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성좌] 묻혀진 나주지역 근현대사의 거목 박준삼(朴準三, 1898~1976) 게시기간 : 2026-03-12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6-03-10 15:5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항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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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나주지역 민족운동계의 ‘트로이카’ 필자는 일제강점기 나주지역의 민족운동을 공부하면서 신문기사를 비롯한 각종 자료에서 그 중에서도 박준삼(朴準三)과 김창용(金昌容), 양장주(梁長柱)라는 이름을 자주 보게 되었다. 이들은 나주지역의 여러 단체에서 함께 어울리며 활동했기에 필자는 속으로 이들을 나주지역 민족운동계의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그래서인지 관련 연구도 찾기 어렵다. 이들은 이 지역의 역사에서 제대로 기억된 적이 없기에 ‘잊혀진’ 것이 아니라 그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묻혀진’ 것이다. 이들 중 우선 박준삼이 누구인지, 일제강점기 나주지역에서 펼쳤던 그의 활동을 드러내고자 한다. 가계와 수학 박준삼은 1898년 8월 3일 전라남도 나주군 나주읍 남내동 95번지에서 박정업(朴正業)과 김운석(金雲石)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밀양, 호는 회성(晦星), 이명은 박헌삼(朴憲三)이다. 1929년 10월 30일 이른바 ‘나주역사건’의 당사자인 박준채(朴準埰)의 형이다. 1912년 3월 나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월 임점남(林占南)과 결혼했으며, 1916년 4월 서울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1919년 6월 중퇴했다. 부친이 1930년 나주에서 두번째로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으므로 그가 경제적 사정 때문에 중퇴했을 리는 없으며, 박준삼의 자필이력서(1963년)에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학교를 중퇴했다고 나온다. 『중앙백년사』(2008)에 따르면, “시위하다 검거되어 체형을 받게 된 중앙학교 학생은 확인된 범위에서 30여 명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자연히 학업을 계속하지 못한 학생이 많았고 체형을 당해 평생을 희생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뒤에 일어난 중앙학교 본관 화재로 학적부가 소실되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박준삼은 경찰에 체포됐지만 바로 석방되어 체형(징역형)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학교측으로부터 자퇴를 하지 않으면 강제퇴학 처분을 한다는 말을 듣고 자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만 다른 학교에 편입학 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귀향과 유학, 귀국과 사회운동 귀향한 그는 1920년 1월 나주수양회에 입회하여 활동하다가 4월 일본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고등과에 입학했으며, 1920년 7월과 1921년 7월 방학을 이용해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야구단의 일원으로 귀국하여 부산·마산·대구 등지에서 친선경기를 갖기도 했다. 1922년 3월 영어학교를 졸업한 그는 다시 도쿄 릿교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진학했으나 2학년 재학 중인 1924년 ‘가사형편’으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같이 일본에 유학 중이던 동생 박준화(朴準華)의 병세가 깊어 같이 귀향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경 그는 영국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부친의 허락까지 받았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성사되지 못했다. 같은 해 8월 그는 동생 박준화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그는 나주청년회 집행위원장(1926. 11)과 12월 나주협회 창립준비위원(1926. 12), 신간회 나주지회 간사(1927. 9)와 나주청년동맹 조직준비위원(1927. 12), 나주노동조합연맹 제반정리위원(1927. 12), 나주청년동맹 집행위원장(1927. 12) 등에 선출되어 나주지역의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남평유림각사건과 투옥 1928년 2월 그는 이른바 ‘남평유림각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됐다. 이 사건은 남평의 유림들이 전라남도 나주군 삼포면에 유림각(儒林閣) 건립을 위해 1927년 3월부터 부정한 방법으로 모금하자 8월 김창용·양장주 등 나주지역 청년단체 간부들이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폭행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1월 경찰이 유림측에 유림각 건축 중단을 지시하면서 수습되는 듯했으나, 1928년 1~2월 경찰이 신간회 나주지회 임원 등을 검속하면서 ‘사상사건’으로 변질됐다. 사건을 맡은 사카이[酒井] 검사는 항일사건을 전담하는 이른바 ‘사상전문검사’였다. 일제는 단순한 폭행사건을 이른바 ‘시국사건’으로 확대시키려 한 것이다. 나주청년동맹 및 신간회 나주지회 간부였던 박준삼은 1927년 8월 당시 사건 현장에 없었으며, 유림측에서도 “박준삼 외 3인은 사실 전부가 애매하다”는 진정서를 판사와 검사에게 제출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검사는 그를 기소하고 실형을 구형했다. 신간회 중앙본부의 김병로와 허헌이 이 사건의 무료변론을 자청한 점이나, 판사가 “신간회의 강령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의미의 취지”를 질문한 점)도 이 사건이 신간회 나주지회를 와해시키기 위해 계획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1928년 3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 때 검사가 실형을 구형하면서 “사건 전체는 그리 중대치 않으나 피고들은 혹은 단체의 위력을 빌고 또는 다른 수단·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행위를 제재했다. 그리고 그네의 사상경향으로 보아서는 후일를 경계하기 위하여 처벌치 아니치 못한다”고 한 점에서도 민족운동 인사들을 탄압하려는 일제의 계략에 따라 박준삼 등이 기소됐음을 엿볼 수 있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 1928년 3월 16일 검사는 박준삼에게 징역 6월을 구형했고, 3월 30일 판사는 징역 6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박준삼 등은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으며, 대구복심법원에서 5월 29일 열린 2심에서 박준삼은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됐다. 하지만 이미 110여 일의 옥고를 치른 후였다.
1929년 10월 30일 이른바 ‘나주역사건’이 일어나 동생 박준채와 인척인 박기옥(朴己玉)이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았고, 11월 27일 일어난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조시위에 참여했던 인척인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유찬옥(柳贊玉)과 나주청년동맹 나주지부 집행위원장 박동희(朴東熙)도 경찰에 검거됐다. 하지만 박준삼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연루되지 않았다. 신간회 나주지회와 나주협동상회 활동 박준삼은 신간회 나주지회 임원으로 계속 활동하면서 나주협동상회 평의원(1929. 4), 나주상공협회 감사(1930. 5), 나주협동상회 이사(1935. 5), 나주상공협회 부회장(1938. 5) 등으로 선임되어 조선인 상공업의 발전과 민족자본 육성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신간회 나주지회에서 설립한 나주협동상회는 나주의 일본 상인들과 경쟁하며 주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으며, 이는 경제적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나주협동상회는 신간지회에서 1929년 4월 설립하고 6월 개점한 협동조합·소비조합의 성격이 섞인 상점이었으며 고권(股券)을 발행하고 회원제로 운영되었다. 이는 신간지회의 경제활동으로서 실제로 설립·운영된 흔치 않은 사례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그리고 그 운영의 중심에 박준삼이 있었다. 신간회 나주지회의 사업으로 출발했기에 일제의 탄압도 이어졌다. 상회장 김창용은 1930년, 이사장 양장주는 1931·1932년 일제에 검속되었고, 1930~1931년 일제는 협동상회을 수색했다. 그럼에도 협동상회는 적어도 1937년까지는 주민들의 큰 호응과 가대를 받으며 발전을 거듭했지만,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1938년 폐쇄되었다.
교육운동 투신과 건국운동 참여 박준삼은 교육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29년 8월 나주유치원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었으며, 나주대정초등학교 후원회장(1938. 5)과 나주읍학교 평의회원(1939. 7)으로도 선출됐으며, 1933년 모교인 서울 중앙학교의 기념관 건축을 위해 1백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는 모교인 중앙고보 동문회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해방 후 그는 1945년 8월 20일경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나주지부 부위원장에 선임되어 건국운동에 참여했다. 같은 달 ‘대조선건국준비위원장’ 박준삼 명의의 「사직단 축문」을 보면 그가 위원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미군정에서는 건준과 이를 이은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후 그는 교육운동에 전념한 듯하다. 그는 나주민립중학교 설립자 대표(1945. 9), 나주군교육협회 부위원장(1945. 10), 나주금성공립국민학교후원회 고문(1950. 2), 나주중학교 사친회장(1954. 5), 나주고등학교 건축기성회 부회장(1955. 7), 나주고등학교 사친회장(1956. 5) 등에 선임됐으며, 1963년 나주한별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1945년 9월 나주군교육협회에서는 나주민립중학기성회 창립취지서를 발표했으며, 박준삼은 같은 10월 교육협회의 부위원장에 선임됐고, 1946년 9월 나주농업실수학교와 나주민립중학교가 합병하여 공립나주중학교가 설립됐다.
조용한 말년, 드러내야 할 그의 공적 이후 박준삼은 특별한 사회활동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경향신문』 1966년 10월 8일자(「한글전용의 횃불 높이 들고 40여년」)에서는 그가 한글 전용론자인 9년 연하의 ‘친구’ 박동철(朴東澈)을 만나 격려했다는 내용을 알리고 있는 정도이다. 1976년 7월 21일 별세한 그는 김창용·양장주 등과 함께 해방 전 나주지역의 사회운동과 민족운동 및 해방 후 건국운동, 그리고 해방 전후 교육운동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가 거주했던 남파고택(南坡古宅)은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며(2009), 그가 소장했던 각종 자료는 『남파고택 소장자료조사보고Ⅰ』(나주문화원, 2023)과 『나주 남파고택 기탁자료』(나주시, 2023)으로 발간되어 나주의 지역사 연구에 기여하고 있다. 한편 그의 집안은 나주지역 민족운동과 관련이 깊다. 부친 박정업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당시 청년운동가 장석천에게 운동자금 40원을 제공한 바 있으며, 4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사건(박준채·박기옥)과 11월 27일 나주격문사건(박공근·유찬옥)의 당사자들이 그의 인척이었다. 당시 박동희의 주소는 박준삼의 부친인 박정업의 집, 유찬옥의 주소는 박준삼의 집이었으며, 박정업과 박준삼의 집은 같은 구내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박준삼의 민족운동은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것이었고, 그 때문에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끝내 변절의 길을 걷지 않았으며, 해방 이후에도 건국운동과 교육운동에 헌신했다. 이같은 그의 공적을 드러내어 널리 알려야 할 책무가 필자의 어깨에도 지워져 있다. 글쓴이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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