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선비가 마땅히 의(義)에 죽을 것이오, 양회일의 옥중편지 게시기간 : 2026-03-24 07:00부터 2026-04-20 14:07까지 등록일 : 2026-03-20 14:0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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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라에 닥친 일은 천고에 없었던 큰 변란이다. 뜻을 가진 선비라면 마땅히 의(義)를 위해 죽어야 하며, 그것을 망설일 겨를조차 없어야 한다.” “다행히 이만한 여력은 있으나 정신이 흐리고 손이 떨려 말을 불러주고 받아쓰게 하느라 더 길게 쓰지 못한다.” 나라에 닥친 큰 변란, 의를 위해 죽어야 한다. 손이 떨려 대신 쓰게한 글. 어느 편지의 첫 문장과 끝 구절이다. 무슨 사연일까. 누가 썼고 받는 이와는 어떤 인연일까. 끝 구절이 유독 오래 눈이 간다. “손이 떨려” 직접 쓰지 못했다.
고문으로 손이 떨려 불러주어 대필한 편지 형 해심(海心)이 아우 처중(處中)에게 보낸 편지이다. 해심은 의병장 양회일(梁會一, 1856~1908)의 자이다. 처중은 양회일의 동생 양회락(梁會洛, 1862~1935)의 자이다. “손이 떨려”는, 고문을 당하여 글씨를 쓸 수 없을 정도로 탈이 난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불러서 대신 쓰게 하여 어렵게 편지를 동생에게 보낸 것이다. 헌병대에 잡혀 있을 때 옥중에서 보낸 것이라 한다. 양회일 의병장은 1908년 5월에 재차 의거하여 강진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왜병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6월에 장흥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단식 투쟁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순국하였다. 구금된지 7일만인 6월 24일이었다. 따라서 이 편지는 1908년 6월 전후의 편지인 셈이다. 이 편지를 포함하여 양회일 관련 유적과 유물이 2025년 8월 14일자로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명칭은 「화순 양회일 항일 유산」. 간찰(편지)은 다양한 자료가 남아 있다. 시기적으로 훨씬 빠른 것도 무수하다. 그런데 1908년 편지가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전라남도에서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항일독립유산을 지정한다는 정책을 펴서이다. 도민공모 형식으로 추진하여 22건이 제출되었다. 몇차례의 전문가 검토와 현지 조사, 전라남도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한 8건 가운데 하나이다. 전라남도 기념물, 화순 양회일 항일유산 「화순 양회일 항일 유산」은 양회일의 젊은 시절의 학문 활동을 알 수 있는 능주목 백일장 시권, 절의 정신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는 옥중 편지, 양회일의 저술과 함께 쌍산의소 의병부대의 행적을 모은 후손가 전래 『행사실기』 초간본, 1948년에 능주유림이 중심이 되고 전국 유림이 호응해 마을 앞에 세운 순의비, 그리고 묘소 일원이다. 유물 3건 유적 2개소이다. 이 유산은 의병장 양회일의 전 생애는 물론 순국 뒤의 후대인들의 추숭과 현양도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쌍산의소 의병부대 현황과 전투 기록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편지나 문서, 문집은 유형문화유산, 순의비나 묘소는 기념물로 분류되어 따로 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2024년부터 들어선 ‘국가유산’ 체제에서는 해당 유산에 깃든 ‘정신과 문화’도 중요시하고 있다. 이에 맞추어 유적과 유물을 함께 지정하면서 ‘양회일 항일유산’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의병장의 일생과 함께 참여한 의병들의 행적 자료, 후대인들의 추숭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문화유산을 함께 보존관리하게 된 것이다. 다시 옥중 편지를 보자. 이 편지는 한 의병장의 옥중 유서이자, 스스로의 삶을 결산하는 도의적 선언문이라 할 만하다. 양회일은 이 편지에서 이미 죽음을 넘어 있다. 몸은 옥중에 있으되, 그의 정신은 의(義)의 완결 속에 있다는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아우에게 보내는 편지글이지만, 실제로는 후세를 향한 당부로 모든 사람을 향한 유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전문을 옮긴다. 처중(處中)은 보아라.
지금 나라에 닥친 일은 천고에 없었던 큰 변란이다. 뜻을 가진 선비라면 마땅히 의(義)를 위해 죽어야 하며, 그것을 망설일 겨를조차 없어야 한다. 만일 이해득실을 따졌다면 애초에 이 거사(의병)를 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 길을 선택했으니 그 근본은 오직 ‘의(義)’ 한 글자가 있을 뿐이다. 비록 아침에 말하여 저녁에라도 바로 풀려날 수 있는 길이 있다 하더라도, 만일 되레 적에 매달려 풀려나려 한다면 그것을 과연 의(義)라 말할 수 있겠는가.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혹 나를 모함하여 죄를 씌우고 의로운 뜻을 뒤집어 화적(火賊)이라 하려 하더라도, 조정과 백성들 사이의 공평한 여론은 스스로 바로 설 것이다. 지금의 이 의리(義理)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영예이며, 서둘러 풀려나는 것이 오히려 치욕이다. 내 평생의 뜻과 행적은 이 한가지로 충분하다. 만일 겉으로는 절의를 논하고 충절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권세에 의지해 벗어나고자 꾀를 꾸며 청탁을 한다면, 그 마음이야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부디 정도를 지키고 천명을 기다리기를 바란다. 다행히 이만한 여력은 있으나 정신이 흐리고 손이 떨려 말을 불러주고 받아쓰게 하느라 더 길게 쓰지 못한다. 형 해심(海心)이 삼가 보낸다. 저 편지는 어디에서 썼을까. 일반적으로 헌병대에서 쓴 것으로 전해 온다. 양회일은 강진헌병대에 붙들렸고 장흥헌병대에서 단식투쟁으로 일주일만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처절한 상황에서 쓴 편지라서 더 우리의 심금에 와 닿는 것도 같다. 장흥헌병대는 분견소(分遣所) 급으로 영산포헌병대 관할이었다. 1906년에 설치했다. 경찰서도 1906년 7월 6일 설치된다. 당시 전라남도경무서 장흥분서라 했다. 국가를 위한 충성심 어느 곳에 몸 바칠 곳이 없으니 한편, 양회일의 시문을 모은 『행사실기』에는 옥중에서 지은 시도 보인다. 「금릉안중 답 왜로호운 일절(金陵犴中答倭虜呼韻一絶, 금릉 옥중에서 왜적의 화운에 답하다)」이라는 제목이다. 사정과 힘은 헤아려 보지도 아니하고 단지 의(義)만 지킬 줄 알았기에
이렇게 포로의 몸이 되어 두 번씩이나 수치를 당하는구나 국가를 위한 충성심 어느 곳에 몸 바칠 곳이 없으니 구원(九原, 저승)길 가서는 면옹(勉翁, 면암) 따라 놀기를 원하노라 不量事力但知義 致此俘身兩度羞 爲國丹忱無地效 九原願逐勉翁遊 ‘금릉(金陵)’은 강진의 별칭이다. ‘안중(犴中)’은 ‘옥중’의 의미로 헌병대나 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를 말함이다. ‘답 왜로호운 일절(答倭虜呼韻一絶)’은 투옥 상황에서 왜놈 측이 시를 요구하거나 조롱하듯 화운을 요구한 데 답하여 지은 절구라는 뜻이다. 이 시는 전형적인 의병장 옥중 절의시(節義詩)의 성격을 지닌다. 수련에서 사세와 힘을 헤아리지 못했음을 자책하면서도, 의(義)를 따른 선택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2연에서는 체포되어 두 번이나 포로가 된 현실을 ‘수(羞, 수치)’라는 표현으로 절통하게 인식한다. 이는 개인적 치욕이라기보다 나라를 구하지 못한 치욕이 아닐까. 3연에서는, 나라에 대한 충성(丹忱)을 바칠 곳이 없음을 탄식한다. 즉 살아 있으나 을사늑약으로 이미 충성을 실현할 역사적 공간이 사라진 상황을 표현한다. 4연에서, 죽어서라도 면암 최익현(勉菴)을 따라가겠다고 한다. 단순한 죽음의 의지가 아니라 의병 정통 계승 의식, 순절을 통한 도의 완성을 선언하는 구절이라 하겠다. 유일한 양회일 친필 - 능주목 백일장 시권 시권(試券)은 능주목사가 시행한 백일장에서 제출한 답안지이다. 양회일의 글씨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유물로 가치가 매우 크다. 과목은 시(詩)이고 시제는 ‘여적수동명 조행만지시(如積水空明藻荇滿地詩, 가득찬 물 투명하고 마름 풀 지연에 가득함을 제로 한 시]’이다. 이 시제는 중국 송나라 소동파(蘇軾, 1037~1101)의 시문 구절이다. 소동파가 황주(黃州)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기승천사야유(記承天寺夜遊)〉라는 글에 나오는 부분이다. 이 기문은 소식이 원풍 6년(1083년) 10월 달 밝은 밤, 승천사에서 장회민과 함께 산책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달빛 아래 뜰의 풍경을 맑은 물과 수초에 비유해 청명한 정취를 드러내고, 이러한 아름다움을 함께 누릴 한가로운 사람이 드물다는 점을 말한다. 이를 통해 자연과 벗을 즐기는 여유로운 마음이 삶의 참된 즐거움임을 보여준다.(《東坡全集》 권101 志林55 記遊) 양회일이 시권에 담은 시는 9구로 된 칠언배율(七言排律)로 짝수구에서 같은 운을 사용하고 연속적인 대구로 구성하였다. 정경과 심경 묘사를 하고 있는데 소동파의 달밤 산책 일화를 능주의 자연과 자신의 심미안을 통해 형상화한다. 물과 달, 그림자와 허실의 대비를 통해 맑고 투명한 형상 속에 한가함과 초탈을 읊고 있어 문인의 이상적 삶을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구절을 보자. 허한 가운데 실(實)이 있는 이 기상이여
한층 기이한 장관은 수초가 가로 놓인 곳이라 바람에 끌린 푸른 띠 그림자 서로 얽혀 어지럽고 이슬에 젖은 국화꽃 물결처럼 편편하네. 虛中有實這氣像 一層奇觀水草橫 牽風翠帶影相亂 浥露黃花波共平 이 구절은 허(虛)와 실(實)이 공존하는 자연의 이치를 섬세하게 형상화한다. 물 위에 가로 놓인 수초와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는 혼란 속 질서를 드러내고, 이슬 맺힌 국화는 파문과 하나가 되어 고요로 귀결된다. 현상 너머의 본질을 관조하는 맑고 깊은 문인의 사유가 드러난다.
성적[科次]은 ‘삼하(三下)’이다. 성적이 3하 이상이어야만 합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측 아래 ‘칠지(七枝)’는 이 시권의 제출 순서를 말한다. 오른쪽 하단의 명지(名紙)에는 ‘양회일 도림면(梁會一 道林面)’이라 성명과 지역이 보인다. 양회일이 활동하던 때는 능주목 도림면이었다. 이름 위에 ‘근봉(謹封)’이라는 글자가 반만 보인다. 이는 작성자의 이름을 가리기 위해 접거나 말아서 붙인 것이다. 백일장은 유생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실시하는 시험이다. 조선 후기 지방 백일장은 관찰사와 수령 등 관 주도 또는 향교나 서원의 지방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실시하였다. 수령 주도 백일장은 생원시와 진사시를 준비하는 유생을 대상으로 했다. 생원시는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 진사시는 문장이나 시부(詩賦)로 문예창작능력을 시험한다. 이 시권으로 보면 양회일은 진사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겠다. 빛나는 충절 빗돌에 새기니, 1,899명의 전국 유림 참여 순의비 순의비 비문은 동강 김영한(東江 金甯漢, 1878~1950)이 지었고 비문 글씨는 정재 양회갑(正齋 梁會甲, 1884~1961)이 썼다. 제액 전서는 회봉 안규용(晦峯 安圭容, 1873~1959)의 글씨이다. 도유사는 안석환(安錫煥)이었다. 명(銘)의 일부를 보자. 비문은 동강 김영한(東江 金甯漢, 1878~1950)이 지었고 비문 글씨는 정재 양회갑(正齋 梁會甲, 1884~1961)이 썼다. 제액 전서는 회봉 안규용(晦峯 安圭容, 1873~1959)의 글씨이다. 도유사는 안석환(安錫煥)이었다. 명(銘)의 빌무를 보자. “어리석고 포악한 백만의 적도를 감히 일사(一士)가 당하니 오직 의리(義理)로써 함이로세. … 빛나는 충절(忠節) 빗돌에 새기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천고(千古)토록 변치 않으리라.”
행사양공순의비동지록서문(閼逢敦牂, 1954, 양회갑)
표지
의병의 실상과 지역 사회의 대응을 잘 보여주는 『행사실기』 양회일 의병장 묘소는 출생지인 쌍봉리에 소재하며 순의비가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훈련장과 막사터가 있는 쌍산항일의병 유적과도 연계되는 지역이다. 원형이 유지되고 있으며 장소로서의 역사성과 더불어 중요한 유적이다. 『행사실기(杏史實紀)』는 양회일의 문집으로 1950년 간행된 초간본이다. 문집류로서는 발간 연대가 이르지는 않지만, 간행에 참여했던 후손의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 오고 있다는 점에서 원본 전래의 역사성이 크다. 『행사실기』의 구성은 시문, 추모 기록, 전기 자료, 의병 활동 기록, 창의록 등으로 이루어졌다. 권1에는 시 22제 98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은거 생활과 교유, 시대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권2의 만사(18편)와 제문12편)은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한 추모 기록으로, 양회일에 대한 당대 및 후대의 평가와 지역 사회의 인식을 알 수 있다. 권3에는 가장[양회룡], 행장[회봉 안규용], 묘지명[정재 양회갑], 묘갈명[단운 민병승], 순의비[동강 김영한], 전[석농 오진영, 송산 권재규], 찬[정기] 등 전기 자료가 포함되어 그의 생애를 다각도로 서술하며, 「순의비」, 「호남정의록」, 「동국순의록」 등 관련 기록을 통해 의병사 자료로서의 범위를 확장한다. 특히 권4의 「창의록」은 의병 봉기의 경과를 서술한 핵심 자료로, 격고문과 군중 포고문, 조직 구성과 참여자 명단 등이 수록되어 있어 의병 조직과 활동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행사실기』는 시문집·전기·의병 기록이 결합된 종합 문헌으로, 양회일 개인의 생애를 넘어 대한제국기 의병운동의 실상과 지역 사회의 대응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창의록」을 중심으로 한 기록은 1차 사료적 가치가 높으며, 만사·제문·전기 자료는 후대 인식과 기억 형성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따라서 『행사실기』는 의병사, 지역사, 그리고 근대 전환기 지식인 의식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라 하겠다. <참고문헌> -『행사실기』(초간본), 1951(양○○ 소장본. 지정)
-『행사실기』(중간본), 1958(전남대도서관, 조선대중앙도서관 소장) -『행사실기』(역주본), 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2010. -『행사양공순의비동지록(杏史梁公殉義碑同志錄)』1954(조선대중앙도서관 소장) -박민영, 「능주의 쌍산의소」, 『한말 중기의병』-한국독립운동역사10-,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김남철, 「불멸의 사랑, 화순쌍산의소 양회일 의병장」, 『남도 한말의병이 기억을 걷다』, 살림터, 2023. -이상식, 「의병전쟁연구 -전남 동남지역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23, 국사편찬위원회, 1991. -조동걸, 「雙山義所(和順)의 의병성과 무기제조소 遺址」, 『한국민족운동사연구』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홍영기, 「구한말 ‘湖南倡義所’에 대한 몇 가지 문제」, 『한국민족운동사연구』5, 1991, 159~172쪽.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전라남도, 『문화유산위원회 회의자료』, 2025(유인물) 글쓴이 김희태 전 전라남도 문화유산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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