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지도를 닮은 그림, 실경과 관념의 조화 묵호 전충효의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 게시기간 : 2026-04-02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6-03-31 15:4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한 폭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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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전남 화순군 이서면 보산리 석정마을에 살던 석정처사(石亭處士) 김한명(金漢鳴, 1651-1718)은 호남에서 이름난 화가 전충효(全忠孝, 17세기 활동)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전충효는 김한명이 살던 실제 공간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단순한 산수화도, 그렇다고 지도를 그린 것도 아닌 회화적 질서 속에서 재구성한 그의 유거지를 한 폭에 담아냈다.1) 유거지에 담긴 문인의 이상 사대부가의 사적인 소유지를 다룬 그림을 별서도(別墅圖)라고 한다.2) 처사 또는 유거도(幽居圖)라는 화제를 사용하여 산수에 은거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집안의 소유지를 기록하는 한편 주변의 명승과 명소를 담아낸 그림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림은 기록화적인 면모와 함께 감상적, 와유적 측면을 함께 보여준다.3)
그림 2 작가미상, <사계정사도> 부분, 1609년, 견본담채, 88.4×55.5cm, 고려대학교박물관
그림 3 이신흠, <사천장팔경도>, 1614년, 지본담채, 34×56cm, 삼성리움미술관
그림 4 이징, <화개현구장도> 부분, 1643년, 견본담채, 89×56cm, 국립중앙박물관 16세기 이후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며 정치·사회가 불안정해지자, 가문의 소유지나 별서를 시각화하여 후대에 전하려는 수요가 증가하였다.4)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별서도는 전북 남원에 있는 사계(沙溪) 방응현(房應賢, 1523-1589)의 거처를 그린 <사계정사도(沙溪精舍圖)>이다(그림 2). 이 그림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정사를 복원한 뒤, 손자 방원진(房元震)이 1609년에 기념으로 제작한 것이다.5) 계회도 형식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화면 상단에 전서체로 ‘사계정사도’라는 화제가 쓰여있고 멀리 우뚝하게 솟은 지리산을 배경으로 사계정사와 그 주변을 감싸고 흐르는 하천을 그렸다. 하단에는 신흠(申欽, 1566-1628)이 쓴 제사계정사도(題沙溪精舍圖)와 오언절구가 행서로 쓰여 있다. 사계정사는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지명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정사 주변의 경치를 재현하면서도 소작지를 함께 표현하여 이 가문이 상당히 넓은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정사 내부에는 의관을 갖춘 한 선비와 시동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처사로서의 이상적인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방응현은 조선 중기 학자로 일찍이 조식(曺植, 1501-1572), 이항(李恒, 1499-1576)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닦았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과거에는 나가지 않았고 남원 사계(沙溪)에 정사를 짓고 은둔하였다고 하였다. 17세기에 제작된 별서도 중 이신흠(李信欽, 1570-1631)이 그린 <사천장팔경도>(1614년)는 조선 중기 문신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이 선조의 묘가 있는 사천에 퇴거하여 지은 별서 사천장과 그 주변의 경치를 담아낸 작품이다(그림 3).6) 사천의 팔경을 부감법으로 원형구도의 화폭 안에 담았는데, 용문산, 백운봉 등 지명을 붉은 글씨로 표기하여 회화식 지도 형식을 취하면서도 동시에 이상적 별서 공간을 구성하였다. 이 그림은 신축한 사천장을 기념하고 이호민가의 소유지와 그 주변을 회화적으로 기록해두고자 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불어 소유지 주변에 팔경을 부여하고 별서의 이름을 도연명의 시에 나오는 ‘사천’과 연관시켜 소유지를 명소화하고 감상 대상화하려는 의도가 결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인조대 화원화가 이징(李澄, 1581-1674 이후)은 1643년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옛 별장을 그린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를 계회도 형식에 따라 화면에 담아냈다(그림 4). 상단에는 전서체로 제목을 쓰고, 중단에 지리산 화개현 정여창의 구거도(舊居圖)를 그렸으며, 하단에는 정여창을 비롯해 유호인, 신익성 등의 발문 등이 적혀 있다.7) 이징은 이 그림을 실경이 아닌 관념산수화로 묘사하였는데, 지리산에 있는 별장에 직접 가보지 않고 전하던 기록들을 토대로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8)실경산수화는 아니지만 조선 중기 산수화의 특징이 잘 나타난 별서유거도로, 당시 문인들이 바랐던 이상적인 은거지를 반영했다. <석정처사유거도>는 이러한 별서유거도 전통에 따라 실경을 담으면서도 이상적인 은거 공간을 반영하여 제작된 유거도이다. 풍수와 실경이 만나는 산수화 <석정처사유거도>의 주인은 김한명이다.9) 그의 본관은 광산으로 자는 대재(大哉)이고 호는 석정(石亭)이다. 전라남도 화순 보암산 아래 석정 마을에서 태어나 석정정사(石亭精舍)를 세우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많은 글과 시를 남겼으며, 특히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한명의 부친 김의(金誼, 1614-1704)는 김장생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의 제자였다. 병자호란 이후 동복현에 은거하며 91세까지 살았던 김의를 김한명은 극진히 봉양했다고 한다.10) 김한명이 세웠던 송석정, 즉 석정정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재건되었다가 소실되었는데, 1997년에 발간된 『화순누정집』에 송석정은 「현존하지 않는 누정」편에 소개되었고, 2006년에 새롭게 복원되었다.11) ‘석정만흥(石亭漫興)’이라고 표제된 김한명의 글을 엮어 2006년에 영인출판한 『석정처사유집』에는 행장, 가전, 시문과, 특히 선친이 보암산으로 이주한 일, 부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처사로서의 삶이나 석정 주변의 경관 등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12). 김한명은 자신의 유거지에 대한 글과 시를 많이 남겼다. 그의 글 가운데 「石亭詞」에는 김한명이 자신의 유거지와 주변의 경관을 둘러보며 이를 화폭에 담으려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근 대나무 울타리와 破屋된 가운데서 四面의 江山을 둘러보니
勿染과 赤壁은 東北쪽이요 瑞石과 萬頃은 西南쪽이라. 멀리서 구경해도 저러하니 가까운 烟景은 오죽하리오. 硯筆墨으로 그리려 하니 三湘의 五老 곁에 없고 靑天紙에다 쓰려하니 女媧가 돌을 달궈 하늘을 보수했구나. 춘추하동 한없는 경치를 대강이나마 말하리라. (후략) 그래서인지 그는 직접 석정정사와 그 주변을 그림으로 남겼다. <석정물형도(石亭物形圖)>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김한명이 직접 그린 것으로 생각되며, 여기에 같은 제목의 시를 부쳤다(그림 5). 집이 청산에 있으니 謝公과 가깝고
문에는 푸른 버드나무가 드리우니 陶翁과 같구나. 가련하구나. 빼어난 대는 먼저 달을 맞이하고 어찌 다행인가 담이 낮으니 바람을 가리지 못하는구나. (중략) 처마 끝 어린 잣나무 天意를 없이 여기고 계단 아래의 흐르는 시내는 바다 한가운데 이르는구나. 암석은 어느 해 神禹의 자취이며 房櫳은 이날이 옛 桃源이네. 그 가운데 홀로 기미 잊은 자가 있으니 청려의 지팡이 짚고 대나무 문에 기대었네.14)
그림 5 김한명, <석정물형도>, 『석정만흥』 중
그림 1-1 전충효, <石亭處士幽居圖> 부분 <석정물형도>는 매우 서툰 솜씨로 그린 그림이지만 주변의 주요 경물을 충실히 담아냈다. <석정처사유거도>와 화면 구성과 경물의 종류, 위치 등에서 유사한 면이 상당히 많다. 때문에 전충효가 <석정처사유거도>를 제작할 때 중요한 참고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석정물형도>는 화면 중앙에 유거지와 석정정사로 보이는 건물을 그렸으며 상단에는 산과 나무 등을 표현하였고 화면 아래쪽으로 사립문 옆에 지팡이를 짚은 인물을 그렸다. 그 아래 검게 칠해진 부분이 보이는데, 이는 강으로 보인다. 유거지 주변을 감싸고 흐르는 큰 물줄기를 재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눌하고 서툰 솜씨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주요한 요소들을 담아내고 있다. 결국 김한명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었으나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전문화사인 전충효를 통해 제작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비단에 그려진 <석정처사유거도>는 화면 상단에 단정한 전서체로 ‘석정처사유거도’라는 제목을 쓰고 붉은 줄을 그어 화면을 구분했다(그림 1).15) 화면 정 가운데 원형의 구도에 석정처사의 유거지와 석정정사, 주변의 경관을 한 폭에 담아냈다. 전체 화면은 멀리서 내려다본 듯한 부감시(俯瞰視)를 사용하여 공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화면 중앙에 유거지를 배치하고 그 주변으로 주요 산세와 물줄기를 표현하였다. 화면 가운데 건물을 비롯한 주요 경물은 작은 산과 시내에 둘러싸여 외부 공간과 분리되어 있다(그림 1-1). 화면 아래쪽으로 강이 흐르고, 화면 위쪽으로는 멀리 뾰족한 산들과 성곽에 둘러싸인 마을이 나타난다. 한편 주변 공간은 강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으나 넘실거리는 물 위로 배들이 정박되어 있는 배와 오가는 돛단배가 묘사되어 있다. 꽤 넓은 지역을 130cm가 넘는 대폭의 화면에 담아냈다. <석정물형도>와 <석정처사유거도>에는 보암산 아래 큰 가옥인 유거와 사람이 앉아 있는 석정정사, 문이 공통으로 보인다(그림 1-2). 유거도에서는 광주읍성과 무등산, 그 뒤로 담양의 불대산, 삼인산, 금성산이 이어져 더 확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산들은 광산 김씨의 근거지인 담양 평장동의 주산들이다. 화면 아래로는 적벽강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강이 흐르고 다리를 건너는 인물이나 나귀를 타고 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아래로 마을이 보인다(그림 1-4).
그림 1-2 전충효, <석정처사유거도> 중앙 부분
그림 1-3 전충효, <석정처사유거도> 상단 부분
그림 1-4 전충효, <석정처사유거도> 하단 부분 전충효는 김한명의 집을 화면 중앙의 우뚝 솟은 보암산을 배산임수의 배산으로, 적벽강을 임수로 삼아 유거지를 풍수지리의 명당으로 구현하였다. 주산과 안산, 물길의 형세를 원형 구도로 겹겹이 표현한 것은 양택풍수(陽宅風水)의 회화식 지도 기법이다.16) 지명 표기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회화식 지도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화면 상단 오른쪽 무등산 옆의 광산김씨가 세거하던 광주지역의 읍성과 그 위쪽에 인공 건조물이 있는 담양으로 이어지는 산들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그림 1-3). 유거지뿐만 아니라 두 개의 읍성을 부감한 시각으로 그 너머까지 보여주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명당도 형식의 이 그림에 지표와 같은 작품 속의 주요 경물들을 그려 넣어 지형도적 성격을 더하였다. 한편 ‘처사’의 ‘유거도’라는 화제를 사용하여 산수에 은거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는 이미지를 주고 있는데, 화면 중앙 집안 건물에서 강학(講學)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려 주인공이 향촌의 지도적 역할을 한 지식인이었음을 알려 준다. 또한 강과 산으로 둘러싸여진 은거지임에도 다리와 배, 이동하는 인물들이 함께 등장하여 은거와 교류가 병존하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결국 이 그림은 실제 공간과 더불어 문인의 이상과 세계관을 함께 담아낸 복합적 산수화라 할 수 있다.17) “호남에 묵호자라는 화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림 6 전충효, <괴석초충도>, 17세기, 黑絹金銀泥, 좌(25.1×17.9cm,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우(26.0×18.5cm, 간송미술관소장). 전충효는 17세기 호남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이다. 『근역서화징』에 “호는 묵호(墨豪)이고 그림을 잘 그렸다”라거나, 『한국회화대관』에 영모·절지에 능한 화가로 소개되었다.18) 출신과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제한적이지만 그가 호남에서 활동하며 이곳에 부임한 지방관들이나 지역유지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리던 이름난 화가였음이 확인되었다.19) 유계(兪棨, 1607-1664)의 『시남집(市南集)』에 자신이 전라도 나주의 무안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1646-1648) 화사 전충효에게 이일상(李一相, 1612-1666)이 금성, 즉 무안으로 만나러 오는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다.20) 김하천(金廈梴, 1621-1677)의 『삼매당집(三梅堂集)』에도 ‘호남에 墨豪子라는 화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는데 長沙(지금의 전라북도 고창)에 와서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고 하였다.21) 현재 전하는 전충효의 작품들은 많지 않지만 <석정처사유거도> 외에 <소상팔경도>와 <초충도>, <괴석초충도>, <매조도(梅鳥圖)> 등을 비롯해 네 폭의 《영모도 병풍》이 소개되었다.22) 전충효는 직업화가로서 산수・화조・영모・초충 등 다양한 화목을 다루었으며, 그의 화풍은 대체로 조선 중기에 유행했던 소재와 양식을 따르고 있다.23) 전충효의 산수화풍은 조선 전기의 안견파 화풍과 중국에서 유입된 절파화풍이 결합된 절충화풍을 구사했는데, <석정처사유거도>에서도 이러한 화풍이 확인된다. 특히 산의 윤곽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꽃같이 모아 찍은 태점은 전충효의 특징적인 묵법으로, 나무나 바위 등은 짧은 선으로 질감을 나타내면서 윤곽선 주변에 호초점(胡椒點)을 찍어 표현하였다. 검은 비단 위에 금가루와 채색을 써서, 괴석과 초충을 세세하면서 깔끔하게 그려낸 <괴석초충도>는 같은 첩에서 분리된 듯, 두 폭이 대칭구도를 이룬다(그림 6). 왼쪽의 초충도는 화면 좌측에 치우친 중앙에 괴석을 배치하고 그 주변에 풀과 벌레, 나비가 날아다니며 오른쪽 하단에는 도마뱀을 한 마리를 곁들였다. 오른쪽 작품은 화면 우측에 괴석에 들국화와 잠자리, 긴 풀잎에 여치와, 땅 위를 기어가는 방아깨비를 그렸다. 자칫 단조로울 법한 검은 바탕에 패랭이꽃과 나비, 들국화에 짙은 푸른색을 적절히 사용하여 그림 전체에 화사하면서도 산뜻한 느낌을 준다.
《영모도 병풍》은 백로와 물소, 그리고 드물게 그려진 원숭이 그림 두 폭으로 구성되어 있다(그림 7).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영모도 화풍을 보여주고 있지만, 낮잠을 자는 물소의 자연스러운 포즈나 게를 낚아챈 백로의 표현 등은 전충효만의 표현력을 보여준다. 현존 작품은 많지 않으나 <석정처사유거도>와 같은 작품은 단순한 개인 작품을 넘어, 당시 호남 화단의 수준과 지평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는 16~17세기 호남 회화가 결코 공백의 시기가 아니라, 지역적 특성과 예술적 성취가 축적된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전충효의 존재와 작품은 호남 회화의 깊이와 다양성을 재조명하게 하는 계기가 되며, 향후 호남 미술사의 재구성과 확장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 이 작품은 1982년 동산방화랑의 《續・朝鮮時代逸名繪畵: 無落款繪畵特別展(Ⅱ)》에서 처음 전시되었고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의 《우리 땅 우리의 진경》 특별전에서 전충효의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우리 강산을 그리다》 특별전에서 화순의 실경을 그린 작품으로 17세기 중요한 실경산수도로서 인정되었다. 박은순, 「조선 중기 성리학과 풍수적 실경산수화ᐨ<석정처사유거도>를 중심으로」, 『시각문화의 전통과 해석』(예경, 2007), 389-415쪽; 박해훈, 「호남의 전통회화 전시와 과제」, 『호남서화, 한국학의 가치를 모색하다』 발표자료집(한국학호남진흥원, 2002), 35쪽.
2) 조규희, 「조선시대 별서도 연구」(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3) 조규희, 위의 논문, 24쪽. 4) 별서도는 15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중기 문헌기록과 작품을 통해 활발하게 제작되었음이 확인된다. 조규희, 위의 논문 참조. 5) <사계정사도>에 대해서는 박은순, 「沙溪精舍와 <沙溪精舍圖>-朝鮮中期 實景山水畵의 一例」, 『考古美術史論』4(1994), 35-58쪽 참조. 6) 이 그림은 『사천시첩』에 수록되었는데 이 안에는 당대 여러 문인들의 글과 계회도, 화조영모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규희, 위의 논문, 140-150쪽; 이은하, 「『사천시첩』의 체제와 회화사적 의미」, 『미술사학연구』281(한국미술사학회, 2014) 참조. 7)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https://emuseum.go.kr/참조. 8) 이징의 다른 별서도로, 1623년에 그린 <임장도(林庄圖)>는 1623년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의 요청에 의해 제작되었다. 유희경은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양주에 도봉서원을 건립하고 서원 서편 영국동에 별서를 지어 말년의 유거지로 삼았다. 이 그림은 현재 기록으로만 전해지며, 유희경의 문집 『촌은집(村隱集)』에 당시 문인들의 제시와 글들을 함께 꾸민 시화도 형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규희, 「조선시대 산거도」, 『미술사학연구』217-218(한국미술사학회, 1998), 37-38쪽. 9) <석정처사유거도>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석정 윤강중(1545-1627)으로 추정되었으나 연구를 통해 화순의 김한명으로 밝혀졌다. 조규희, 앞의 논문(2006); 박은순, 「조선 중기 성리학과 풍수적 실경산수화-<석정처사유거도>를 중심으로」(『시각문화의 전통과 해석』, 예경, 2007), 389-417쪽 참조. 10) 김한명의 효행은 『光山誌』와 『福川邑誌』 등에 수록되었으며, 전라도 전체에 이름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김한명의 가계, 행적, 교유 등에 대한 내용은 박은순, 위의 논문, 397-400쪽 참조. 11) 『화순누정집』(화순문화원, 1997), 627쪽. 12) 김한명, 『석정처사유집』, 서남기획, 2006. 이 유집은 2004년 문헌자료들이 발굴되어 정리되었으며, 2006년 6월 석정처사의 유거지에 松石亭을 새롭게 복원하면서 유집도 영인출판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박은순, 위의 논문, 395쪽. 13) 김한명, 「石亭詞」, 앞의 책, 186-188쪽. 14) 김한명, 「석정물형도」, 『석정처사유집』(서남기획, 2006), 150-151쪽. 시 원문은 다음과 같다. “家在靑山近謝公 門垂碧柳似陶翁 可憐竹秀先迎月 何幸墻低不掩風 岸上楓添霜後色 窓前梅吐雪中花 園松長帶千秋節 籬菊初含九月華 倦影雲淨淸曉洞 閒聲鳥弄夕陽林 簷端稚栢凌天意 階下流泉到海心 巖石何年神禹跡 房櫳此日舊桃源 其中獨有忘機者 起杖靑黎倚竹門.” 15) 이 작품에 대해서는 박은순, 앞의 논문(2007), 389-415쪽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16) 박은순, 앞의 논문, 405-412쪽 참조. 17) 박은순, 앞의 논문, 389-415쪽. 18) 오세창편, 동양고전학회역, 『국역 근역서화징』하(시공사, 1998), 600쪽; 한편 『한국회화대관』에는 영모・절지에 능한 화가로 소개되어 있다. 유복렬편, 『한국회화대관』(문교원, 1979), 233쪽 참조. 19) 전충효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없지만, 조규희, 「소유지(所有地) 그림의 시각언어와 기능-<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를 중심으로」, 『미술사와 시각문화』3(2004), 8-11쪽; 박해훈, 「조선시대 瀟湘八景圖 연구」(홍익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187-193쪽; 김소영, 「18세기 호남의 방외화사 김익주(金翊胄, 1684-1739년 이후) 연구」(『호남학』75집, 호남학연구원, 2024) 218-220쪽에서 일부 다루어졌다. 20) 兪棨, 『市南集』 卷 1, 「使畵師全忠孝, 使李咸鄕一相, 時宰羅州, 錦城, 務安號, 赴會圖, 題一絶 寄贈」, 秦弘燮 編著, 『韓國美術史資料集成(4)』(일지사, 1996), 500쪽 참조; 「시남(市南) 유계(兪棨) 선생 생애와 주변인물」, 『무안신문』44호(2004.7.31.) 21) 金厦挺, 『三梅堂集』 卷 1, 「題畵師全忠孝軸, 並小序」, “余在嶺外, 已聞湖南有墨豪子, 及來長沙始見, 其人善談論, …후략”, 秦弘燮 編著, 『韓國美術史資料集成(8)』(일지사, 2002), 441쪽 참조. 22) 《영모도 병풍》은 아산 조방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박해훈, 앞의 글(2022), 36쪽 참조. 23) 전충효의 화풍에 대해서는 조규희(2004), 앞의 논문, 8-37쪽 참조. 참고문헌 김한명, 『석정처사유집』, 서남기획, 2006.
오세창, 국역 『근역서화징』하, 시공사, 1998. 유복렬, 『한국회화대관』, 문교원, 1979. 진홍섭, 『한국미술사자료집성』(4)·(8), 일지사, 1996·2002. 화순문화원, 『和順樓亭集』, 和順鄕土史料 第7輯, 1997.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강산을 그리다』, 2019. 박은순, 「朝鮮 中期 性理學과 風水的 實景山水畵-<石亭處士幽居圖>를 중심으로」, 『시각문화의 전통과 해석』, 예경, 2007, 389-415쪽. 박해훈, 「朝鮮時代 瀟湘八景圖 硏究」, 홍익대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6. 조규희, 「조선시대 산거도」, 『미술사학연구』217-218, 한국미술사학회, 1998. 조규희, 「소유지(所有地) 그림의 시각언어와 기능-<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를 중심으로」, 『미술사와 시각문화』3(2004), 8-37쪽. 조규희, 「朝鮮時代 別墅圖 硏究」,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글쓴이 김소영 한국학호남진흥원 책임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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