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기우만과 호남 유림, 초상화로 이어진 학문의 길 채용신의 <송사 기우만 초상> 게시기간 : 2025-12-24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5-12-2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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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폭의 그림, 하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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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호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기우만은 조선 후기 호남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뒤를 이어 호남 유림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단순한 학자로서의 삶을 넘어, 을미의병을 이끌고 항일정신을 실천했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근현대 호남 유학의 명맥을 유지했던 기우만의 학문적 엄숙함과 단정함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의 초상화를 통해 시각적으로 구현되었다(그림 1).1) 호남 유림의 상징, 송사 기우만 기우만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회일(會一)이다. 전남 장성에서 기만연(奇晩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조부인 기정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기우만의 조부인 기정진은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34세에 사마시 장원으로 합격한 뒤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조선 유학의 중요한 주제인 주리론(主理論)을 심화시켰다. 기정진은 이념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해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을 태동시켰다. 그의 학문은 ‘노사학파’로 이어져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화서학파(華西學派), 전우(田愚, 1841-1922)의 간재학파(艮齋學派) 등과 함께 조선 후기 성리학의 큰 줄기를 형성하며, 손자인 기우만과 이최선(李最善)․조성가(趙性家)․정재규(鄭載圭) 등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다. 1876년 기정진이 세상을 떠나자 호남 유림들은 기우만을 종장으로 추대하였고 노사 학문의 계승자로 인정하였다. 기우만은 기정진의 사상을 계승하여 이에 따라 전통적인 제도와 가치를 중시하고 급진적 개혁은 거부하였다. 이는 기정진이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6조의 척사소(斥邪疏)를 올리고 위정척사의 국책을 세운 것과 같은 의미로 평가된다. 을미사변 후에 전국적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단발령에 대해 강력히 거부하며 궐기를 호소하며 상소를 올렸다. 1896년 기우만은 장성향교를 거점으로 의병을 일으켜 나주로 진군하였다. 이학상을 선봉장으로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등이 참여하는 의병단을 조직하여 호남의병대장이 되었으나 고종이 해산할 것을 명하자 논의 끝에 이에 따랐다. 1906년 국내에서 뜻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을 계획했으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906년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이 1907년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까지 압송되었다가 옥고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최익현의 영전에 곡을 하였다. 기우만은 1909년 『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을 저술하였다. 일본에 대해 항거한 의병가들의 활동을 기릴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기고 의병의 정당성과 역사성을 후세에 전하고 이를 귀감으로 삼게 하려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1910년 한·일 강제 합병이 일어나자 기우만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일화(日貨)를 배척하고, 세금 납부를 거부했으며 일본의 신교육을 반대했다. 또한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전개하며 항일정신을 실천했다. 1911년 일본이 항일운동을 잠재우기 위한 회유책으로 지역의 인망 있는 선비와 유생들에게 은사금(恩賜金)을 지급하는 시책을 시행하자 이를 피해 남원 사촌(沙村)으로 옮겼다. 1914년 이곳에 사호정(沙湖亭)이라는 정사를 경영하였고 1916년에 타계하였다. 그가 죽은 뒤 1927년에 장성의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사진 1, 2).
사진 1 장성 고산서원, 담대헌
사진 2 고산서원, 담대헌 편액 기우만은 조부인 기정진 사후 노사학파의 중심에서 활동하였으며, 그를 중심으로 노사학파의 외연 확대와 지속이 이루어졌다. 기우만은 노사학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이를 기반으로 한 강학의 토대를 강화하였으며, 또한 단순히 학문 전수에만 그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문인들과 공유하면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다. 그가 전개한 의병활동을 비롯하여 『호남의사열전』의 집필 등 사망할 때까지 지속된 그의 실천 지향적 활동은 이면에 유교 전통에 대한 계승 의식이 전제된 것이었다. 특히 기우만은 영호남을 넘나들며 노사학파 문인들의 학문적 동질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학파 문인 간의 일체성을 조성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호남과 영남지역에 흩어진 동문과의 지속적인 교유는 문인 내부의 결속과 학파의 외연 확장을 가져왔다. 기우만은 의병활동 이후 은거했으나 그의 문하에 입문하는 문인은 증가하였다. 1천여 명을 상회하는 직전 제자들이 배출되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20세기를 관통하며 재전(再傳) 및 삼전(三傳) 제자들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기우만은 노사학파의 핵심이자 근현대 호남유학의 상징적인 학자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기우만의 영향력 아래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들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시기를 거치면서 강학 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활동을 통해 호남지역 내의 유학 전통을 이어 나갔다. 호남 유림들에게 기우만의 존재는 대단히 상징적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를 숭모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기우만 타계 전 제자들과 문인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초상화가 제작되고 이후 개모본까지 제작했던 이유도 여기서 찾아진다. 두 본의 기우만 초상
기우만 초상은 기록으로는 3본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고산서원본과 부국문화재단본 두 본만이 전한다. 기우만은 1916년 병중에 있을 때 제자와 문인들의 요청에 따라 초상화를 그렸다. 이때 2본을 제작해서 기우만의 아들 기낙도(奇洛度, 1880-1930)가 보관했다고 하였다. 이 2본과 함께, 기우만 초상이 개모된 사실이 양회갑 등 기우만 문인들의 문집과 남아있는 편지를 통해 새롭게 밝혀졌다. 1923년 양회갑(梁會甲, 1884-1961)은 오동수(吳東洙, 1878-1945) 등과 간찰을 주고 받으며 기우만 영정을 개모하고자 했다. 이때 기우만 문하의 사람들이 계를 도모하여 기우만의 문집을편찬하고 채용신에게 이전에 제작한 기우만 영정을 새로 제작할 것을 요청했다. 따라서 기우만 초상은 1916년 제작된 것 이외에 1923년경에 채용신에게 의뢰해 개모된 본까지 총 3본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림 2 채용신, <기우만 초상>, 1916년, 비단에 채색, 105.5×63cm, 부국문화재단 소장 원래의 2본은 『송사선생문집습유』에 수록된 연보에 문인들의 요청으로 1916년 11월 28일 기우만이 타계하기 한 달 전, 10월에 초상을 그렸다고 하였다. 이때 2본이 제작되었고 1923년에 한 본이 더 그려져 3본이 되었다. 1923년에 제작된 초상화는 초상의 개모를 주도했던 양회갑, 오동수, 기낙도가 주고받은 간찰을 토대로 개모본 1본이 제작된 여러 정황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양회갑은 『송사집』 등 문집을 편찬하고 기우만을 고산서원에 배향하는 일들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기우만의 제자이다. 1923년 3월 양회갑은 기우만 문하의 사람에게 간찰을 보내 문집편찬과 영정 개모의 일을 논의하였다. 이 일은 『정재집(正齋集)』과 오동수의 『도호집(道湖集)』에 실린 양회갑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 그 전말을 살필 수 있다. 양회갑의 편지는 1923년 3월에 보낸 편지로, 오동수가 양회갑에게 답한 편지도 1923년 3월이어서 개모를 논의한 것은 3월 이전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1923년 양회갑, 오동수, 기낙도 등이 주고받은 편지(간찰)의 내용을 통해 기우만 초상화 개모 논의 과정이 확인된다. 먼저 양회갑은 편지에서 제안하길, 기노선(奇老善)이 화가 채용신의 초빙을 청하면, 오동수(子春)가 용진(湧珍)에서 채용신을 맞이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채용신에게 오준선 등 기우만의 용모를 기억하는 원로들이 모여 임종 시 급하게 그려진 ‘전본(前本)’에 대해 이모저모를 이야기하고, 채용신이 이를 참고하여 초상화에 가감하여 그리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양회갑은 스승의 모습을 아직 기억할 수 있으므로, 하루라도 잊기 전에 구본(전본)을 보고 자세히 고친다면 잘못된 그림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개모의 당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양회갑은 이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기보다는 수신자('형')의 의견을 구해 함께 진행하고자 했다. 즉, 여러 사람의 증언을 듣고 채용신이 직접 와서 그린다면 영정이 더욱 핍진(逼眞, 사실적)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편지를 통해 양회갑을 중심으로 여러 문인들이 협력하여 채용신을 초빙하고 원로들의 증언을 통해 스승의 영정을 가장 사실에 가깝게 완성하고자 했던 노력이 엿보인다. 편지 논의 이후 개모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는 내용도 편지에 포함되어 있다. 개모본이 제작된 후 양회갑은 오동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정을 본댁에 가져가 마을의 노소남녀와 여러 어른들에게 문의했는데, 모두가 영정에 기뻐하며 "백세를 전할 수 있겠고 머리털 하나라도 틀리지 않게 하라는 경계를 면하게 되었다"고 말하여, 개모된 영정이 매우 사실적으로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양회갑은 이 영정에 대해 오준선에게 화상찬을 받고, 스스로도 화상찬을 써 문집에 수록했다.2) 이후 화순에 고강사(高岡祠)를 짓고 영정을 봉안하고 배향했으며 이 일을 「송사선생영적이안고유문(松沙先生影簇移安告由文)」으로 남겨 놓았다. “삼가 노사 노선생을 지금 원위(元位)에 배향하고 선생(기우만)의 영정을 동벽에 옮겨 봉안하려 합니다. 존엄을 옮기려니 진실로 황공합니다. 사당을 건립한 날에 일을 도모하여 이미 그렸으나 일이 많고 경황이 없어 임시로 영정을 받들어 바른 위치에 봉안하고 석채를 공경하고 엄숙히 모셨습니다. 이제 가을 제향을 맞아 제수를 깨끗이 차려 올리고 앞에는 위패, 뒤에는 영정을 배향하여 예가 완성되었습니다. 손자를 조부에 합사하니 신령의 이치 또한 인정에 걸맞습니다. 감히 선조를 그리는 마음을 체득하여 같은 당에 높이 보답하고자 고유하고 제사를 지내려 하니 많은 선비들이 달려왔습니다. 부디 굽어살피시어 나의 지극한 정성을 흠향하소서”3)
고유문에 “사당을 건립한 날에 일을 도모하여 이미 그렸으나…손자를 조부에 합사하니…”라고 하였다. 개모 후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영정을 모신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일제의 감시가 심했고 사우가 여러 차례 훼찰될 뻔했기 때문으로 1945년에야 비로소 걸 수 있었다. 양회갑이 남긴 화상찬에는 ‘고운 비단에 그린 초상은 백 년간의 기상을 채색한 것이고…’라는 표현이 있는데 초상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이뿐이다.4) 초상화를 제작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고, 또 채용신이라고 하는 화가의 화명이 높았던 것에 비해 그와 관련된 내용이 없는 것은 특이할 일이다. 기우만 초상화: 학통의 시각화와 영정의 공적 역할 고산서원본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정면의 전신상이다(그림 1).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 즉 궤좌상(跪坐像)은 전통적인 초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지만 심의를 입은 유학자가 선호했던 자세로 채용신은 주로 유학자를 대상으로 궤좌상을 여러 점 제작하였다. 채용신이 제작한 궤좌상은 두 손을 소매 속에 감춘 채 무릎 위에 올려놓거나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주를 이룬다. 손을 노출시킨 경우도 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기우만은 정자관을 쓰고 깃과 소맷부리 등 옷의 가장자리에 검은 단으로 선(襈)을 두른 심의(深衣)를 착용하고 있다. 2단으로 겹쳐진 정자관 안으로 망건, 상투관이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오른손은 주먹을 쥐고 왼손은 펴서 무릎에 올려놓았다. 바닥에는 화문석이 깔려 있다. 이 초상화는 얼굴의 표현이 매우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얼굴색은 짙은 갈색에 가깝다. 매우 가는 필선으로 육리문을 따라 짧은 붓질을 반복하여 표현하였다. 극세필로 얼굴의 주름을 섬세하게 묘사하면서 짧고 긴 수많은 잔 붓질을 통해 피부결의 미세한 부분을 그려내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와 도드라진 광대뼈 등 얼굴의 윤곽과 명암이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노란색의 심의는 가장자리에 검은색의 선이 둘러 있다. 의습의 경우 빛을 직접적으로 받는 무릎 부위와 다른 부분의 명도 차이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정자관의 세밀한 묘사와 바닥에 깔린 화문석을 앞부분은 크게, 뒷부분은 작게 묘사함으로써 공간감을 주었다. 부국문화재단본은 기본적으로 크기, 재질, 표현법 등에서 고산서원본과 거의 똑같다(도 2). 따라서 1916년에 제작된 2본 중 하나로 생각된다. 얼굴은 고산서원본과 똑같이 가늘고 짧은 필선으로 육리문을 표현하였다. 고산서원본에 비해 명암은 조금 더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표 1]). 두 초상화에서 다른 점은 자세와 복식이다. 부국문화재단본은 공수(拱手)자세를 취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두 손은 소매 속에 감춰져 있다. 머리에 정자관 대신 흰색의 상투관을 썼으며 평상복 차림이다. 옷의 굴곡에 따라 돌출된 부분을 흰색의 하이라이트로 처리하고 접힌 부분은 어둡게 처리하여 옷주름에 양감을 주었다([표 2]). 바닥의 화문석은 <고산서원본>에 비해 문양도 단출하며 생략되어 있다.
두 초상화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심의와 평상복이라는 복식에서 차이가 있다. 기우만 생전에 2본의 초상화를 제작한 채용신은 두 본을 똑같은 모습으로 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각각의 복식을 선택한 배경에는 주문자였던 학문적 집단 혹은 문중의 의도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한 본은 공적인 용도로, 또 한 본은 유학자의 모습으로 변형을 가하여 제작했다. 복식의 차이는 초상화의 용도가 달랐던 데에서 기인한다. 고산서원본은 정자관을 쓰고 심의를 갖춘 모습이다. 심의는 19세기 후반에 복제 개혁을 맞아 고례(古禮)에 따른 전통 복식으로, 유림들이 애호했던 의복이다. ‘노사학파’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호남 유림의 상징적 인물로서의 심의를 착용한 모습의 고산서원본은 학맥의 시각화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초상화였다. 즉 고산서원본처럼 심의를 착용한 초상화는 사당에 봉안할 공적인 용도로 적합했다. 반면 평상복을 착용한 예의 부국문화재단본은 생전의 기우만의 모습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23년에 제작된 ‘개모본’에 대한 정보는 따로 없다. 양회갑이 ‘전본’을 수정하는 수준의 개모를 의뢰했기 때문에 기존에 제작된 초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상화가 개모된 후 양회갑은 자신이 세운 고강사에 이 초상화를 봉안했다고 하였다. 사당에 봉안할 목적으로 초상화를 개모했다면 평상복보다는 심의본 초상화로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남아있는 초상화는 심의본 초상화 1본뿐이다. 이 또한 고산서원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채용신은 이모한 초상화에 대체로 묵서를 남겨놓는 경우가 많았으나 두 본의 초상화에는 묵서나 관지도 없다. 현재까지는 개모본 초상화에 대한 다른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채용신의 호남지역 한말 문인영정 제작 채용신은 1900년대에서 1910년대에 항일 지식인 및 유학자들의 초상화를 집중적으로 제작하였다. 그간 선행연구에서처럼 채용신이 항일지사의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망국의 한을 달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거나, 자신과 교유관계에 있는 유학자의 초상화를 큰 대가 없이 그려주며 이를 통해 그가 항일의지를 표명했다는 해석이 우세했다. 하지만 그가 항일지사나 문인들의 초상화를 다수 제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채용신이 당시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가장 거세게 일어났던 전라도에서 활동했다는 데에 있었다. 채용신은 1906년 정산군수에서 해임되고 익산에서 본격적으로 초상화 공방을 열고 활동하였다. 1900년대 초 호남지방은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지역이며 최익현, 전우, 기우만 등 유학자들과 그들을 따르던 문인들이 많이 세거했던 곳이다. 1871년 서원철폐령 이후 금지되었던 사우의 건립으로 인해 주로 지역의 문중과 문인들의 요청에 의한 초상화의 수요가 많았던 상황도 작용했을 것이다. 요컨대 채용신이 이처럼 많은 유학자의 초상화를 제작했던 데에는 사당을 건립하여 초상화를 봉안하고 향사하는 제향의식을 위한 수요가 컸다는 이유를 들 수 있겠다.
그림 3 채용신, <오준선상>, 1924년, 비단에 채색, 74×57.5cm, 개인소장
그림 4 채용신, <용진정사도>, 1924년, 비단에 채색, 67.5×40cm, 개인소장
그림 5 채용신, <심원표상>, 1924년, 95×59cm, 비단에 채색, 개인소장
그림 6 채용신, <고광선상>, 1926년, 56.5×94cm, 비단에 채색, 개인소장 채용신은 기정진·기우만 문하 문인들의 초상화를 다수 제작했다. 현재 파악된 초상화만 해도 9점이 넘는다. 호남 유림들에게 기우만과 오광선, 고광선, 채면묵, 위계룡, 심원표 등의 존재는 기정진 이후 근현대 호남 유림을 이끌어가는 존재였다. 모두 기정진과 기우만의 문인들이며, 이들은 각각 강학 활동을 통해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따라서 제자들과 그의 문인들은 스승의 초상화를 제작하고 제향하려 했다. 이들의 초상화는 대체로 1920년대 이후에 제작된 것들로, 이 시기 채용신은 노쇠하여 초상화 주인공들을 직접 방문하여 제작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몇몇의 경우는 직접 방문하여 그곳에 머물면서 작업한 경우도 있었다. 채용신은 1924년 음력 2월, 용진정사를 방문해 <오준선상>을 제작했다. 오준선은 기정진의 문인으로 1896년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직접 의병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이를 지원하고 조선 의병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힘썼던 인물이다. 광주 용진산에서 문인들이 지어준 용진정사에서 기거하며 강학에 전념하였으며 1931년 그가 죽은 후 문인들이 강당 동쪽에 3칸짜리 용진영당을 세우고 초상화를 모셨다. <오준선상>은 채용신이 용진정사에 약 3개월간 머물면서 제작한 것이다(그림 3). 상복차림을 하고 백립을 쓴 74세의 <오준선상>은 백발 수염이 성성한 모습이다. 오준선은 1919년 고종 승하 후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하여 백립을 쓰고 다녔다고 하였다. 채용신은 오준선의 성격과 인품을 고려해 의관, 복식 등을 유의해 표현하였다. 복식 외에도 오준선의 안면묘사에서 뛰어난 표현력을 보여준다. 한편 채용신은 초상화와 함께 그곳의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용진정사도>는 용진정사의 지형을 포착해 그린 것으로 부감시에 세필로 이곳의 경관을 상세히 묘사한 그림이다(그림 4). 채용신이 오준선의 초상화와 용진정사의 전경을 그린 것은 기우만 초상 개모 일로 이미 용진정사에 와 본 적이 있었고, 오준선의 제자와 문인들이 스승이 돌아가시기 전에 미리 그려 보관하기 위해 주문을 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채용신은 <심원표상>도 제작했다(그림 5). 심원표(沈遠杓, 1853-1939)의 호는 만취(晩翠),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기정진과 송병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기우만, 오준선 등과 교유했다. 조선말 감역을 지냈으며 일제의 은사금을 거절하고 1913년 광주에 만취정(晩翠亭)을 짓고 강학을 통해 후학 양성에 힘썼다. <심원표상>은 정자관을 쓴 정면관으로 노란색의 두루마기를 입고 왼손에 부채를 쥐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오준선상>과 <심원표상> 두 작품의 제작연대가 같은데, 채용신이 3개월간 용진정사에 머무르며 초상화를 제작할 당시 만취정과 용진정사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으며, 이들 서로 교유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때 함께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고광선상>은 1926년 6월에 72세의 노학자를 그린 것이다(그림 6). 현와 고광선은 하천 고운(霞川 高雲, 1479-1530)과 의병장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1592)의 직계후손이다. 고광선은 덕암 나도규(德巖 羅燾圭, 1826-1885)를 찾아가 공부하고 기정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강학활동을 통해 후학양성에 힘썼던 인물이다. 흰색의 심의를 착용하고 흰색의 제관을 쓴 모습이다. 일제에 저항하던 고광선의 성정을 표현하려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문인들의 초상 제작: 유교 전통의 지속 이 외에도 기정진과 기우만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이들로, 후학을 양성했던 <위계룡상>, <채면묵상>, <정영원상> 등 초상화가 남아 있다. 기우만을 제외하고 오준선, 심원표, 고광선, 채면묵, 위계룡, 정영원의 초상화는 생전에 제작되었다. 스승의 사후를 대비하여 초상화 제작의 필요성을 깨닫고 문하의 문인들과 제자들이 미리 주문했을 것이다. 이들은 기정진·기우만 사후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활동했다. 근현대 한국 유학의 중심학파 중 하나였던 노사학파가, 근대식 교육이 일반화되고 전통 학문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현저히 감소한 20세기 중후반 이후에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들은 자신의 근거 지역 내에서 서당 등을 운영하며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현대의 학문적 조류에 발맞추어 다양한 학술 활동을 펼쳤다. 이와 함께 노사학파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학맥 계승 과정에서 노사학파의 중심은 호남이었고, 이들의 학맥은 광주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계승되고 확대·강화되었다. 20세기 중반까지 호남 유림들의 초상 제작과 봉안이 계속된 배경에는, 초상화를 통해 유교적 전통과 학통의 맥을 후세에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당시 유림들의 굳건한 문화적 의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이 글은 김소영, 「채용신필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1846-1916)초상 연구-고산서원본과 부국문화재단소장본」, 『역사학연구』제94호(호남사학회, 2024.5.), 65-96쪽을 요약․수정한 것이다.
2) 吳駿善, 『後石遺稿』권8, 「松沙奇徵士畫像贊」, “양회갑군이 그 선사인 송사선생 진상을 그려서 집에 봉안하고 그 벗인 금성 오준선에게 부탁을 하기에 찬을 지었다. 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문은 가정에서 전수되었고 의리는 춘추에서 잡았네. 선후로 뜻을 이어 받으니 크고 넉넉하도다. 공은 붙들고 개척함에 있고 뜻은 복수토벌을 간절히 했네. 초상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니 완고함은 청렴이 되고 야박함은 돈후해지네.” 梁君會甲其先師松沙先生眞像奉安于居第屬其友人錦城吳駿善爲之贊曰 學傳家庭 義秉春秋 有作有述 大哉優優 功存扶闢 志切討復 遺像儼然 廉頑敦薄.” 3) 양회갑,『正齋集』卷之十,「松沙先生影簇移安告由文」“伏以蘆沙老先生 今將躋享于元位 先生影簇 移奉于東壁 遷動尊嚴 誠甚惶縮 建祠之日 經謀己畵 事多蒼黃 權奉影簇 安于正位 舍菜恭肅 今當秋享 爼豆蠲潔 前牌後影 配侑禮成 孫祔於祖 神理合情 敢體孝慕 崇報同堂 告由將事 多士趍蹌 伏惟降監 歆我至誠.” 4) 梁會甲, 『正齋集』卷之十, 「松沙奇先生畫像贊」“금과 옥 정밀히 단련하니 빙호를 비추며 맑게 갠 듯하고 연꽃이 물에서 나오니 그윽한 난과 함께 향기롭네. 땔나무 지고 학통을 전수받아 아비와 스승의 연원을 이어 찬술하였네. 괴로움에 잠들고 창을 베고 자며 명성황후의 원수를 주벌하려 하였네. 옛 성현을 보위하여 도를 지키고 중화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배척했네. 고운 비단에 그린 초상은 백 년간의 기상을 채색한 것이고 춘추대의로 청렴함과 뜻을 세움은 천년의 유풍으로 남아있도다. 金玉鍊精 照冰壺而光霽 芙蓉出水 倂幽蘭而馨香 荷薪傳鉢 紹述父師淵源 寢苦枕戈 誅討母后讐賊 閑先聖以衛道 尊中華而攘夷 鮫鮹肖眞 素絢百年間氣 麟經大義 廉立千秋遺風” 참고문헌 奇宇萬, 『松沙先生文集拾遺』
梁會甲, 『正齋集』 吳東洙, 『道湖集』 吳駿善, 『後石遺稿』 김소영, 「채용신필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1846-1916)초상 연구-고산서원본과 부국문화재단소장본」, 『역사학연구』제94호(호남사학회, 2024.5.), 65-96쪽 양진희, 「석지 채용신의 회화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18. 국립현대미술관, 『석지 채용신』, 삶과 꿈, 2001. 국립전주박물관, 『석지 채용신-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에픽, 2011. 전북도립미술관, 『채용신과 한국의 초상미술, 이상과 허상에 꽃피다』, 디자인북스, 2012. 글쓴이 김소영 한국학호남진흥원 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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