁현진, 「지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과 특징」, 『도서문화』 56, 2020).
『호남평론』 1936년 1월호: 그런데 나만성의 생애를 다시금 정리해 볼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중요한 인물인데 연구가 없다고 남을 탓할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만큼 자료를 모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지만, 설령 논문으로 완성하지 못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부디 이 짧은 글이 필자를 비롯한 이 분야 연구자들이 나만성 연구에 관심을 갖는 단초가 되기를 바란다. 글쓴이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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