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역동의 새해에 마주한 말 그림 윤덕희의 <마상미인도> 게시기간 : 2026-02-1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2-09 17:4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한 폭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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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해를 맞아, 말 그림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조선시대 말 그림으로 잘 알려진 윤두서와 그의 아들 윤덕희의 작품을 함께 살펴보았다. 여러 작품 가운데 윤덕희의 〈마상미인도〉에 시선이 갔다(그림 1). 흔히 새해에 어울리는 말 그림이라 하면, 으레 희망찬 새출발에 대한 사회적 투영을 담은 역동성이나, 거침없는 질주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호남 화가의 말 그림 중 여기에 부합하는 그림을 꼽는다면 김익주의 <군마도(群馬圖)>가 차라리 더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그림 2). 그럼에도 윤덕희의 그림을 선택한 이유는 푸른빛이 도는 말 위에 앉아,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응시하고 있는 여인에 더 눈이 갔기 때문일 것이다. 윤덕희는 이 작품과 함께 <마정상도(馬丁像圖)>를 1736년 아들 윤용(尹愹, 1708-1740)에게 그려주었다. 푸른 빛의 말과 뒤를 돌아보는 여인 윤덕희는 말 그림으로 유명했다. 물론 더 유명한 사람은 조선 후기 화단에 사실주의적 기틀을 마련한 아버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이다. 윤두서의 장남인 윤덕희는 윤용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자는 경백(敬伯)이다. 호는 낙서(駱西), 연옹(蓮翁), 연포(蓮圃), 현옹(玄翁) 등을 썼다.1)
잘 알려진 대로, 윤덕희는 가문의 화업을 계승하며 사대부 화가로서 독자적인 위치를 구축했다. 그는 윤두서가 수집한 중국의 화보와 서구적 음영법, 그리고 정밀한 관찰에 기반한 사실적 묘사를 학습하며 화업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아버지의 화풍을 전수하여 전통적이고 중국적인 소재의 도석인물(道釋人物), 산수인물, 말 그림 등을 잘 그렸다.
그림 2 김익주, 〈群馬圖〉,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32.0×63.5cm, 국립광주박물관 또한 부친의 유작과 화론을 정리하고 보존하고, 윤두서의 화풍만이 아니라 회화 창작 태도와 이념, 주제의식 등 여러 면에서 윤두서를 계승하여 해남 윤씨 가문이 3대에 걸쳐 화업을 이어가는 데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윤두서와 윤덕희 부자의 말 그림은 명성이 높았다. 중국의 당대(唐代) 한간(韓幹, 약 720-780), 북송 이공린(李公麟, 약 1041-1106), 원대 조맹부(趙孟頫, 1254-1322), 조옹(趙雍, 약 1289-약 1362) 부자로 이어지는 말 그림의 전통을 수용하여 이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이에 대해서 18세기 많은 문인들이 기록을 남겼는데, 이규상(李奎象, 1711-1777 이후)은 “윤두서와 윤덕희의 말 그림이 온 나라에 이름을 떨쳤다”고 하였으며, 유경종(柳慶種, 1714-1784)도 “우리나라 말 그림은 윤두서가 제일이다”라고 평하였다. 『해동호보(海東號譜)』에는 “윤덕희는 그림으로써 이름이 났는데, 말을 더욱 잘 그렸다”고 하였으며, 정약용도 “근세의 윤두서의 인물과 낙서(윤덕희)의 말이 모두 그 묘를 떨쳤다”고 하였다.2)
그림 3 윤두서, <유하백마도>, 《윤씨가보》, 비단에 수묵채색, 32.2×40cm, 녹우당(『공재 윤두서』, 국립광주박물관 도록2014, 107쪽 도판 37) 윤두서는 ‘인물이나 동물을 그릴 때 반드시 종일토록 주목하여 진형(眞形)을 체득한 다음에야 붓을 들었다’고 하는 창작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고씨화보(顧氏畵譜)』에 수록된 한간의 말 그림을 참고하여 제작한 작품들 중 가장 먼저 주목되는 <유하백마도>는 버드나무 아래 매어 있는 흰말을 소재로 그린 것이다(그림 3). 말 특유의 탄력적인 몸매와 근육구조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보여준다. 세밀한 붓으로 그려진 부드러운 갈기와 꼬리털의 촉감, 그리고 담박한 색채를 엷게 여러 번 덧칠하여 나타낸 말의 윤택한 질감과 생동감이 탁월하다. 고전적 작품들을 범본삼아 여기에 직접 체득한 탁월한 사생력으로 사실성과 자연미를 획득한 윤두서의 화풍은 윤덕희에게 이어졌다. 윤덕희 역시 아버지 못지않은 정밀한 묘사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윤덕희는 말과 인물을 함께 다룬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는데, <마상미인도>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윤두서와 윤덕희의 말 그림이 온 나라에 이름을 떨쳤다”
그림 1-1 윤덕희, <마상미인도>, 말부분 <마상미인도>는 아무런 배경 없이 말과 인물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렸다. 우선 화면 왼쪽 상단에 “병진년 여름 둘째 아들 용에게 그려준다”는 내용의 관지와 ‘회심루(會心樓)’라는 윤덕희의 당호 백문인과 윤덕희의 자인 ‘경백’의 주문인이 찍혀 있다. 이 작품은 아들 윤용이 1735년에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자 윤덕희가 이를 축하하는 의미로 아들이 좋아하는 말 그림을 정성을 들여 제작해 선물한 것으로 추정한다. 둥글게 등을 구부리고 얌전히 여인을 태운 말은 갈기털이 말끔하게 손질되어 있다(그림 1-1). 눈망울이 크고 유순해 보여 여인이 타기에 알맞게 보인다. 말의 고삐와 안장은 분홍색과 파란색 문양으로 우아하게 장식되어 있다. 말의 몸에는 푸른색의 동그란 문양이 연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말은 송나라 때 어마(御馬)를 기르는 천사감(天駟監)에 있던 다섯 필의 서역 명마를 그린 이공린의 <오마도> 중 ‘봉두총(鳳頭驄)’과도 유사하다(그림 4). 윤덕희는 가는 선으로 말의 형태를 그린 다음 윤곽선 주변에 가볍게 색을 칠해 입체감을 주었다. 필선의 기능을 극대화하여 말의 자세와 형태에 따른 근육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걷는 말의 자세와 굽어진 목선, 그리고 꼬리와 가까운 부분에 구불구불한 선 처리 등은 아버지 윤두서의 <기마감흥도>에서 그 전형이 보여 가전된 화풍으로 생각된다(그림 5).
그림 4 이공린, <五馬圖卷> 부분,
그림 5 윤두서, <騎馬酣興圖> 부분, 말을 그린 선이 자연스럽게 화면을 상하로 나누면서 화면의 위쪽은 인물에 시선이 집중된다(그림 1-2). 중국 미인의 용모를 갖춘 여인은 양 손으로 요염하게 고삐를 잡고 있으며, 상체를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 뒤쪽을 향하고 있다. 몸은 거의 정면이지만 얼굴은 4분의 3면에 가깝다. 검은 머리카락과 흰 피부를 가진 여인은 길고 가는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떴다. 코는 오똑하며 입술은 작고 붉은, 전형적인 미인이다. 머리에는 흑색 두건을 썼으며, 꽃문양이 그려진 보라색을 띠는 내의 위에, 역시 문양이 있는 흑색 겉옷을 입었다. 소매는 고삐를 잡을 때 펄럭이지 않도록 분홍색 끈으로 동여맸다. 비단옷에 걸맞게 안장과 여러 가지 마구도 화려하게 갖추었다. 이국적인 풍모의 말과 미인을 그린 호사적인 그림으로, 인물과 말 그림에 뛰어났던 윤덕희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말과 여인을 주제로 그린 예는 중국의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사, 문학 속의 등장하는 여성 인물은 대체로 미인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송나라 때 채문희(蔡文姬)를 그린 <문희귀한도(文姬歸漢圖)> 또는 <문희별자도(文姬別子圖)>라고도 불리는 그림과, 당나라의 유명한 미인인 양귀비를 그린 <양귀비상마도(楊貴妃上馬圖)>, 그리고 한나라 때 <왕소군도(王昭君圖)> 또는 <명비출새도(明妃出塞圖)> 등이다.3)
그림 1-2 윤덕희, <마상미인도>, 여인부분 윤덕희가 그린 <마상미인도>는 어떤 고사를 담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마상미인도>의 미인이 누구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먼저 <문희귀한도>의 경우 남송대 이당(李唐)과 진거중(陳居中)이 각각 그린 작품이 남아 있다. 한나라 때 흉노족에게 포로로 끌려갔던 문희가 흉노족장의 부인이 되어 자식까지 낳고 살았으나 후에 모두 버리고 한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광활한 산수를 배경으로 유목민의 천막 앞에 문희와 아이들, 남편 좌현왕, 시자(侍者)들이 이별을 슬퍼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4) 이공린과 조맹부가 남긴 <명비출새도>는 한나라 원제 때의 궁녀였던 왕소군을 궁정화가가 그녀의 초상을 추하게 그려 흉노로 시집보내졌다던 왕소군이 한나라 궁궐을 떠나 흉노 땅으로 떠나는 모습이다. 이들 작품에서 왕소군은 말을 타고 비파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5)
그림 6 강희언, <소군출새도>, 18세기 강희언(姜熙彦)은 윤두서와 윤덕희의 영향을 받았던 화가로, 그가 그린 <소군출새도>에서도 말 위의 여인이 비파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그림 6). 마지막으로 전선(錢選, 1235–1305)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양귀비상마도>는 말과 양귀비를 총애했던 당 현종의 고사로, 당 현종이 양귀비를 위해 명마를 하사하고 양귀비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오르는(上馬)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현종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윤덕희가 그린 여인은 비파를 지니고 있지 않고, 이별의 슬픔을 보이지도 않으며, 풍만하고 화려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머리 위에 특이한 모자를 쓰고 무늬가 빽빽한 비단옷을 입고 있는, 명대 혹은 청대의 미인도를 수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작품이 전하지는 않지만 윤덕희는 <마상미인도>를 그리기 전 1732년에도 미인과 말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윤덕희가 남긴 「題自寫畵障」의 제화시에, “준마는 나는 듯이 가는데, 휘하여 말고삐를 당기네. 어디서 기생과 한바탕 놀고 돌아갈까, 석양에 봄 버들가지 늘어졌네. 백설같이 흰 공골말에 옥으로 꾸민 장식 끈, 미녀의 비단 치장이 돋보이네. 말은 흐르는 구름처럼 달리고, 사람은 제비처럼 가볍네.6)”라고 하였다. 봄날 이른 저녁 술에 취한 인물이 비단 치장을 한 미인이 타고 있는 화려한 장식의 흰말을 끌고 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미인은 기생으로 보인다. 요컨대 윤덕희는 정절과 미모를 다루면서도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는 전통적인 고사여인도, 즉 채문희나 왕소군, 양귀비가 아닌, 그보다는 회화적 주제로서 ‘미인’을 말과 함께 등장시켜 <마상미인도>라는 독자적인 미인도를 완성했다. 그의 <마상미인도>는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고 ‘말을 탄 여인’ 그 자체에 집중하여, 감상자가 미인의 자태와 말의 묘사를 동시에 즐길 수 있도록 한 풍속적 미인도의 성격이 더 짙다고 할 수 있겠다. 해남 윤씨 3대 화맥을 잇는 단단한 가교 윤덕희는 아버지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따른 연유로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윤두서의 필력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산수화에서는 다양한 화보를 통해 전통화풍을 계승하고 남종화법을 습득하였으며, 아울러 도담(島潭)의 실경을 그린 <도담절경도(島潭絶景圖)>와 같은 진경산수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신선사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8세기 전반기 화가 중 가장 많은 도석인물화를 남겼다.
그림 7 윤두서, <미인독서도>, 비단에 채색, 61×40.7cm, 개인
그림 8 윤덕희, <독서하는 여인>, 비단에 담채, 20×14.3cm, 서울대학교박물관
그림 9 윤용, <협롱채춘도>, 종이에 수묵, 27.5×21.2cm, 간송미술관 윤덕희는 윤두서를 이어 풍속화를 정착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된다. 윤두서와 윤덕희 풍속화를 볼 수 있는 예로 <미인독서도>를 들 수 있다(그림 7, 8). 이 두 작품은 구도와 소재가 거의 비슷하지만, 윤덕희의 작품에서 독서를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조선 양반의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현실적인 면모를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들 윤용은 윤두서와 윤덕희로부터 그림의 재능을 이어받아 가법을 계승하였으며, 20대부터 화명이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가전 화풍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개성적인 필력을 발휘하였는데, 남태응(南泰膺)은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윤덕희의 아들 윤용 또한 재주가 빼어나 앞으로 나아감을 아직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다만 그 성공이 어떠할지 기다릴 뿐이다.”라고 평하였다.7)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당대(當代)에 시화(詩畫)에 재능을 인정받았다. 남은 작품이 많지 않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산수화·풍속화·도석인물화·초충·화조화 등에 두루 재능을 보였다. 특히 윤두서가 그린 <채애도>처럼 나물을 캐는 조선 여인을 그린 <협롱채춘도(挾籠採春圖)>를 남겼다(그림 9). 아무 배경없이 화면 하단에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여인은 왼손에 날이 긴 호미를 들고, 반대편 옆구리에 바구니를 들었다. 화면 중앙에 서 있는 여인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머리에 쓴 수건은 단단히 묶여 있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무릎께까지 걷어올린 속바지 아래로 튼실한 종아리를 드러내었다. 할아버지의 <채애도>에서 더 발전된 모습이다. 이처럼 해남 윤씨 일가의 회화는 윤두서에서 시작해 윤덕희, 윤용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19세기 소치 허련(1809-1892)을 거쳐 근대 호남화단으로 확장되는 뿌리라 할 수 있다. 특히 허련이 근대 호남화단에 끼친 영향이 지대한 만큼, 그 정신적·예술적 기반으로서 해남 윤씨 가문의 서화 전적이 지닌 의미 또한 함께 조명된다. 이는 윤두서의 유작과 화론을 정리·보존했을 뿐 아니라, 그의 화풍을 넘어 창작 태도와 이념, 주제의식까지 계승하고 확장하여 가문 3대에 걸친 화업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한 윤덕희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 윤두서와 윤덕희에 대해서는 차미애, 「낙서 윤덕희의 회화 연구」(홍익대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연구」(홍익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를 참조하였다.
2) 민족문학사연구소 한문분과 옮김, 『18세기 조선 인물지 幷世才彦錄』, 창작과 비평사, 1997); 柳慶種, 「三馬圖贊」, 『海巖稿』 卷4, “東土畵馬恭齋第一” ;『海東號譜』, “亦以畵名尤善畵馬”, 吳世昌, 東洋古典學會 譯, 『國譯 槿域書畵徵』 하권(시공사, 1998, 677-678쪽), “近世尹恭齋之人物駱西恭齋子德熙之馬皆極其妙”; 丁若鏞, 「題家藏畫帖」, 第一集 詩文集 卷14, 『국역 다산전집』, 민족문화추진회, 1983), 차미애, 앞의 논문(2010), 254-261쪽 각주 재인용. 3) 미인도에 대해서는 고연희, 「美人圖의 감상코드」, 『대동문화연구』 58(2007), 303-338쪽. 4) <문희별자도>에 대해서는 유미나, 「오랑캐의 포로 그리고 실절(失節) -<문희별자도(文姬別子圖)>를 보는 조선후기 문사들의 시각」, 『石堂論叢』 52(2012); 1-38쪽; 문선주, 「중국 <文姬歸漢圖>와 <明妃出塞圖>의 조선유입과 수용의 의미」, 『미술사학연구』제287호(한국미술사학회, 2015), 29-56쪽 참조. 5) 한정희, 161쪽. 도판 75,76 참조. 6) 『溲勃集』 上卷, 「題自寫畵障」(1732), “鐵駿去如飛 醉挽紫遊韁 何處買笑歸 春柳暗斜陽 雪騧玉絡頭 妖姬錦裝明 馬如流雲轉 人如紫燕輕”, 차미애, 앞의 논문(2001), 172쪽 각주 453 재인용.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참고문헌 국립광주박물관, 『공재 윤두서』, 국립광주박물관·광주MBC·해남 녹우당, 2014.
고연희, 「美人圖의 감상코드」, 『대동문화연구』 58(2007), 303-338쪽. 문선주, 「중국 <文姬歸漢圖>와 <明妃出塞圖>의 조선유입과 수용의 의미」, 『미술사학연구』 제287호, 한국미술사학회, 2015. 차미애, 「낙서 윤덕희의 회화 연구」, 홍익대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차미애,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연구」, 홍익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한정희, 「중국의 말 그림」, 『한국과 중국의 회화』, 학고재, 1999. 홍선표, 「말그림의 역사」, 『조선시대회화사론』, 문예출판사, 199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글쓴이 김소영 한국학호남진흥원 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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