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근현대 시문학] 차별 없는 세상을 그리다가, 노래로 남은 게시기간 : 2026-02-2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2-24 10:0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호남 근현대 시문학
|
||||||||
|
1. 호남의 이상향에서 태어나 일제 치하 서울의 변방이었지만 ‘호남의 이상향’이라 불리며 민족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된 고장, 백제불교의 도래지이며 바다와 염전과 굴비로 시장이 활성화되어 다른 고장에 비해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곳, 덕분에 일본과 서울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이 많았던 곳, 유학생들은 방학이면 귀향하여 야학을 열고 문예와 연극과 음악과 체육을 지도하면서 문맹퇴치에 앞장섰고 민족의식을 키워내기에 바빴던 곳, 철저하게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그곳이 바로 영광이다. 영광은 시문학사에서 시인 조운의 고향으로 호명되는 곳이지만 사실은 많은 작가들의 고향이다. 시인 조남령, 시인 조의현, 수필가 조희관도 영광의 작가들이다. 이들은 일제가 치안유지법위반 등으로 항일 민족운동가들을 ‘영광공산당사건’을 조작한 일명 ‘영광체육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거나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일제 치하에 순응하는 삶을 거부한 이들은 과연 ‘호남의 이상향’에 살만한 자격을 가졌다. 여기에 그동안 호명된 적 없는 한 사람이 더 있다. 그는 동화작가 정태병이다.
정태병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정종의 『故鄕의 詩人들과 詩人들의 故鄕』1)에 「우정 정태병과 한편의 시」라는 짧은 내용과 『내가 사랑한 나의 삶』2)에 파편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정태병은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정태병은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썼다. 그는 과연 무엇을 위해, 무엇을 바라며 서슬 푸른 시절을 동심과 함께 걸었는지, 그동안 전무하다시피 했던 그의 행적을 따라 문학적 의미들을 짚어보기로 한다. 2. 영광을 그리움으로 묻고 정태병(鄭泰炳, 1916.8.15~ ?)은 1916년 8월 15일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면 백학리 39번지에서 아버지 정동안(鄭東安)과 어머니 김안(金安)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태병의 호는 우정(友汀)이다. 정태병의 부친 정동안이 일찍 세상을 등지는 바람에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도, 유학을 갈 수도 없었다. 정동안의 동생인 정동희(鄭東熙)가 정태병을 영광공립보습학교에 다닐 수 있게 도와서 1930년 2월 영광공립보습학교(현 영광중학교) 2회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영광에서 ‘풀잎사’라는 서점을 경영하였다. 정태병의 숙부인 정동희는 영광에서 상점을 운영하였는데 정종의 부친이고, 조선식량영단 영광출장소 소장이었던 정동은(鄭東殷)도 정태병의 숙부였다. 정태병의 숙부들은 영광지역의 유지들로 정태병의 후원자들이기도 했다. 민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영광에 ‘영광체육회’가 있었다. ‘영광체육회’는 많은 종목의 전국대회들을 개최하였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광으로 모여들었다. 이를 예의주시하던 일경은 영광에서 하나의 사건을 조작하였다. 그것이 영광공산당사건, 일명 ‘영광체육단사건’이다. 그 사건의 주동자로 시인 조운과 위계후가 지목되었다. 피의자 신분이 된 시인 조운과 위계후를 비롯한 23명과 함께 9개월간의 취조를 거친 검찰에 송치되었을 때 정태병의 나이는 23살이었다.3) 정태병은 1938년 5월 16일 석방되어 다시 서점 ‘풀잎사’를 운영하였고, 1941년 영광학원의 교사였던 박태엽의 딸인 박세보(朴世輔)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결혼을 즈음하여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서 정태병은 영광읍사무소에 근무했다. 그때의 심경은 시「추풍부」담았다. 정태병은 광복 1년 후인 1946년 4월부터 호남신문사에서 지방부장으로 있다가 온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여 소년운동자 제2차 간담회에서 ‘조선소년운동의 금후 전개와 지도단체조직’과 ‘어린이날’ 준비를 논의하였고, 조선소년지도자협의조직을 목표로 각 방면을 망라한 조직준비위원으로 그리고 조선문학가동맹 아동문학분과위원으로 활동했다. 문학가동맹 광주지부가 창립될 때 조선문학가동맹의 대표성을 띠고 광주에 내려오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상황을 살피러 나갔다던 정태병은 북에서 종군작가로 내려온 조운과 함께 월북했다. 이상이 정태병이 살았던 대강의 여정이다. 3. 동심으로 꿈꾼 세상 우리는 유년과 소년시절을 친형제 이상으로 다정하게 보냈다. 그런데 사변 중에 나는 광주에, 아우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는 것과 여러 가지 인연이 겹쳐, 북으로 갔으므로, 30대 중반 이후론 우리의 유다른 우정관계도 뚝 끊어지고 말았다. (중략) 우정은 일제말기 그러니까 한글이 말살되고 문학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에도 그 정열과 중단을 모르는 그 성향도 가편(加鞭)하여, 일어를 빌어서나마, 동요를 짓고 동화를 쓰곤 했다. 물론 뾰족한 발표 기관이나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단지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으려는 일념에서였을 뿐이라서, 완성된 작품을 으레 나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때마다 아우의 文才가 발군적임과 시적 구성력의 출중함이 내가 감히 따르지 못할 것을 확인하곤 했다.4)
정종의 정태병에 대한 회고이다. 분명한 것은 일제 치하에서 동요와 동화를 습작하였다는 것이고, 정종의 회고 중 ‘북으로 갔’다는 것, ‘동화를 쓰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이란 때로는 자기중심으로 정리되고 저장되면서 왜곡이 발생하는데 ‘뾰족한 발표 기관이나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사실 정태병은 1939년 1월 <매일신보> 신춘현상공모에 동화 「一男이의 그림」이 일등으로 당선되어 활동한 동화 작가다. 동화 「一男이의 그림」은 ‘남쪽 바다에 가까운 어느 고을’의 유명한 화가인 일남이의 아버지 석산어른이 임금님으로부터 ‘비단평풍’을 하사받으면서 시작된다. 동네 사람들은 동네의 경사가 났다며 그를 우러러보며 존경하였다. 그런데 석산어른의 장남인 일남이는 열을 가르쳐주면 겨우 하나를 알까말까 하는 바보였기 때문에 늘 근심이었다. 그래서 동생 이남에게 그림을 가르쳤는데 이남이는 제법 그리는 시늉을 하였다. 덕분에 일남이는 매일 산에 올라 나무만 했다. 나무를 해와도 “나무나 만히해오라니 왜 오늘은나무를 적게해왓느냐 어대서낫잠이라도 잔게로구나 차라리 그럴테면 집에서 나가거라”는 등의 구박을 받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그럴 때면 일남이는 산에 올라 그림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래 일남이는 퍼런하늘로 푸르르 나는 새를 바라볼면 소나무가지를 거점이라도 하나어 새의모냥을 그려보기도하고 멀리 들판을 건너 앗득하게보히는 산봉우리의 모냥도 푸른하늘에대고 불불 구비 흘러 흘으는 푸른 강물의 모냥도 구불구불하게 잔디에 그어도보며 동생이남이의 그림그리는 흉내를내보앗습니다
이러케 날마다 바보일남이는 뒷동산에 지게를 질머지고와서 나무를 솔폭밋에서 한우쿰두우쿰 글거모흐다가도 엽헤 널따란 바위가잇스면 생각난듯이 돌맹이들 집어들어 산의 모냥도 불불 구비저흘러가는강의모냥도 구불구불 기다라케그어보고 그리고 해의 모냥도 둥글둥글 그려보면서 그대로 서러워지기도햇습니다 이렇게 온갖 서러움을 그림으로 달랬던 어느 날 “이바보야 바보야 밥만한그릇씩 퍼먹고 나무한지게못해가지고들어오니 어는 뭣할태냐 이바보야 차라리 이놈 나가거라 이바-보녀석아!”하는 어머니의 구박에 참아왔던 분노는 폭발하고 만다. 분에 못이겨 쌔근<하는숨소리로 방문을 덜컥 열엇습니다 그랫더니 방안에는 아무도업고다만넓은 방에 비단 평풍이 번쩍<빗나게 방에 펴잇스며 엽헤는방석만한벼루에 만먹이훔 그리고 커다란붓만이가루 노혀잇슬름이엿습니다
이것을본 바보일남인는 참지못하는 분통에 그만 『애라 점사나부리고 나가버리자』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그대로 달려들어그 커-다란붓에 -만 먹을 훔무처가지고 날마다날마다구불-구불-아무럿케나 그려보는 푸른강 흘으는 모냥을 비단평풍웃머리에붓을대자 냅다죽-구부러지게 두어줄을 그어버리고 그만 손이를 첫슴니다일남이의 분노는 아버지 석산어른이 금기시하는 ‘비단평풍’에 마구 ‘점사’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점사’는 석산어른을 감동시키고 말았다. ‘비단평풍’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났고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인 듯 생동감 있었다. 일남이 아버지 석산어른은 그보다 더 좋은 그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멀리 ‘ 정태병은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아무리 ‘바보’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그가 동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약자들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그들을 존중하는 것에 있었다. 이 밖에도 수 편의 동화와 동시를 썼는데 정태병이 남쪽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동화는 「다람쥐와 곰」이다. 그는 동화의 지평을 넓혀 소설도 썼다. ‘조선창작민화’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은 모두 3편으로 「下人과 上典」, 「달린말」, 「水濘에빠진도둑」이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한결같이 계급 간의 갈등을 그리고 있는데 첨예한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로 보여주기보다는 흥미롭고 재미있게 그려냈다.
4. 조선 동요 집성, 미완의 노래 동화 작가로 이름을 알린 그가 동심의 영역을 확장한 것은 동요였다. 그는 방정환의 동요 「형제별」, 서덕출의 「봄편지」, 김소월의 「엄마야·누나야」, 「아기의꿈」, 최남선의 「정다웁지요」, 목옥순의 「봄」, 최병완의 「별똥」, 김수향의 「고향하늘」을 동요를 번역하여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해방 후 최초로 조선의 동요를 집대성 『조선동요전집』5)을 냈다.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어린이들에게 마음껏 부를 수 있는 동요를 모음으로써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조선동요전집』을 엮은 이유는 「머리말」에 잘 드러나 있다. 가, 이 책은 기미년 이후 소위 조선 신문학운동의 초창기에 있어서 그 터전에 엄트기 시작한 어린이 문학의 싹이 오늘의 숱한 열매를 맺기까지 약 삼십년, 그동안의 조선 현대동요 가운데서 보다 우수한 작가와 작품을 널리 골라 수록한 것이다.
나, 특히 팔원십오일의 역사적 전화기를 전후하여 무엇보다도 노래에 주린 조선의 어린이들로 하여금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아름다운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동시에 지금 전선의 소 학교에서 지성으로 국어를 공부하는 데에 그 한 과외 독물로써 혹은 문학적인 정서교육에 작으나마 도움이 될가하여 그 노래들을 모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하여 띄어쓰기와 한자 폐지와 또는 약간의 사정된 표준말로 고치어 편집한 것이다. (중략) 사, 만일 이 책에 실리지 않은 작가와 작품이 있다 하면 그것은 재료의 불충분함에서 온 것일 것이니 널리 양해하여 주기 바라며 다음 증보판을 반드시 내어 실로 현대조선동요의 대집성을 마련하여서 새날의 기뿜을 축하하는 기념비적 가치를 나타내이기에 힘쓰려한다.
그가 『조선동요전집』을 엮은 것은 어린이들이 일제 치하에서 마음껏 부르지 못해 주린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노래가 있다’는 것과 ‘문학적인 정서교육’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서였다. 당시 그는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맞춰 표기하였는데 조선어학회의 정열모와 국어문화보급회의 이갑두 등이 교열을 보았다. 『조선동요전집』1권에는 광주의 동요작가요 시인이었던 김태오의 작품도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애초에 350여 편의 동요와 작가로 백여 명을 수록하여 『조선동요전집』을 4권으로 나누었고, 따로 전래동요를 한 권에 모아 발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가 집대성하고자 하였던 『조선동요전집』2권, 3권, 4권과 『전래동요집』은 발간을 보지 못한 미완의 노래로 남았다. 5. 못 다 부른 노래 광주전남 최초의 신춘문예 출신 동화 작가이자 조선의 동요를 한자리에 모아 동심으로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었으나 그의 뛰어났던 문학적 재능은 남북분단으로 인해 정지되고 말았다. 호남의 이상향이었던 영광, 그곳을 고향으로 둔 작가들이 선택한 또 다른 그곳,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이 그들의 이상향이었다면 거기서도 여전히 못다 쓴 이야기를 썼는지, 알 수 없지만 늘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아동문학가 정태병, 정종의 그리움만이 아니다. 쉼터에 앉아 70여년 전의 추억들을 떨쳐버리고 오르기 시작하면 문득문득 「추풍부」의 정태병 동생 생각이 간절하다. 지금의 이 길에 혼자가 아니고 분명 둘이였을 것이고 천하 모두가 아니더라도, 나의 삶은 복이 넘치는 삶이 되었을 것이다. 나의 지난 반세기는 그를 그리워하다 지친 반세기였다. 그가 만약 고향에 살아 있었다면 나는 더 빨리 귀향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삶은 더욱 살찌고 더더욱 영글었을 것이다. 그는 또 북에서 얼마나 그리워하고 고향의 산하들을 꿈에서나마 얼마나 자주자주 보았을 것이다. 「추풍부」의 배경이 된 영광의 농촌풍경을 꿈에선들 어찌 안 보았을까? 비단 가을이 아니더라도 일년 열두달 「추풍부」를 또 얼마나 목놓아 불렀을까? 그것도 혼자 몰래몰래 말이다.6)
영광 사람들의 “고향의 노래”, “학병으로 징용으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의 괴로운 심정을 달래주”었던 노래 「추풍부」는 정태병이 썼다. 고향의 석양이 되고, 구름이 되고, 달이 되어 목 놓아 부르고 있을 모르는 시 「추풍부」, 그가 다 부르지 못한 노래는 영광 사람들이 부르고 있으니 여전히 그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이리라. 「추풍부」을 옮긴다.
들菊花 피인 언덕 송아지 울음 소리
영광 불갑저수지 수변공원의 <추풍부 노래비> 1) 정종, 『故鄕의 詩人들과 詩人들의 故鄕』, 동남풍, 1995.
2) 정종, 『내가 사랑한 나의 삶』상·중·하, 동남풍, 1999. 3) 동아일보, 1938. 5. 8. 4) 정종, 「우정 정태병과 한편의 시」,『故鄕의 詩人들과 詩人들의 故鄕』, 동남풍, 1995. 203쪽. 5) 정태병 엮음, 『조선동요전집』, 신성문화사, 1946. 6) 정종, 『내가 사랑한 나의 삶84 』(하), 동남풍, 1999. 107~108쪽. 글쓴이 이동순 조선대학교 교수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
||||||||
로그인
회원가입


손이를 첫슴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