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보증 서다 쪽박 차다: 중개인 김시영 게시기간 : 2026-03-25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3-2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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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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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는 속담이 있다. 보증은 어떤 사람의 신용이나 물건 등에 대해 틀림이 없이 믿을만함을 책임지고 증명하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한다고 나서면 ‘보증 선다.’고 한다. 누군가의 신용 수준을 보증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빚을 보증하기도 한다. 보증 선 사람은 돈이나 물건을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다. 하지만 보증을 섰다는 그 말의 힘은 강하다.
<경향신문> 1997년 12월 13일 23면. 그것이 어깨를 내리누르는 힘을 감당해내기는 쉽지 않다. 1997년 IMF시절 이른바 ‘보증대란’을 겪은 이들이 많았다. 가족, 친척, 아는 사람들이 돈을 빌릴 때 그들의 상환능력을 보증해줬던 사람들은 월급이나 재산 가압류까지 당했다. 보증 서는 자식이라면 아예 낳지도 말라는 말이 꼭 틀린 건 아니다. 이 말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개나 보증으로 낭패를 겪는 일은 조선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목 잡는 불망기(不忘記) 제주도에 살던 김시영(金時英)은 1691년 4월에 여종 거래를 중개했다. 구매자는 제주도에 사는 강세융(姜世隆, 1648-1709)이고, 파는 자는 장성에 사는 양유추(梁有秋)였다. 양유추는 나이가 20살도 안 된 여종을 팔고 싶어했다. 그 값으로 강세융은 채찍이 딸린 말안장 1부(部)를 건넸다. 김시영은 거래를 주선하면서 불망기도 썼다. 여종을 팔겠다는 이가 육지에 살고 혹시나 약속대로 하지 않을까 믿음직스럽지 못하므로 그런 걱정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여종을 확실하게 강세융의 소유로 만들어주고, 혹시나 양유추가 약속을 어기면 자신이 모든 책무를 떠맡겠다는 내용이었다. 거래를 잘 성사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강세융은 채찍과 말안장을 즉시 내놓았고 양유추도 기꺼이 여종을 내어주겠다고 했다. 일이 잘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곧 사라졌다. 강세융으로부터 여종 값을 받아 양유추에게 건넸지만 양유추는 1년이 지나도 여종을 내주지 않았다. 김시영은 양유추가 원망스러웠다. 1692년 6월에 다시 불망기를 썼다.
임신년(1692년) 6월 12일
1692년 6월 12일에 김시영이 강세융에게서 여종 값을 받았으니 책임지고 여종을 데리고 올 것이라고 다짐했다. 불망기는 어떤 약속 내용을 잊지 않고 반드시 실행하겠다는 내용을 담는다. 일종의 각서이다. 거래 초기에 불망기를 쓸 때에는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양유추 때문에 일이 어그러져 두 번째 불망기를 쓰려니 입맛이 썼다. 배를 타고 뭍에 올라 장성까지 갈 일을 생각하니 아득했다. 되도록 빨리 출발하기 위해서는 날씨가 좋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놀랄만한 큰일도 아니었다. 진짜 큰일은 30년이나 지난 뒤인 1722년에 발생했다. 거래 대상이었던 여종 가질상(加叱上)이 자신은 양인(良人)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시대 노비는 가격이 매겨져 매매되었지만 양인은 팔거나 살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속량하여 양인이 되었고 자기 신분이 양녀이므로 ‘여종’으로 여긴다면 관에 소송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또 6월 13일에 속량한다는 증명서도 받았다고 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김시영은 양인 거래를 중개한 셈이고, 가질상이 양인이었기에 강세융 집안에서는 가질상을 데려다 ‘여종’으로 부릴 수 없게 되었다. 그 사이 매수자였던 강세융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김시영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1722년 7월에 강세융의 아들 강여민(姜汝敏, 1669-1729) 에게 불망기를 써서 건넸다.
임인년(1722년) 7월 12일
1722년 (임인년) 7월에 김시영(金時英)이 김시영은 중개를 잘못하여 강씨 집안 재산에 피해를 주었기에 손해배상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동안 가질상의 정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었기 일이 어긋나게 되었고, 옛날에 받았던 채찍과 안장값, 여종 값을 되돌려 준다는 내용을 썼다. 그리고 소나 말 중 한 마리를 드린다고 했다. 거래 중개의 대가로 이득을 취하기는커녕 소나 말 한 마리를 내줘야할 처지에 놓였다. 눈덩이처럼 커져 간 보상액 하지만 강여민은 김시영의 제안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강여민은 여종 가질상의 거래 과정을 보아 알고 있었다. 아버지 강세융이 1691년에 여종 가질상을 매수할 때 거래는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양유추가 여종을 즉시 내어주지 않아 여러 차례 독촉했고 김시영은 불망기도 썼다. 당시에는 강세융이 일을 주도했기에 강여민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만 있었다. 그후 강여민은 잇달아 상을 당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떴고 1709년에는 할아버지 강두형과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1711년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상을 치르다보니 가질상 거래건에 대해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1722년에 가질상이 양인이라면서 종살이를 못하겠다고 선언한 일이 생긴 것이다. 강여민 집안에서는 여종 하나를 잃은 셈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시영은 1722년 7월에 재빨리 강여민에게 불망기를 써주면서 소나 말 1마리로써 배상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강여민은 그 제안이 맘에 들지 않았다. 고민 끝에 1723년 2월에 관청에 호소했다.
이(李) 사또께서 제주목사로 오셨을 때 제주의 3읍 무사에게 상을 주기 위해 활쏘기 겨룸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아버지께서 도장원(都壯元)으로 채찍과 말안장 1부를 상으로 받았습니다. 제주목에 사는 김시영이라는 사람이 20세의 여종 1구를 사서 주겠다고 하면서 문권을 작성하고 채찍과 말안장을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그후 차일피일 미루고 갚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저는 잇달아 부모님과 조부모님 상을 치르느라 재촉해서 받아내는 일을 거의 하지 못했고 세월이 많이 지났습니다. 작년…(중략)…6월 즈음 그 여종에게 속량하는 문서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중략)…김시영이 중복하여 속량해 놓아주었으니 그것으로써 벌주시고 저로 하여금 여종을 잃어버렸다는 탄식을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1723년 2월에 강여민에게 채찍과 말안장의 의미는 중요했다. 그것은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우항(李宇恒)은 제주도 3읍 곧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무사들을 모아 활쏘기 겨룸 행사를 진행했었다. 강세융은 1등을 했고, 상으로 채찍과 말안장을 받았다. 그리고 나이 어린 여종을 사기 위해 귀한 상이었던 채찍 딸린 말안장 세트를 기꺼이 내놓았다. 그런데 김시영은 겨우 소나 말 한 마리로 안장값이나 여종값을 대신하려고 했다. 말안장을 한낱 물건으로만 치부하는 김시영의 마음씀이 탐탁치 않았다. 게다가 여종을 잃은 일도 분했다. 아버지가 거래할 당시 가질상은 겨우 20세였다. 노비 가격 중 여종의 값은 10세 미만 나이에서 20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그 가격이 약 2.5배 증가해서 20세 여종은 매우 비싼 재산이었다. 1673년 할아버지 강두형은 26살 여종을 살 때 잡곡 8석, 말 1필, 소 1마리를 치렀고, 1687년에 19살짜리 여종을 살 때에는 수말 5필, 암말 1필을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여종값과 안장값으로 소나 말 한 마리라니.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강여민이 이 소지를 올리자 제주목사는 김시영을 잡아오라는 처결을 내렸다. 그러자 1723년 5월에 김시영은 3칸짜리 초가와 마자전(麻子田) 2두락으로써 갚겠다는 명문을 써 주었다. 소나 말 1마리로 갚으려 하다가 집과 밭을 떼어주게 되었다. 미련은 남아 초가 3칸짜리 건물과 밭 일부를 넘기겠다고 문서를 작성했지만 김시영은 이 약속을 완전히 지키지 않았던 듯하다. 김시영 입장에서는 초가와 밭 일부를 넘기는 일이 속쓰렸을 터이고, 강여민 쪽에서는 겨우 되돌려 받았을 뿐인데 그조차 선뜻 내주지 않아 속도 많이 상했다. 김시영은 내어주었던 초가와 밭을 잊지 못했다. 7년 정도 지난 1730년 11월 22일에 문서를 작성했다. 그사이 강여민은 1729년에 세상을 떴기 때문에 강여민의 아들 강필성(姜弼聖, 1692-1738)에게 문서를 보냈다.
퇴송기(退訟記)를 작성합니다. (강필성에게) 여종 1구 값을 빚지고 여종을 사서 드리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형편상 부득이하여 살던 집과 마자전 2두락을 넘기겠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땅값이 크게 올랐습니다. 전에 샀던 여종을 이제 결득(決得)했으니 그 결득한 여종을 이번 27일에서 28일 사이에 가서 잡아와 드리겠습니다. 만약 부릴 수 없게 되면 지난 번 드렸던 집터를 영원히 드리거나 다른 잡물로 갚아드리고자 애걸하오니 송사를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1723년 5월 17일에 퇴송기는 소송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하는 글이다. 결득했다는 말을 보면 김시영은 7여 년 사이 여종 가질상과 법정에서 다투었고 결국 이겨서 가질상을 ‘여종’으로 삼게 되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녀를 잡아다 강씨 집안에 두고 이전에 주었던 집과 땅을 되돌려 받고 싶었다. 그에게는 여종보다 살던 집과 경작하던 밭에 더 미련이 남아 있었다. 소송도 그만하고 부동산도 돌려받고 싶었던 것일까. 보증은 아무나 하나
김시영은 노비 거래 중개인으로 일하면서 보증인도 되었다. 거래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면 좋다. 하지만 중개하는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노비 거래는 대개 편지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직접 노비를 살피는 일도 쉽지 않아 상호 신뢰가 중요했다. 특히 제주도는 섬이어서 육지에 있는 노비를 매매할 때 직접 가서 살피기는 어려웠으므로 중개인을 통해 거래가 이뤄졌다. 중개인의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신용거래 형태가 많았다. 김시영은 자기의 신용을 걸고 여종 가질상 거래를 중개했다. 거래 초기에 계약이 어그러지면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 곧 불망기도 작성했다. 강세융도 김시영의 신용도를 가늠하고 중개를 부탁했을 터이다. 그런데 여종을 판다던 양유추가 약속 이행을 안했고, 중간에 가질상이 양인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거래가 틀어졌다. 중개가 잘 되었다면 중개비를 듬뿍 받았겠지만, 김시영의 가질상 거래 중개는 생각 밖으로 진행되었다. 신용보증까지 걸어 중개비는커녕 집과 땅까지 ‘날렸다.’
1730년 11월 22일에 김시영은 조선시대 보증을 섰다가 망한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도 보증으로 삶의 기반과 집안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은 무수하다. 친한 사이라서, 신뢰 가는 사람이라서 등등의 이유로 보증을 서게 된다. 그러나 한편에서 ‘보증 서면 돈도 사람도 잃게 된다.’는 말들을 하는 것을 보면 보증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님은 분명하다. <도움 받은 글> 고전번역원 DB, https://db.itkc.or.kr/
한국학자료센터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 http://203.254.129.108/emuseum/service/ 안승준(2014), 「조선시대 노비 시장과 거래」, 『장서각』 31,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우연,차명수(2010), 「조선 후기 노비 가격의 구조와 수준, 1678-1889」, 『경제학연구』 58(4), 한국경제학회. 이정수,김희호(2008), 「조선후기 노비매매 자료를 통해 본 노비의 사회,경제적 성격과 노비가의 변동」, 『한국민족문화』31.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조정곤(2018), 「조선후기 제주지역 노비 거래의 양상」, 『고문서연구』 53, 한국고문서학회.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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