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근현대 시문학] 고향의 언어로 빚은, 작가의 향기 게시기간 : 2026-04-29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4-27 10:2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호남 근현대 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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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향을 노래하다 자연은 한없이 소박하여 아름다운 향기를 담담하게 퍼 올린다. 벼랑 끝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는 고고하여 외롭고, 작은 꽃대궁 밀어 올려 피어난 꽃은 순수하여 더 아름답다. 봄이면 돋아나는 새순은 무럭무럭 자랄 뿐 녹음을 뽐내지 않아 순결하다. 키 작은 민들레나 제비꽃도 있는 자리를 지킬 뿐 화려한 치장으로 현혹하지 않아서 정답다. 우리 사는 세상도 있는 그대로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품어줄 수 있다면, 그래서 더 향기로울 수 있다면 서로를 향한 따뜻한 시선이 어깨동무하리라.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더 많이 갖기 위해 다툰다. 그 틈바구니에서 고통과 분노와 절망을 견디려 애쓰다가 마음이 쪼그라들기 일쑤다. 그러다가 가끔 향기 나는 삶을 산 사람들을 만나면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된다. 그런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한 지역의 문화는 한 사람의 것일 수 없고 한 사람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하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해방과 한국전쟁의 혼란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의 도리에 우선하고 예술가로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흙벽이 무너진 집에서 살면서도 여학생들의 개성을 살릴 수 있을까, 마음을 풍요롭게 예술정신 채워줄 수 있을까, 밤을 지새운 가난하게 살았지만 고고했고 순결했던 사람이 조희관이다. 조희관은 시인이고 한글학자였고 교육자였으며 수필가요 출판인이었다. 이력만 보면 화려하게 풍요롭게 높은 자리에서 유유자적했을 테지만 그는 오직 목포 문화예술을 꽃 피게 한 밑거름이었다. 그는 가난했지만 고고했고, 병이 깊었어도 치료를 거부한, 있는 그대로 아름다움의 향기만 남겼다. 2. 영광에서 목포로 이주하다 조희관은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남천리 172번지에서 1905년 9월 16일에 태어났다. 대한민국 인사록은(1949년 현재) “전남 목포부 호남정 1의 10번지,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동아일보 지국, 소공예품 등 경영, 해방 후 광주사범학교 교유, 목포상업학교 교두를 거쳐 현재 목포상업학교 교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사록 이전의 그는 영광 소성회 연예부장, 영광운동구락부 총무, 영광청년동맹 서기로 종횡무진했다. 그는 글 쓰는 일이 좋아 글쓰기 매력에 빠졌고, 국어 문법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희관은 영광군 영광면(현 영광읍) 사무소에 ‘서무’로 배치되어 근무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청년을 지원했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지역문화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고 청년회와 청년동맹 활동에 적극적이었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겉으로는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는 척하면서 항일의 ‘숨은 방패막이’가 되었다. 영광공산당사건, 즉 일명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939년 2월 4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시인 조운과 영광중학원 교사 위계후와 함께 예심면소 판결을 받았다.1) 1942년 광주를 거쳐 목포로 이주하면서 영광 생활도 끝이 났다. 조그만 시내물 목모쳐 울고
금잔디 속잎나는 깊은 골짜기 진달래 발가스름 피었으렷다 송살땀 씻으며 넘던 그산길 아- 내고향 두메의 봄이 그리워 수건쓴 새색씨 괭이를 들고 푸른빛 자라나는 보리밭머리 종달새 지지배배 지저귀렸다 길신발 끌면서 예던 그들길 아- 내고향 두메의 봄이 그리워 조희관, 「내고향」, 『안성현작곡집』, 1948 그는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시를 썼다. 누구나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이듯이 조희관도 애틋하게 그리운 고향이었다. 그림 보듯이 그려지는 고향의 풍경은 손에 닿을 듯하다. 작은 시냇물은 물줄기 가로막은 틈을 통과하며 졸졸 소리 내고 금잔디는 새싹을 키우는 골짜기마다 진달래가 수줍게 피었을 고향의 언덕의 산길을 넘다 보면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닦았던 두메, 고향의 봄이다. 봄이 되면 수건을 쓴 새색시는 괭이를 들고 들로 가고 푸른 보리 밭머리에는 봄을 노래하는 종달새가 종알거리는 들길, 두메 고향의 봄이 그리운 것이다. 시인의 고향이자 우리들의 고향의 봄이다. 우리의 한글만 살려 쓴 아름다운 시다.
3. 한 송이 들꽃으로 가르치다 조희관은 영광을 떠나 광주사범을 거쳐 목포 공립상업학교 교장, 그리고 1947년 7월 20부터 1950년 11월 15일까지 항도여중 교장을 했다. 그는 ‘한송이 들꽃을 보라 남을 시새워하지도 아니하고 스스로 자랑하지도 아니하며 한껏 제 빛을 나타내라’는 교훈을 바탕으로 학생의 개성을 존중하고 주체적 감성을 키우는 교육에 역점을 뒀다. 그래서 박기동과 안성현, 옥파일을 초빙해 살아있는 예술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한마디로 해서 항도여중은 좀 별난 학교였다. 질이 좋은 학생들과 질이 좋은 교사들, 그리고 교장 선생님의 독특한 교육방침, 이런 것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굴러가다 보니, 때로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다는 사회적인 비난도 있었다. 그중의 한 가지가 예술제였다.
목포극장을 빌려서 연극·무용·독창·합창·시낭독, 이러한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렸다. 연극은 훗날 영화감독으로 진출한 엄주선 선생, 무용은 옥파일 선생, 음악은 안성현 선생, 그리고 시 낭독은 내가 지도를 했다. 무용을 지도한 옥파일 선생은 만주의 하얼빈에서 백계로인(白系露人)으로부터 러시아의 정통 발레를 배운 사람이었는데, 그의 인체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춤 솜씨는 우리를 황홀하게 했다. 인물 욕심이 대단했던 조교장 선생님은 어디서 수소문해서 이런 유능한 교사를 초빙해왔는지 모르겠다.2) 박기동은 ‘교장 선생님의 독특한 교육방침’이 ‘때로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다는 사회적인 비난’도 있었지만 ‘참 좋은 학교’였다고 술회한 후 ‘그런 학교, 그런 분위기의 학교가 그 학교에 가서 남아 있는 삶의 정열을 쏟고 싶다’했다. “목포여성교육의 황금시대”3)를 연 그였지만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어수선한 시대의 조류는 조희관에게도 다가왔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던 때 박기동이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쓴 시 「부용산」은 안성현이 곡을 붙여 불렀다. 이 노래를 산사람(빨치산)들이 부르면서 불행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렇게 항도여중 학생들과 행복에 젖어 지내던 어느 날 조희관은 박기동을 급히 병원에 입원시킨 후 피신시켰다. 시대의 미친바람은 정상을 비정상으로 만들고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어 갔다. 교사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스스로 조희관도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4. 우리말로 겨레를 지키다 앞서 항도여중의 교훈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우리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그가 쓴 『샘』4)에 그대로 담겨있다. 연희전문 최현배의 제자로 “한문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우리민족의 피와 땀과 웃음과 울음이 스며 베어있는 순수한 우리말을 파내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셨고 민중의 감정을 저버리고 조작해 놓은 억지 어휘에는 반대”5)했다. 『샘』은 “우리 말을 약 먹듯 배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대 하나 가지고 올라가면 오지랖과 골마리에 넘치도록 밤을 딸 수 있는 내 동산인 것”인데 가르칠 “아뭏거나 국어 교본 한 권 없던 세상”에 “지나 새나 학생을 데리고 국어에 살”면서 쓴 책이었다. 우리말은 우리말이어야 하고 우리글은 우리글이어야 한다는 지론은 우리 독특한 문화꽃이 우리말의 샘물로 자라서 문화의 꽃밭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글로 겨레가 자라게 한 사람 중의 한명이다. 다음의 시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뉘게나 꺾이는 풀꽃이기에
들길에 함부로 밟히고 “아녀자”도 곧 깨치는 너이기에 지지리 제 겨레에게도 천둥이 노릇간 해왔다 바위틈에 가람마냥 아직도 앙당히 퍼날길이 없거니 너 낳을 제 아닌 밤 꼬닥 꼬닥 새우시며 수정에 눈씻던 고우신 님 영롱 가을 풀속에 지금도 너아니 걱정하시랴 오백 세돐 맞이 아가야 너 귀여운 천둥이 이젠 그만 저만 복 많이 탓거라 조희관, 「한글 503돐에」, 동광신문, 1949.10.9. 5. 예술의 꽃대궁을 밀어 올리다 그가 항도출판사의 취체역 사장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극작가 차범석의 동생 차재석의 권유 때문이다. 조희관은 사장으로 차재석은 편집 책임자로 호흡을 맞추었다. 중앙에서도 출판하기 어려웠던 한국전쟁기에 지역에서 출판사를 운영했다. 많은 책과 문예지를 출판했다. 시인 최하림은 문화의 꽃대궁을 올린 중심에 조희관이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해방의 혼란상 속에서도 목포의 문학·미술·음악·연극은 타 도시에 비해서 비교적 활기를 유지, 목포상업학교 항도여중 문태중 등이 민족학교의 면모를 보이면서 활발하게 움직였고, 그곳 교사진들도 이후에 시인 소설가 화가들이 된 조희관 박기동 박정온 백두성 백영수 등이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항도여중의 교장으로 부임한 조희관 선생님은 핵심적인 존재였다. 최현배의 제자(연희전문)로서 한글학자이며 수필가였던 그분은 목포에 정주하면서 김우정 이영식 강보현 등을 길렀고, 6·25 직후에는 차재석 선생님이 출자한 항도출판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각종 잡지 시집 에세이들을 출간하였다.6)
조희관은 목포의‘문학·미술·음악·연극은 타도시에 비해서 비교적 활기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존재였다. 박정온, 백두성, 백영수 등은 영향력 있는 예술가가 되었고 항도여중 제자들과 김우정, 이영식, 강보현 등도 시인, 소설가, 화가로 성장했다. “그가 그때 목표에 왔다는 것은 이 지역 문화예술계의 행운이었다. (…)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하여도 목포는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어서 누구 한 사람 교육이나 문화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지 못했”는데 “이 고장의 문화운동의 선구자로서 목포를 예향으로 가다듬기 시작했”고 “그 각박하고 어렵던 시절, 척박했던 항도 목포 이 땅에 한 알의 밀알을 떨어뜨린 그의 문학정신은 훗날 풍성한 밀밭을 이루어 목포가 예술의 원조 도시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데 톡톡한 몫”7)을 했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화성도 “아아 조희관! 참 불행한 文學人··· (중략) 어쨌건 조교장이 이끄는 항도여중이 창립되면서부터 거리에도 새바람이 휙휙 지나는 듯이 항도의 분위기마저 서늘하게 들떠있는 듯하였다. 학생들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慈愛로운 교장이며 주옥같은 문장을 누에가 비단실 토해내듯이 뽑아내던 뛰어난” 조희관이었으며 “나의 장편소설 「고개를 넘으면」이나 「벼랑에 피는 꽃」도 집필 당시 그에게 소설의 구상과 내용을 대강 알려서 그에게 제목을 지어주기를 요청”해서 제목이 되었으며 “나는 봄만 되면 지금은 그도 故人이 된 李元壽씨의 「고향의 봄」이 아닌 조씨의 「고향의 봄」노래를 외어보곤 한다.”8) 박화성이 기억하는 조희관의 시 「고향의 봄」은 앞의 시 「내고향」이다. 그가 남긴 『철없는 사람』과 『多島海의 달』은 특별한 수필집이다. 그는 칠산 앞바다를 지나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금 그 고향은 모두 재밭이 되고 사람은 없고 八十된 내 아빠가 한 막집에서 병든 몸을 누이고 그애들도 다 죽고 없을 거야 하면서도 혹은 살아서 찾아 줄 아들의 모양을 꿈마다 그리고 있을 내 불쌍한 고향이 거기다.
내 늙은 아빠의 병든 품에 지금이라도 뛰어가 내 설음 이르고 그의 눈물 씻거 드리고 싶은 맘 불길 같건만 육지로도 바다로도 아직도 교통이 터지지 않았다는 저 칠산 바다 저편의 내 가없는 고향······.9) 고향도 모두 불에다 재가 되었을 것이지만 아직도 ‘八十된 아빠’가 살아계실 것 같은 고향이며, ‘살아서 찾아 줄 아들의 모양을 꿈마다 그리고 있을 불쌍한 고향’이다. 아빠의 품에 안겨 위안받고 위안하고 싶은 심정은 아버지에 대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헤아릴 수 없는 심정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그에게 고향은 ‘병든 아빠’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항도여중을 떠난 뒤에는 경제적 활동의 생활비조차 감당할 힘이 없을 정도로 가난을 살았다. 돈에 대해서 “내가 천대를 하는 데 제가 추파를 보내올 리는 없10)”다고 한 것처럼 그는 물질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많은 제자들과 문화예술인들의 자리를 지켜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6. 뒷모습 향기로 남다 한 사람이 이 땅에 와서 잘 살았다는 것은 뒷모습을 보면 안다. 살아 아무리 많은 부와 명예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뒷모습이 아름답지 않다면 잘 못 살다 간 사람이다. 부와 명예 없이 살았을지라도 아름다운 그림자를 남긴 사람은 잘 살다 간 사람이다. 조희관은 가난하였지만 청빈함 속에 고고한 학으로 살다 갔으니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런 탓에 이승의 삶을 허물하는 이가 없다. 항도 여중의 제자들은 손수건을 적신 채 그리움을 삭이고 있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그림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 긴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삶은 영원한 유산이 되어 흐르고 흘러 “가녀린 겨레의 言語에다 숨결을 돌려 주리라던 것이/당신의 純金같은 念願이었고, 知己를 來日에다 기대한 것이/당신의 기다림이었으니/당신이여, 당신이 풀이한 母國語의 血液은/머지않아 줄기차게 循環하리다.”11) 태어나 살았던 영광의 ‘은행나무집’이 변함없이 그를 기다리듯이 그의 향기도 언젠가 다도해의 달로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고향을 노래한 시는 각별하게 들린다. 물결도 삼만리 구름도 삼만리
갈매기 훨훨 날았거라 배띄우라 배띄워라 한바다로 둥실 배띄어라 어화자 (헤이) 어화자(헤야디야) 우리 고기잡이 가자 햇빛도 삼만리 바람도 삼만리 늘덩이 굼실 놀았거라 배저어라 배저어라 한바다로 둥실 배저어라 어화자 어화자 우리 고기잡이 가자 조희관, 「어부의 노래」, 『안성현작곡집』, 1948 1) 국가기록원, 「1939년 조희관 형사사건부」판결문, 1939. 2. 4.
2) 박기동, 『부용산』, 동아인제대 남도문화관광진흥센터, 2002. 188쪽. 3) 차재석, 「목포문학의 뿌리를 더듬으며」, 『三鶴島로 가는 길』, 세종출판사, 1991. 137쪽. 4) 조희관, 『샘』, 항도출판사, 1952. 5) 차재석, 「못박힌 敍情」, 『三鶴島로 가는 길』, 세종출판사, 1991. 115쪽. 6) 최하림, 「중용의 지혜를 지닌 스승」, 『三鶴島로 가는 길』, 세종출판사, 1991. 321쪽. 7) 김병고, 「수필가 소청 조희관」, 『목포예술인들의 빛과 그림자』, 뉴스투데이, 2008. 25쪽. 8) 박화성, 「나의 文友錄- 春園과 月灘」, 동아일보, 1981. 2. 18. 9) 조희관 「불행한 섬」, 『多島海의 달』, 항도출판사, 1951. 12쪽. 10) 조희관, 「돈」, 『철없는 사람』, 항도출판사, 1954. 39쪽. 11) 이수복, 「哭 小靑先生」, 전남일보, 1958. 11. 11. 참고문헌 조희관, 『多島海의 달』, 항도출판사, 1951.
조희관, 『샘』, 항도출판사, 1952. 조희관, 『철없는 사람』, 항도출판사, 1954. 김병고, 「수필가 소청 조희관」, 『목포예술인들의 빛과 그림자』, 뉴스투데이, 2008. 박기동, 「항구에 핀 꽃」, 『부용산』, 동아인제대 남도문화관광진흥센터, 2002. 188쪽. 박화성, 「나의 文友錄- 春園과 月灘」, 동아일보, 1981. 2. 18. 이수복, 「哭 小靑先生」, 전남일보, 1958. 11. 11. 차재석 추모문집, 『三鶴島가는길』, 세종출판사, 1991. 글쓴이 이동순 조선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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