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산송(山訟): 조상 계신 산이 돈줄일세 게시기간 : 2026-01-28 07:00부터 2030-12-23 21:21까지 등록일 : 2026-01-2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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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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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송(山訟)이란 산을 놓고 소송을 벌이는 일이다. 조선시대에 어떤 집안이나 개인들은 산을 골라 집안의 묘역으로 만들었다. 집안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 이곳에 묻었다. 지금 선산(先山), 선영(先塋)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것이다. 무덤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분산(墳山)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무덤만 있는 게 아니다. 무덤 주변 또는 무덤이 없는 곳에는 나무를 심어 길렀다. 이것을 송추(松楸)라고 부른다. 조상 계신 곳이므로 후손들에게는 경건한 장소였다. 이렇게 분산이 생기면 그 장소는 어떤 집안 또는 아무개네 선산이 된다. 다른 집안, 다른 사람은 여기에 무덤을 만들 수 없다. 만약 다른 집안 사람이 여기에 무덤을 쓰면 소송거리가 된다. 누군가 먼저 차지한 산에 다른 이가 나중에 몰래 무덤을 만드는 일이어서 산을 두고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후손은 조상이 편하게 있도록 보호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다른 지점에서분산을 바라보면, 그 산이 꼭 조상 계신 경건한 장소만은 아니다. 무덤도 있지만 잘 자란 나무들이 가득하다. 소나무가 많으면 보기도 좋다. 더 좋은 건 그 소나무가 한 재산거리라는 점이다. 재산거리가 있으니 다툼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또 산을 놓고 송사가 생긴다. 소나무가 붙인 다툼 1841년 봄. 영광 입석마을에 살던 신항업(辛恒業)이 소나무를 팔았다. 입석마을 뒷산 곧 분토산에 있던 나무다. 그 산에는 400여 년 전 영월 신씨로서 영광에 처음 정착한 신사구(辛斯龜)와 신항업의 11대조 및 이하 자손들의 묘가 있었다. 1841년 2월 즈음에 오정구(吳廷求)라는 사람이 와 땔감용 나무를 사고 싶다고 했다. 법성포 창고 수리와 향교의 대성전(大聖殿)을 중수하는 데에 기와가 있어야 했고, 기와 구울 땔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신항업은 대성전을 중수하는 일에 도움이 될까 하여 벌레 먹어 재목감이 안 될 나무들만 골라 베었다. 소나무 값은 20냥이었다. 영월 신씨 종인인 신복현(辛復鉉)이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신항업에게 와 따졌다. 소나무가 있던 산은 영광에 처음 정착한 선조가 묻힌 땅이므로 도선산(都先山)이라고 주장했다. 곧 문중의 땅이므로 그 땅에서 나온 소나무를 판 값은 문중이 가져야한다고 했다. 신항업이 거절하자 신복현은 신항업을 ‘범금(犯禁)’ 명목으로 수영(水營)에 고소했다.
(왼쪽)1684년(숙종 10)에 제정된 송금사목(부분). 『비변사등록』 숙종 10년 2월 30일조에 실림. 조선시대에 소나무는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자원이었다. 궁궐을 포함한 각종 건물을 짓거나 전함(戰艦)이나 병선(兵船), 세금으로 낸 곡식이나 기타 화물을 실어나르는 조운선 등을 만드는 데에 모두 소나무를 썼다. 땔감 등 일상 생활 용품으로도 필수품이었다. 나라에서 일정 장소를 선택해 소나무를 기르며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산(禁山)을 정했고 소나무를 함부로 베는 일을 금지하는 금송(禁松) 정책도 시행했다. 비록 개인이 소나무를 기르는 사양산(私養山)이라도 벌채를 맘대로 하는 일을 금지했다. 이를 어길 때에는 곤장 맞고 먼 곳으로 보낸다고 했다. 신복현이 보기에 신항업은 ‘소나무를 제멋대로 벌채한 죄’를 지은 범법자였다. 결국 신항업은 세 차례나 곤장을 맞고 옥살이도 했다. 신복현은 또 소송했다. 신항업이 판 소나무는 관곽이나 서까래, 기둥으로 쓸 만큼 좋은 재목이었고 값도 200냥이며, 그 돈은 마땅히 신씨 문중이 가져야한다고 주장했다. 관청에서는 반반씩 나누라고 했다. 100냥을 신복현에게 주어 문중에 전달하라고 처결했다. 이번 소송에서도 신항업은 반쯤 진 셈이었다. 이 소송은 1841년 윤3월 초에 시작하여 6월 즈음 마무리된 듯하니 대략 4개월 정도 계속되었다. 신복현 쪽이 원고, 신항업 쪽이 피고였다. 신복현의 소송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841년 8년 즈음 홍문 중수하는 데에서 일하는 도목수가 신항업을 찾아와 큰 소나무 2그루를 가져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2그루를 자를 때 그 옆에 있던 소나무 8, 9그루 정도가 넘어졌다. 도목수는 처음 계약한 2그루와 넘어진 소나무까지 몽땅 가져가 버렸다. 이 사실을 안 신복현은 또 소나무판 값을 달라고 했고 관청에도 고소했다. 신항업은 6냥을 신복현에게 주어야 했다. 대신 고소하고 처결하는 과정에서 신복현은 관장을 핍박한 죄로 먼 곳으로 유배 갈 처지가 되었다. 1842년 12월 초. 이번에는 신항업이 신복현을 고소했다. 12월 8일에 영광 동부면 면임인 박정록(朴政祿)이 관청의 명령을 받고 산에서 소나무 4그루를 베어가겠다고 했었다. 와탄진 진선 개조에 소나무가 필요하다고 했다. 신항업은 15량을 받기로 하고 허락했다. 당시 아내가 아파서 벌채 현장에 못 갔었는데 4그루 외에 7, 8그루를 더 잘라 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항업은 신복현이 이 일에 관여했다고 여겨 신복현과 박정록을 상대로 소송했다. 4그루와 허락없이 베어 간 7, 8그루 값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송도 1843년 3월초까지 1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고 했건만, 입석마을 뒷산인 분토산 소나무는 싸움은 붙이고 흥정은 말리고 있었다.
1842년 전라우수영의 수군절도사 첩정(牒呈). 신복현이 당시 25세이며, 신항업이 도선산에 있는 소나무를 맘대로 베어 팔아 분함을 못 이겨 소송했다는 내용, 신복현이 관장을 핍박한 일로 먼 곳으로 유배가게 되는 처결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산은 돈줄 신항업과 신복현은 같은 영월 신씨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거의 3여 년에 걸쳐 번갈아가며 소송을 걸었다. 신복현은 1841년에 열 서너 차례나 소장을 냈을 정도였다. 그들이 걸고 싸웠던 산에는 영광에 처음 정착한 신사구(辛斯龜)를 포함해 그들의 조상들이 묻혀 있다. 신항업과 신복현은 신사구 후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을 놓고 그렇게 치열하게 다툰 까닭은 무엇일까.
처음에 저의 집안 사람인 신복현, 신기순 등은 신항업이 개인 소유 산에 있는 나무를 벤 일로 수영에 고소하였습니다. 명목은 선조를 위하는 일이며 문중에 보탬을 주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거짓으로 수영에 고소하고 관가를 속이면서 여러 달 서로 다투었습니다. 성주께서 소송을 그치게 하려고 은택을 내리신 바 족친 사이에 서로 소송하며 다투는 습속이 놀랄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선조들을 위하고 문중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의리를 신항업으로부터 취할 수 있도록 100냥의 돈을 징출하여 신복현 등에게 지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복현 등이 돈을 받는 날 한 글자라도 적은 문서도 없었거니와 사사롭게 혼자 먹어버려 자신을 살찌우는 자산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명분은 선조를 위한다는 것이었지만 반대로 사사롭게 자기만을 위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문중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명분을 댔지만 실제로는 의롭지 않은 욕심입니다.
1841년 신태명의 이름으로 제출한 소지. 신복현이 100냥을 문중에 주지 않고 가로챘으므로 처벌해달라는 내용이다. 이는 신씨 집안 문유사 신광섭(辛光燮) 및 종손인 신항유(辛恒惟), 신태명 등 여러 명이 연명하여 제출한 소지(所志)이다. 소지는 관청에 올리는 글로 일종의 소장(訴狀)이다. 소지 내용에 의하면 신복현은 신항업에게서 받은 100냥을 문중에 전달하지 않고 중간에 가로챘다. 선조와 문중을 위한 일이라며 소송했지만 사실은 돈을 챙기려는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신복현은 돈을 받았다는 영수증조차 써 주지 않았다. 후에 신항업이 이를 문제 삼자 신기찬이 문서를 갖고 도망쳤다는 말로 둘러대기도 했다. 신복현에게 조상이 묻힌 땅은 돈을 만들어내 챙길 수 있는 좋은 구실거리였다. 세상에는 남의 눈을 속이는 것도 있고 남을 속여가며 재물을 빼앗는 습속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집안 사람인 신복현, 신기순, 신기원 같은 사람과 같겠습니까. …(중략)… 지난 해(1842년) 12월에는 동부면 와탄진의 진선을 개조할 때 신복현 등이 면임과 짜고 큰 소나무 12그루를 저의 증조모와 조부의 분묘 지역에서 베어가면서 그 돈을 사사롭게 혼자 먹어버렸습니다.…(중략)…또 지금은 본읍의 교방청을 개조할 때 신복현 등이 그 틈을 타서 도목수와 부화뇌동하여 대송(大松) 24그루를 베어갔습니다. 도목수도 저자들의 간사함을 모르지 않으나 함께 모의한 것은, 대개 소나무 값 1냥으로 5, 6량 하는 소나무를 살 수 있으므로 돈 3전이라면 2,3량 되는 소나무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익을 저들끼리 나누고 제게는 한 푼도 준 것이 없었습니다. …(중략)…자세히 헤아려서 전후로 벤 43그루의 소나무 값을 추징하여 주십시오.
이는 1843년 5월에 신항업이 신복현을 대상으로 소송을 낸 내용이다. 신복현은 1842년 말에 와탄진 진선 개조한다는 명목으로 12그루, 1843년에 교방청 개조한다는 명목으로 24그루를 베어 갔다. 그런데도 여전히 신항업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더구나 도목수와 짜고 비싼 소나무를 싼값에 사서 이득을 챙기는 수법도 쓰고 있었다. 5, 6량짜리 소나무를 1냥으로 사고 그 차액을 챙겼다고 했다. 신복현과 신항업은 돈 받아내는 일로 소송했다. 다투게 된 원인은 돈이었다. 그 돈은 소나무에서 나오고 소나무는 조상들이 묻힌 산에서 나왔다. 신복현에게도 신항업에게도 그 산은 돈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쌓인 원한이 키운 폭력
산송은 일종의 돈 투쟁이다. 더 큰 문제는 폭력으로 번진다는 점이다. 1841년 봄, 여름 사이에 진행된 소송에서 신항업은 범금 명목으로 곤장 맞고 옥살이를 했다. 원한이 없을 수 없었다. 이후 신복현 쪽에서 돈 100냥을 받으러 사람을 보냈을 때 신항업은 자식과 조카들을 불러 심부름 온 이를 때렸다. 1842년 2월 즈음에는 신항업이 신씨 집안 문유사인 신규현을 발로 차 거의 죽게 만들기도 했다. 신복현 쪽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는 신기순과 신기찬 등을 시켜 신항업 집에 쳐들어가 그 가족들을 때렸고, 말안장 및 여러 기물들을 훔쳤다. 1843년 2월에는 신항업 집의 농우까지 빼앗아갔다. 마을 사람이 신항업 집의 말을 빌려 혼인식에 가는데 길을 막고 그 말을 빼앗는 바람에 다른 사람 혼인도 망쳐 놓은 일도 있었다. 조선시대 소는 큰 재산이었다. 특히 농사짓는 데에 꼭 필요했다. 홍만선의 『산림경제』에 소의 역량을 서술한 대목이 있다. ‘소 한 마리는 7명의 노동력을 대신할 수 있다.’거나 ‘밭을 개간할 때 여러 명이 여러 날에 할 일을 소 한 마리만 있으면 하루만에 끝낼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소가 없으면 모내기, 밭갈기, 개간하기 등을 할 수 없고 그렇다보면 일년 농사는 망치고 결국 추수할 것이 없어 굶어죽기 십상이다. 말도 요긴하기는 마찬가지다. 제주도와 서북지방에서는 농사에 말을 썼고 운송 및 교통수단으로서 매우 중요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중국 조정에 바치는 별마(別馬) 상등급은 한 마리당 목면 50필, 중등급의 수말, 암말은 쌀 10섬이었다. 말을 빼앗겼으니 신항업은 적어도 쌀 10섬은 잃었다.
1843년 5월에 신항업이 제출한 소지. 1841년부터 1843년까지 진행된 소송 내용을 간략히 서술했다. 신항업 쪽과 신복현 쪽이 서로 치고받고 싸운 건 원한이 쌓여서였다. 조상 묘역인 산의 소나무로 인해 1841년 봄에 시작된 소송은 1843년까지 폭력을 불러왔다. 시간이 갈수록 원한이 켜켜이 쌓이고 마침내 폭력으로 번졌다. 조상 묻힌 산의 소나무가 부추긴 다툼은 원한을 품게 했고 원한은 폭력을 낳았다. 산송의 끝 장면이다. 이토록 싸우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사람 따라 달라지는 산 신항업과 신복현은 영월신씨 출신이다. 영광에 처음 정착한 이는 신사구(辛斯龜)라고 한다. 신사구는 영광군수를 지낸 신보안(辛保安)의 둘째 아들로 영광에 살던 한이(韓彛)의 딸과 결혼하여 영광에 뿌리를 내렸다. 이후 자손들은 각각 영광의 도동마을과 입석마을에 살았다. 그리고 입석마을 뒷산인 분토산을 집안 묘역으로 삼았다. 신사구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대가 내려가면서 신씨 집안 사람들의 무덤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고 이 산에는 신항업 쪽 조상들의 무덤이 많았다.
저의 13대조가 본군 도내면 도동촌에 와 살았고 12대조에 이르러 아들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저의 종파로서 도동촌에 살았고, 둘째 아들은 저의 11대조이고 입석촌에 살았습니다. 도동과 입석은 길 하나 사이입니다. …(중략)…입석촌 뒷산 기슭이 3개인데 그 중 가운데 기슭에 13대조와 11대조 무덤이 있어 여러 자손들이 묻혔습니다. 이는 저의 선산(先山) 언덕입니다. 그런데 서쪽 기슭은 저의 11대조 이후 자손들이 대대로 무덤을 써서 400년 동안 지켜왔기에 다른 종인(宗人)의 무덤이 없으니 저의 사산(私山)입니다. 또 동쪽 기슭은 저의 11대조가 와서 살던 옛터인데 이후에 점차 아래로 옮겨오면서 살았고 그 옛터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증조모와 조부의 무덤 바로 아래쪽입니다. 이런 이유로 산의 동쪽과 서쪽 기슭은 저의 집에서 금양(禁養)했고,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직접 나무를 심고 길러내면서 정성을 쏟았습니다. 간간이 벌레 먹고 굽은 나무는 팔기도 했는데 종손이나 문중에서 말한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의 집에서 사사로이 심고 길러 종중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1842년 6월에 신항업이 암행어사에게 올린 소지. 이미지출처:한국고문서자료관https://archive.aks.ac.kr/ 1842년 6월에 신항업이 암행어사에게 올린 글이다. 분토산 기슭이 3개인데 가운데 기슭은 13대조와 11대조 무덤이 있어 신씨 집안 선산으로 썼다고 했다. 서쪽 기슭은 11대조 이후 신항업 쪽 선조들의 무덤만 있고 다른 종인의 무덤이 없으므로 신항업 집안 산이라는 주장이다. 동쪽 기슭은 11대조가 살던 장소였고 이후 자손들이 번창하자 집터를 아래쪽으로 옮기고 옛 거주터를 묘역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사연에 의하면 산은 하나이지만 산기슭은 셋이다. 신항업 입장에서 보면 가운데만 빼놓고 서쪽과 동쪽 기슭은 신항업의 산이다. 신복현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산으로 봐야하므로 동쪽 서쪽 가릴 것 없이 산 전체가 문중의 산이다. 산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문중 산인지 개인 소유인지 달라진다. 판관도 서쪽 또는 동쪽 기슭에서 벤 소나무 값을 어느 쪽에 주라고 판결하기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1842년 당시 군수였던 조재경이 ‘신씨 문중 소송이 아직도 안 끝났구나. 관청에서 대꾸하기도 피곤하다.’라거나 ‘내가 지금 이임하려고 하니 알 바 아니고 새로운 관리가 오면 다시 소송을 하라.’라고 하며 피했다. 뒤에 온 군수 홍영규는 ‘이쪽 신가든 저쪽 신가든 다시 소송하면 엄형에 처할 것’이라고 처결했다. 한 덩어리 산 안의 경계가 애매하니 판결하기도 까다롭고 머리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말 없는 조상, 시끄러운 후손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는 싸울수록 진흙만 더 묻고 싸워봤자 이로울 데 없다. 신항업은 곤장 맞고 감옥에 갇혔고, 신복현은 먼 곳으로 유배당할 처지에 놓였다가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분토산 소나무 값 때문에 그물에 걸린 복어 이 갈 듯 다투었다. 신복현과 신항업은 모두 신보안과 신사구의 후손이다. 그들의 다툼 소리는 분토산에 있는 조상들 귀에도 다 들렸을 터이다. 땅에 묻힌 조상은 말이 없다. 후손들만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 산’을 돈 나오는 돈샘으로 보았던 것일까. <도움 받은 글>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한국고문서자료관 https://archive.aks.ac.kr/ 신극희(1898), 『영월신씨세보』 『영광속수여지승람(靈光續修輿地勝覺』(1899). 『영광 영월신씨 고문서』, 한국학호남진흥원, 2020. 김대길(1999), 「조선후기 서울에서의 三禁정책 시행과 그 추이」, 『서울학연구』 13, 서울학연구소. 김선경(1993), 「조선후기 산송과 산림 소유권의 실태」, 『동방학지』 79, 연세대국학연구원. 김선경(2000), 「17-18세기 양반층의 산림천택 사점과 운영」, 『역사연구』 7, 역사학연구소. 김영철(2017), 「조선후기 사양산의 송전경영과 갈등양상연구:영광 영월신씨가 소장 고문서를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논문. 방제용(2020), 「조선시대의 정치사회와 산림」, 『산림문화전집』 13, 숲과 문화연구회. 손계영(2018), 「1434년 신보안 처 정씨 분재기 연구」, 『영남학』 66, 경북대영남문화연구원. 원창애(1995), 「조선시대 제주도 마정에 대한 소고」, 『제주도사연구』 4, 제주도사연구회. 이영수(2006), 「조선시대 송정 연구」, 강원대 석사논문. 임경준(2022), 「명초의 말 수급체계와 거래가격」, 『동방학』 46,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전경목(1997), 「산송을 통해본 조선시대 사법제도의 한 특징」, 『법사학연구』 18, 한국법사학회. 정구복(2002), 「19세기 중엽 영광 영월신씨가의 서재계문서」, 『고문서연구』 20, 한국고문서학회.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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