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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즈타오(知道)’ ‘즈타오러(知道了)’ 그리고 거행조건(擧行條件) 게시기간 : 2019-10-03 07:00부터 2029-01-04 00:00까지 등록일 : 2019-10-02 14:17

조회수 :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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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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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열 번째 이야기2019년 10월 3일
열 번째 이야기
   

‘즈타오(知道)’ ‘즈타오러(知道了)’ 그리고 거행조건(擧行條件)

몇 년 전 대만 고궁박물원에서는 ‘주비주접(硃批奏摺)’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청나라 때 황제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하는 공문서인 ‘주비주접전’의 제목이 ‘즈타오러(知道了)’였다. ‘주접’이란 황제에게 직보하는 공문서이고 보고된 문서에 붉은 글씨로 쓴 비답(批答)을 ‘주비’라고 하였다. ‘즈타오러(知道了)’는 황제가 대신들의 주접(奏摺)을 비열(批閱)할 때 으레 쓰는 용어이다. 상주(上奏)한 내용을 짐(朕)이 ‘알았다’는 것이다. 신하들이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문의 명칭은 장(章), 주(奏), 표(表), 의(議), 소(疏), 계(啓), 장(狀), 찰(札), 게(偈), 봉사(封事) 등 매우 많다. 주접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온 것은 청 강희(康熙) 년간이다. 처음에는 어떤 특정 관원이 황제에게 밀보(密報)할 때에 사용한 것이었는데, 밀봉(密封)하여 어전에 직달(直達)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비밀스럽고 또 빨라서 군주의 마음에 딱 들어맞는 보고 형식이었다. 그래서 옹정제(雍正帝)는 주접의 사용 범위를 확대하였고 점차 주접의 형식을 획일화하였으며 건륭(乾隆) 조에 이르러서는 정례화가 되었다. 황제가 붉은 주사(朱砂) 먹을 가지고 주접을 읽고 비답을 하였기 때문에 ‘주비주접’이나 ‘주비유지(硃批諭旨)’라고 칭하고 간략하게 ‘주비’라고 하였다. 대만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는 15만 8천여 건의 주비주접이 소장되어 있다.

 
그림1

그림1 청나라의 상주문과 황제의 비답 ‘주비주접(硃批奏摺)’

‘즈타오(知道)’나 ‘즈타오러(知道了)’ 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한 것에 대해서 ‘알았다’ ‘알겠다’고 하는 말이다. 지금도 쓰이고 있는 중국어 ‘즈타오’ ‘즈타오러’가 중국 명청 대의 황제가 보고 문서에서 뿐만이 아니라 조선 왕조의 국왕 문서의 결재에서도 가장 자주 쓰던 말이었다. 조선의 최고 권력자인 국왕의 비서기구인 승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것이 기본 임무로 되어 있다. 신민(臣民)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왕의 말씀을 전달하는 승정원은 마치 국왕의 목구멍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국왕의 말을 대신하는 승정원을 후원(喉院)이라고도 하였다. 국왕은 의정부에서부터 귀후서(歸厚署)와 같이 조그마한 중앙 관서, 그리고 각 도와 전국 360여 군현에서 올라오는 외방의 보고를 받아 처결하여야 하였다. 그 처리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승정원이었다. 2품 이상 아문에서는 국왕에게 직보(直報)할 수 있지만 3품 이하의 관서에서는 자신이 속해있는 2품 이상 아문을 경유하여 국왕에게 보고한다. 국왕에게 보고하는 문서는 큰일의 경우에는 계본(啓本)으로 보고하고 조그만 일은 계목(啓目)으로 보고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잗다란 일들은 단자(單子)나 초기(草記)로 보고한다. 6조를 분담하여 맡은 승정원의 각 승지들은 자신의 관할 부서에서 올라오는 계본이나 계목을 첨부하거나 요약하여 초기(草記)로 보고를 하면 국왕은 그 초기 문서에 결재하여 지시를 내린다. 연설(筵說)에서 초출된 거행조건이나 시행사항은 계목 없이 단자나 초기를 올려 국왕의 결재를 받는다. 국왕의 결재를 ‘판부(判付)’라고 하였다. 판부는 국왕이 친필로 직접 쓰기도 하지만 국왕이 구두나 메모로 지시를 하면 승지가 대신 판부를 쓰기도 한다. 아래의 「숙묘어필 肅廟御筆」에 쓰인 ‘판부’는 국왕 숙종의 친필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생각하여 첩장하여 보관한 것이다.

 
그림2

그림2 승정원 승지가 국왕에게 보고한 문서 ‘초기(草記)’ :
정조 때 승정원 주서로 재직했던 유이좌(柳台佐, 1763∼1837)의 전교축(傳敎軸)에 합철되어 있다.

조선시대 국왕의 권력은 시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실제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 속에서 조선 왕조 오백 년이라는 장기 왕조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국왕과 함께 경전을 공부하고 시사를 논의하는 경연(經筵)이라는 자리였다. 공부를 좋아하는 국왕은 하루에도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이라 하여 아침, 낮, 저녁, 하루 세 번이나 경연에 나설 때도 있었다. 경연에서 이루어지는 국왕과 신하들 사이의 대화는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경연 자리에는 좌사(左史), 우사(右史)라 하여 예문관의 전임 사관과 승정원의 주서가 이중으로 기록하였다.

경연에서 논의된 내용은 그냥 마음속에 담아두면 될 것도 있지만, 당장 시행하여야 할 내용도 있었다. 경연에 참여한 승지는 주서가 기록한 ‘초책(草冊)’에 근거하여 시행할 조목들을 정리하여 다시 국왕에게 보고하고 국왕은 그것을 확인하여 결재하면 그 내용은 바로 담당 관청에 전달되어 시행되었다. 이것을 ‘거행조건(擧行條件)’ 또는 줄여서 ‘거조(擧條)’라고 한다. 이때 국왕은 보고된 거행 조목, 조건들을 검토하여 다시 지시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은 ‘알았다(知道)’라고 결재를 하여 시행하게 한다. 거행조건이라고 하니 말 그대로 이해한다면 마치 ‘어떤 일을 거행하는 데에 필요한 조건’처럼 이해하기 쉽다. 조건이라는 용어 때문이다. 조건은 어떤 상황에 필요한 요건을 말하는데, 여기서의 조건은 오히려 조목, 조항이라는 용어로 쓰면 알기 쉽다.

거행조건을 시행하기 위해서 승지가 써서 올리는 문서를 초기(草記)라고 한다. 신하가 국왕에게 올리는 문서는 일반 신민들이 올리는 상소문에서부터 상언(上言), 상계(上啓), 계언(啓言), 장계(狀啓), 차자(箚子) 등 많은 형식의 문서들이 있지만, 승지처럼 매일 국왕 측근에서 각 부서로부터 올라오는 문서나 요구 사항 등을 전달하는 경우에 간략하게 격식을 갖춰서 쓰는 문서가 초기인 것이다.

 

그림3

그림3 [숙묘어필] 1쪽

 

그림4

그림4 [숙묘어필] 표지

 

그림5

그림5 [숙묘어필] 2쪽

 

그림4

그림6 [숙묘어필] 3쪽

 

그림7

그림7 [숙묘어필] 4쪽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된 시흥(始興)의 반남박씨(潘南朴氏) 금계군(錦溪君) 종택(宗宅) 자료 중에 「숙묘어필」이라는 자료가 있다. 이 자료는 문장이 이어지는 글이 아니라 승지가 국왕에게 보고한 문서에 국왕의 친필로 결재를 받은 문서에서 결재된 친필 부분만 오려서 장첩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림 3〉 1-2쪽 知道先爲入來 允/ 知道 允 允 允/ 知道 允 知道/
〈그림 5〉 2-1쪽 依啓 允 允 允/ 知道 知道 允 允/ 知道竝推考/
〈그림 5〉 2-2쪽 限明秋姑減 允 允/ 入來後持傳 知道/ 知道六七人加抄以入 知道/
〈그림 6〉 3-1쪽 別單書入 允 允/ 知道 令倉官輸送/ 知道 知道 允/
〈그림 6〉 3-2쪽 允 允 允 允/允 允 允 允/允 允 知道 知道/
〈그림 7〉 4-1쪽 允 允 允 允/允 允 允/ 特爲加資
〈그림 7〉 4-2쪽 知道 先爲入來/ 領相獻議實合予意依此施行/ 又有變通之擧則/不至失稔處固當依例爲之/ 首飾亦非大明冠制矣/ 宣泄事情
 

국왕이 결재한 문서가 무척 다양할 것이지만, 여기에 가장 많은 국왕의 답변은 ‘허가한다’는 의미의 ‘윤(允)’이 많고, ‘알겠다’는 의미의 ‘지도(知道)’도 많다. 구체적으로 이 자료들은 1713년(숙종 39)에 보고되어 재가된 문서에 숙종이 친필로 결재한 문서로 생각된다. ‘윤’이나 ‘지도’ 같은 말들은 국왕의 왕명 출납 기록인 『승정원일기』에 무수히 나오기 때문에, 검색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숙묘어필」의 내용을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다음은 「숙묘어필」과 같은 내용을 『승정원일기』에서 정리한 것이다.

 
〈그림 5〉 2-2쪽 “限明秋姑減 내년 가을까지 우선 감면한다.”(숙종 36년 8월 1일)
〈그림 5〉 2-2쪽 “入來後持傳 들어온 후에 가지고 와서 전할 것”(숙종 39년 7월 7일)
〈그림 5〉 2-2쪽 “知道六七人加抄以入 알겠다. 6, 7인을 더 초출하여 들이라”(숙종 39년 8월 11일)
〈그림 6〉 3-1쪽 “令倉官輸送 창관에게 수송하게 하라”(숙종 38년 9월 26일)
〈그림 7〉 4-2쪽 “知道 先爲入來 알겠다. 먼저 들어오라”(숙종 39년 7월 7일)
〈그림 7〉4-2쪽 “領相獻議實合予意依此施行 영의정의 헌의는 실로 나의 뜻에 맞다. 이에 따라 시행하라 ”(숙종 39년 5월 25일)
〈그림 7〉 4-2쪽 “不至失稔處固當依例爲之 흉년이 든 곳이 아니면 전례대로 시행하라”(숙종 39년 8월 10일)
〈그림 7〉 4-2쪽 “首飾亦非大明冠制矣 머리 장식도 역시 명나라의 관제가 아닙니다”(숙종 39년 5월 5일)
〈그림 7〉 4-2쪽 “宣泄事情 사정을 누설하였다”(숙종 39년 7월 20일)
 

따라서 금계군 종택의 「숙묘어필」은 숙종의 ‘어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과연 국왕이 승지들이 보고한 이러한 문서에 일일이 결재 지시문을 친필로 썼을까? 처음 국왕 문서를 공부하던 시기에는 각 관사에서 승지를 통하여 보고한 문서에 결재한 국왕의 재가 글씨가 국왕이 직접 썼는가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위의 「숙묘어필」에서 보듯이 국왕의 결재가 끝나고 시행이 완료되어 그 문서가 휴지(休紙)가 되자 개인적으로 반출하여 보관을 하든가 하게 되는데, 반남 박씨가에서는 숙종의 친필 부분만 오려서 첩장하여 집안의 보배로 간직하였던 것이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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