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근현대 시문학] 맑은 눈망울, 동심으로 그린 세상 게시기간 : 2026-01-09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6-01-07 11:1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호남 근현대 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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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길만 걷다 자연이 제 것을 아낌없이 내주듯이 한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는 것일까. 아낌없이 내어준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들여다보면 욕망을 숨기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고 보면 내 것을 나누는 일이 어렵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그것은 인간이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생 한길을 걸으며 자신을 나누며 산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가난하다 못해 생존 걱정할 형편이어서 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한 사람, 그러나 어린이들처럼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그런 사람이 있었다. 화내는 법이 없었고, 서두르는 법이 없었으며 맑고 고요하기만 하였던 그런 사람이 있었다.
김일로, 그는 1911년 2월 2일 전남 장성군 북상면 신성리 24번지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종기로 아호는 ‘한길’이었다. 필명이 ‘일로’인 것은 아명인 ‘한길’을 한자어로 옮긴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다음 해인 1911년에 태어난 그의 부친 김사규는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8년간의 토지 반환청구 소송에 패소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어 김일로는 신교육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시골에서 구학문만 공부하다가 학교라도 나와야겠다는 신념으로 20세 되던 해 무일푼 단신으로 일본으로” 갔으나 학교는 다니지 못하고 “일본어 공부를 한다고 일역된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문학적 소양을 키워 나갔다.1) 무일푼으로 건너간 일본에서의 생활이 만만할 리 없었다. 생활고 때문에 공부는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고 오사카에 정착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일본인 사장은 그를 몹시 총애하였다 하나 조선인의 자존심을 꼿꼿하게 세우며 지냈다. 일본 생활 10년을 접고 해방되기 직전에 귀국해서 전남 해남군 황산면에 정착했다가 목포로 이주하여 문학과 예술을 벗했다. 김일로, 그는 제도교육을 받지도 못한 사람이었지만 아동문학가이자 교육자였으며 시인이었고 서예가였다. 사람을 학벌로 평가하고, 서열화하는 비정한 시대,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 누구보다도 인간의 향기를 품고, 아름답게 산 김일로의 삶과 문학적 여정은 빛나는 모범이다. 생활인이기보다는 예술인으로 한길만 걸었던 그의 길을 따라 걸어가기로 한다. 2. 어린이의 눈망울, 동심을 담다 그가 문단에 나온 것은 한국전쟁이 온 산하를 할퀴고 간 자리에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집 『꽃씨』2)를 내놓으면서다. 처음 동요를 쓰게 된 것은 늦은 나이에 얻은 큰아들의 맑은 눈동자 때문이었다. 아기의 눈을 들여다보노라면 나쁜 것들이라고는 얼씬도 하지 못하는 세계에 빠져들었고 그것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알게 된 순수한 영혼을 담아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김일로의 『꽃씨』는 ‘동시집’이 아니라 ‘동요집’이다. 그가 동요를 쓰게 된 이유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어린이 앞에 알뜰한 이바지를 주고 싶은 게 나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어떤 것을 주어야만 뜻에 맞아 풀어지는 얼굴을 보여 줄 것인가? 나는 지금 어린이 마음이 풀어질 때까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을 저것도 아니라면 다시 다른 것을 골라 주며 이것은 어떠냐하고 그칠 사이 없이 바꿔 줄 수 있는 밑천을 찾아내는 일을 스스로 맡아 즐겁게 생각하며 어린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맑은 얼굴에 꽃송이로 되어나는 웃음을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를 웃기려다가 되려 울리고 만 허물은 입고 만 듯해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나를 찾아내고 말아 입맛이 없기로 이 다음엔 더 한층 조심해서 뜻을 받들가 합니다. 즐거운 웃음이 샘솟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된다면 슬픈 눈물은 보다 더 아름다운 착한 마음의 씨앗이 될 수 있지 않을가 생각합니다.3) 잘 드러나듯이 어린이의 마음에 들 때까지 어린이들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 ‘웃음’을 보기 위해서, 전쟁이 준 “슬픈 눈물”을 “웃음이 샘솟는 희망”으로 바꿔주고 싶어 “어린이의 마음이 풀어질 때까지” 상처 난 마음을 보듬어 주는 동요를 쓰기로 한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을 “간절한 소원”으로 삼았던 만큼 김일로의 삶에서 동심을 빼놓고는 어떤 것도 논할 수 없다. 이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아동이라는 인간상을 재인식하고, 그 인간형성을 뒷받침하려 적극적인 의도”와 “자연과 인간과 사물의 아름다움을 깨닫게”4)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어린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그는 동요와 동시를 쓰는데 전심을 기울였다. 그의 동요 한편을 소개한다. 가루 가루 떡 가루
싸락 눈이 떡 가루 시루 가득 쪄 다가 누구 누구 줄 거나 송이 송이 꽃송이 함박 눈이 꽃송이 치마 가득 받아다 누구 누구 줄거나. 「싸락눈 함박눈」 전문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락이 동시와 동요의 장르를 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는데 동요집 『꽃씨』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시의 생명을 살리고 모든 정서가 밖으로 표출”5)되게 하는 데 기여한 동요집이다. 동요집 말미에는 「노래모음」 악보도 실려 있어 동요에 대한 장르의식이 분명했음을 보여준다. 노래모음은 「인사」, 「토끼」, 「반듸불」, 「봄바람」, 「꽃씨」, 「나룻배」, 「제비」, 「고향」, 「별」로, 이동욱과 윤미자에 의해 작곡되었다.
그는 『꽃씨』를 발간한 이후 그는 1960년도에 전남교육청에 한 달에 두 번씩 「‘꽃씨’노래 선물」을 자비를 들여 제작, 배포하면서 어린이들을 위한 행보는 절정에 이른다. 어린이들의 마음을 맑고 순수하게 유지하기 위한 노래 운동을 전개했다. 교육청 어디에도 그런 행적이 남아 있을 리 없지만 그가 남긴 유품 속에는 교육장의 편지와 각 학교에 보낸 부수까지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혹여라도 배부되지 않은 학교가 있을까 봐 어린이를 세심하게 챙긴 그의 흔적이 가슴을 울린다. 비록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8회로 중단되기는 했지만 『‘꽃씨’노래 선물』은 한 개인이 사재를 털어 동요를 보급하기 위해 애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김일로가 『‘꽃씨’ 노래선물』을 만들어 배포한 이유를 들어보면 그가 어린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생각하고 보면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을 송두리째 안겨 주어야 할 이내 목숨보다 소중한 우리 어린이입니다. 어찌 인색할 수 있겠습니까. 푸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파랗게 자라나는 뜻을 어떻게 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어린이가 소원하는 참뜻을 찾도록 찾아내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마는 그도 아니라면 다시 골라 쉬질 않고 드리기만 하는 일을 스스로 맡아 보람으로 삼았기에 조금도 괴롭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찾아 부르는 사이 슬기롭고 착한 마음의 꽃씨가 우리 어린이 가슴 속에 싱싱하게 자라 환하게 피어난다면 다시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뜻이 같아 모두 맞들어 주신다면 어찌 즐겁지 않으리까.6)
어린이를 위한 그의 행보는 동요집 『꽃씨』 외에도 1984년 9월 18일 생을 마감할 때 까지 200여 편의 동요 동시를 더 발표하거나 남겼다. 어린이들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새로운 글짓기교실』을 펴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김일로는 대일항쟁기의 김태오와 정태병을 잇는 광주․전남 지역 아동문학 2세대로 선구적이었다. 그럼에도 “호랑이 행세를 하는 비겁한 행위 속에서 의식을 구하지 않는 고집 때문에 노장행색이 초란한 일상이었으나 꼬리를 흔들며 따라나서는 강아지 행세가 역겨워 멍에를 걸머진 황소의 끈기를 섬겨”7)온 결벽증 탓에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3. 동시/선시 같은, 새로운 시형의 창조 그는 동요와 동시만 창작한 것이 아니고 특별한 창작으로 많은 독자를 거느렸다. <목포경제신보>에 1975년 7월 14일부터 1978년 5월 8일까지 매주 한 편씩 연재한 작품이 134편이나 된다. 작품은 짧은 시와 수상만 일주일에 한 편씩 쓴 것인데 작가적 역량과 문학적 열정이 없다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연재를 기획한 <목포경제신보>나 매주 한 편씩 창작하여 연재한 김일로의 노력은 시대를 떠나서 이어 배울 자세와 태도다. 현란한 수사로 현혹하지 않은 시에다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는 수상을 더한 특별한 글쓰기는 기다리는 독자의 호응이 열렬했다. 그때의 작품들을 선별한 뒤 7언절구를 덧붙여 간행한 시집 『송산하』8)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려 애쓴 그의 고투가 엿보이는 시집이다. 어떤 장르로 명명하기 어려운 그만의 독특한 시형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형태의 틀에 들어갈 것인지 모”르지만 “철없는 사람의 눈에 비친 것 가슴에 고인 것을 나름대로 짤막하게 옮겨 보았을 뿐”9)이라 하였지만 필자는 그의 시를 ‘단시형 정형시’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의 ‘단시형 정형시’ 한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봄이 뜰 앞에
왔다는데 아직은 꽃도 나비도 이웃하지 않는 긴 긴 하루 遲遲不來待春難 「봄」1 1연 6행에 7언절구 1구로 구성된 이 시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짧은 시상에 담아내고 있다. 이 짧고 간결한 시는 일정의 경지에 이르러야 쓸 수 있다. 뛰어난 직관, 예리한 감성, 자연스런 운율이 녹아 있는 것이 김일로의 단시형 정형시의 특징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이미지화되는 그러나 가볍게 넘어설 수 없는 깊이가 계속 따라붙는다. 단순한 기표 속에 미끄러지는 기의는 그리 단순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단순한 시상의 전개와 쉬운 시어는 동시와 가깝다가도 멀고, 범부의 단순한 생각 같다가도 선의 경지에 다다른 선시 같기도 하다. 그의 시에는 기표가 표상하는 것 이상의 기의 속으로 깊이 침투해야만 그의 사유와 만나게 되는 매혹이 있다. 사실 그의 단시들에는 제목이 없다. 위의 시도 설명의 편의상 작품의 번호를 붙였지만 시집에는 춘하추동의 4부로 나누어 작품 전체에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즉 각각이 독립적인 작품이자 시집 전체가 한 편의 작품인 셈이다. 아래의 시는 그가 그려내는 산하의 모습, 그가 사랑한 산하의 모습을 상상해 봄이 어떠할까 싶어 전문을 싣는다. 동해(東海)라 출렁이는 청탄(淸灘)위에 솟아오는
영롱(玲瓏)한 원광(圓光)의 일출(日出)이 눈부셔라. 합장(合掌)한 이 손위에 눈부셔라. 서운(瑞雲)에 가려진 우람한 산하(山河)속에 목을기일게 느려 홰치는 장닭 한 마리 크낙한 한 소리에 아스라히 이어진 복지삼천리(福祉三千里) 향기로운 아침이 환하게 트이나니. 수향(樹香) 계성(溪聲)이 은은한 이곳은 우리 조국(祖國) 뜻을 모아 꽃을 심고, 노래하며 열매를 따는 어머니 영역(領域)같은 거룩한 이 강토(疆土)에 찬란한 이 아침이 이리 눈부셔라. 사슴처럼 모여 사는 여기, 드높은 가람(伽藍)은 청태(靑苔)낀 석탑에 천년세월(千年歲月)을 두고 정한(情恨)을 새겨오는 의(義)로운 겨레의 일월(日月)이거니, 천추만세(千秋萬歲) 금수산하(錦繡山河) 영광(榮光)의 일월(日月)이 이리 무궁(無窮)하거니. 「訟山河」전문 위 「訟山河」는 금수강산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격랑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작곡된 곡으로 작곡해서 『자연·인간·환경』이라는 맑은 서울을 위한 음악회에서 황의종이 곡을 붙여 국악관현악 반주에 독창으로 연주된 바 있다. 시집 『산수송』의 서시격인 작품으로 우리나라의 자연을 힘차게 아름답게 노래한 빼어난 작품이다.
4. 맑은 향기로 남다 김일로는 어린이 같은 순수함으로 오막살이 한 칸의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았던 것은 초연했기 때문이고 많은 예술인과 예술을 향유했기 때문이다. 특히 화가들과 교류가 깊었다. 김일로와 남농 허건은 목포 문화예술을 이끈 주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잘 통하여 벗하며 지냈고 1959년 3월 1일부터 10일까지 목포문화협회가 주최하고 목포일보와 항도 주간의 후원으로 「허남농·김일로시화전」을 목포 여정다실에서 개최하였다. 이 시화전을 본 수필가 차재석은 “‘시’와 ‘그림’이라는 두 개의 영역을 하나의 ‘다부로’에 공존시킨다는 것이 종래의 동양화의 합작 비슷하면서도 실상은 달라야겠습니다. 그림을 보고 시를 쓰던지 시를 보고 그림을 그리던지 간에 어느 한 편이 설명이나 묘사에 그쳐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굳이 ‘시화’라는 형식을 갖출 까닭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림과 시가 각기 그 기능적인 방법으로 하나의 영역을 위해서 표현의 역까지 올라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시와 그림이라는 양면작전에 곰짝없이 사로잡”10)힐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시인 권일송도 “아경의 화벽에 그 운치를 더하는 단구의 시가! (半含差, 半含嬌態)의 정조미인의 취향이나 작흥을 그 안에 보는 듯하여 우아탈속한 심경으로 현대의 숲에 우는 부엉이의 그 혈루의 내력조차를 곰곰이 캐내어 풀이할 수 있게 높은 고전의 뜻과 은근한 조화를 드리”11)우고 있다 했다.
김일로는 서예가로서의 면모 또한 뛰어났다. 1977년 봄에는 ‘목포경제신보사’가 주최한 「김일로 선생 초대 시전」을 비롯해서 가을에는 서울 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김일로 보벽시전」을 열 정도였다. 꾸미지 않은 서체 독특한 서체에는 천진난만함이 그대로 배어 있고, 그러면서도 뭐라 형언하기 어렵지만 사로잡은 매력이 있다. 한글 서예가 천진난만함이라면, 한문 서예는 진중하고 차분하여 구도적이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 한길을 걸었던 사람이라고 한 것은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해결되었으리라. 특별한 직업, 밥벌이 없이 가난과 청빈을 살았으되 비굴하지 않고 꼿꼿한 선비의 길을 걸은 그의 행보만으로 내어준 삶을 살았다. 특히 어린이를 위한 길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웃음’을 선사하기 위하여 자신은 오막살이에 살면서 『‘꽃씨’노래선물』을 제작 배포한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문학적 출발이 어린이들에게 웃음을 찾아주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평생 시와 노래와 글씨를 벗하며 어린이와 산하를 노래하며 아동문학가로, 교육자로, 시인으로, 서예가로 종횡무진했다. 생활인이기보다 예술인이었던 인간의 향기를 품고 청빈을 살았던 김일로의 맑은 눈망울을 마주하면, 우리도 맑은 눈망울의 어린이가 될 수 있을까. 1) 김일로, 「김일로 선생님을 찾아서」, 『아동문예』, 1979. 2, 85쪽.
2) 김일로, 『꽃씨』, 항도출판사, 1953. 3) 김일로, 「뒷말」, 『꽃씨』, 항도출판사, 1953, 63쪽. 4) 이재철, 『아동문학개론』, 서문당, 1982, 115쪽. 5) 이재철, 『아동문학의 이해』, 형설출판사, 1983, 18쪽. 6) 김일로․이동수․정판길, 「노래선물 「꽃씨」가 지닌 뜻」, 『노래선물 꽃씨』, 1960. 5. 1 7) 김일로, 「청춘은 간직하는 것」, 『내 청춘의 초원에서』, 우림사, 1981. 8) 김일로, 『訟山河』, 지식산업사, 1982. 9) 김일로, 「책머리에」, 『訟山河』, 지식산업사, 1982. 10) 차재석, 「蛇足」, 『허남농 김일로 시화전』, 1959. 3. 1 11) 권일송, 「가슴으로 느끼는 詩畵」, 『허남농 김일로 시화전』, 1959. 3. 1 글쓴이 이동순 조선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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