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근대시문학」 자전거를 타고 오는 시인, 목일신 게시기간 : 2025-10-01 13: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5-09-30 10:5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호남 근현대 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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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를 부르며 자연스러움이 사라져가는 직선의 시대, 직선에 갇힌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숨이 막힌다. 그럴 때면 곡선의 편안함과 그 부드러움, 그 안에서 평화가 있었던 그때,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릉” 노래를 부르면서 꼬부랑길을 내 달리던 어린 날이 떠오르곤 한다. 구불구불 시골길을 작은 먼지 일으키며, 휘파람도 불면서 달리던 모습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조용한 미소 번지는 것은 곡선의 편안함 때문이리라. 자전거 위에 올라 가을바람을 가르며 달리다가 잠시 푸른 하늘 올려다보면서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면 멀리 산길을 휘돌아 오는 이의 가벼운 발놀림과 손놀림, 그리고 구불구불한 자갈길을 울렁울렁 넘어오는 몸들의 춤사위가 손에 잡힐듯하다. 세발자전거를 타면서 부르기 시작하여 자식들에게, 자식들은 또 그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며 함께 부르는 노래 「자건거」는 어른들이나 어린이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알고 있는 노래다. 이 노래는 1932년에 쓰고, 1933년에 곡이 붙어 지금도 부르고 있는 동요다.
찌르릉 찌르릉 비켜 나셔요
![]() <아희생활, 1932, 동요 <자전거> 원작> 동요 「자전거」는 누가 썼을까? 누구인지 아는 이도 드물고 아무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동요를 쓴 작가는 전라남도 고흥에서 부모님과 누이들과 동생들, 넓은 바다와 들녘을 친구삼아 뛰놀았던 소년이다. 유년의 동산은 행복하였고 평화로웠다. 목사였던 부친의 사목을 위해 선교사들이 선물해 준 자전거, 부친이 먼 곳으로 사목 활동을 가지 않는 날은 소년의 것이었다. 소년이 그날만 되면 자전거를 타고 산으로 바다로 내달렸다. 자전거도 소년을 만나는 날이면 더욱 신이 나서 찌르릉찌르릉 소리를 더 크게 냈다. 동요 「자전거」가 노래로 불리면서 ‘영감’이 ‘노인’으로, ‘노인’이 ‘사람’으로 바뀌었고 ‘찌르릉 찌르릉’이 ‘따르릉 따르릉’으로 바뀌긴 하였지만 언제 불러도 즐거운 노래다. 내가보통학교 5학년 때에 선교회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아주 멋진 자전거 한 대가 기증되어 왔었는데 나의 아버지는 그 자전거로 각처의 교회를 순회하시며 교역의 일을 보셨는데 쉬시는 날을 그 자전거를 나에게 양보하여 주시어서 나는 시오리나 되는 보통학교를 그 자전거를 타고서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와서 지어 본 것이 동요 「자전거」인데 그것을 『아이생활』에 발표한 것을 1년 후에 김대현씨가 작곡한 것이다.1)
동요 「자전거」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느꼈던 것을 꾸밈없이 쓴 것인데 전 국민이 애창하는 동요가 된 것은 화려한 수식이나 은유가 없이 어린이들의 정서와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2. 자전거를 탄 소년의 등장과 성장 자전거를 탄 소년은 항일운동가이자 목사였던 목홍석을 아버지로 두었고 자전거를 탄 소년 아동문학가로 성장했다. 그는 1928년 3월 14일 고흥 흥양보통학교(현 고흥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독자에서 창작자로 발표한 최초의 동요는 「산시내」로 동아일보에 실렸다. 깁흔산골작이
흘러나오는 외줄기기다란 산시내물은 언제나고요히 흘러갑니다 잔잔히흘으는 산시내물은 물구경하려온 사람업서서 고요한며 흘러갑니다 「산시내」 전문2) 어린이가 바라본 시냇물 흐르는 모습이다. 시냇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듯 화려한 수사나 말장난 같은 꾸밈이 없이 시냇물을 바라보는 어린 화자도 편안하기만 하다. 이 「산시내」는 순천 매산학교 1학년 때 부친이 사망한 후 4개월이 뒤에 쓴 것이다. 시냇물을 바라보는 화자의 심리는 평화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외줄기’와 ‘사람업’다는 데서 쓸쓸함과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제도교육은 식민 담론을 이식하기 위한 교육이 철저히 진행되던 시기였고 학교에서 사용하는 음악교재도 일본의 창가집이었다. 그래서 1920년대와 30년대 초까지 동요는 창가 7·5조에 얹어 불렀고 거기에 맞춰서 동요를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소년 목일신은 어떻게 동요를 쓰게 되었을까. 소년 목일신이 동요를 쓰게 된 배경에는 부친 목홍석이 있다. 어린이 전문잡지를 사다 주어서 읽었고 ‘우리말로 글을 지어보라고 지도’해 주었으며 글 쓰는 법을 손수 가르쳐주었다. “그때는 일본말로 대화를 시키는 것은 물론, 학교에서 작문까지도 일어로 짓게 되었으나 나의 아버지는 될 수 있는 대로 우리말로 글을 지어 보라고 지도하여 주셨으므로 나는 때때로 우리말 작문으로 동요를 지어 보게 되었던 것”3)인데 「산시내」가 동아일보에 실린 것이다. 그가 두 번째로 발표한 작품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우리 아버지」였다. 나를사랑하시든 아버지는요
작년삼월초하로 피는봄날 우리형뎨오남매 남겨두고서 무정히한울나라 가섯답니다 나는나는누나와 목노아울며 어머니는동생들 안고울제 동리동리사람들 모다차저와 애처러운눈물을 흘렷답니다 사랑하신어머님 슬퍼하실땐 나는나는언제나 위로를하죠 이밤도달밝은밤 버레우는밤 그리운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4)
가족들과 떨어져 전주에서 학교에 다녔던 소년 목일신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쓴 동요다. 그 안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부터 화자의 심정까지 서사화하고 있어서 두 번째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목홍석을 사실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시인과 화자가 동일시 되어 ‘나를사랑하시든 아버지’였기에 슬픔은 더욱 깊고, 가족들의 구체적인 슬픔과 동네 사람들의 슬픔이 겹쳐서 한 사람의 죽음이 전체의 슬픔으로 확장되고 있다. 어린 화자는 ‘사랑하신어머니가 슬퍼하실땐’ 위로를 할 만큼 성숙했지만 멀리 객지에서 듣는 벌레 우는 소리는 ‘그리운아버지를’생각나게 한다. 화자는 최대한 감정의 노출을 배제하고 있지만 먼저 배치한 ‘작년삼월초하루’가 다시 현재화됨으로써 슬픔이 배가되어 노출된다. 이렇게 아버지를 여윈 슬픔을 뒤로 하고 그는 쉬지 않고 동요를 썼다. 그 결과 1930년 1월 「참새」가 동아일보에, 「시골」5)은 조선일보 신춘 현상에 당선되었고 1931년 1월에도 조선일보에 「물네방아」가 신춘 현상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동하날붉으래
밝아오면은 참새들이 날새엿다고 옹기종기나무에 모혀들안저 날새엿소날새여 일을하시요 서하날붉으래 날이저물면 참새들이 해가젓다고 오골오골숩속에 오혀들안저 해가젓소해가저 편히쉬시오 「참새」전문
이로써 소년 목일신은 동요 작가로 전국에 명성을 날렸다. “내가 작품을 가장 많이 썼던 시절은 중학교 2학년 때라고 생각되는데 그때는 하루에 보통 1, 2편의 작품은 꼭 지어왔으며 어떤 날을 3, 4편씩 지은 때도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발표욕에 치중하여서 짓기가 바쁘게 신문사나 잡지사에 보내 버리게 되어 글을 지은 지 2, 3일 후에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 발표”했고, 어린이 잡지는 “『아이생활』에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해수욕장에서도 넘치는 창작열을 주체하지 못해 시상이 떠오르면 “손가락으로 모래사장에 다가 「바닷가에서」라는 동시를 써놓고서 그동안 바닷물에 스쳐 없어지지 않도록 빨리 집으로 달려와서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가서 그 시를 다시 옮겨”6)적을 정도였다. 전주 신흥학교 2학년 때 1929년 11월 3일을 기점으로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일제에 항거하는 격문을 살포하고 맹휴를 단행하고, 교내시위와 가두시위 등을 통하여 격렬하게 저항했다. 광주학생운동은 단발적으로 끝나지 않고, “12월 투쟁으로 인한 학생과 사회 인사들의 계속적인 검거와 산발적인 동요로 인하여 1월까지 긴장된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었”7)다. 1월 학기 시작과 함께 새로운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전주 신흥학교 학생들도 역시 1월 투쟁에 합류했다. 1930년 “1월 20일부터 돌연 휴학을 선언하고 교수를 하지 안는다는데 리유는 생도들의 동요가 잇슬가하여 예방코저 그러한것이라는데 평온 무사히 공부를 하든 학생들은 휴학의 리유를 질문하는 동시에 속히 교수하야달라고 진정”8)했다. “전주 시내에는 1월 20일 밤 격렬한 항일 격문이 뿌려”졌고, “전주여고보, 공업보습학교, 신흥학교 등지에서 시위”가 일어나 “25일에는 신흥학교가 계속 시위에 들어가 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었”9)는데 “전주 신흥학교 고등과 칠십여명 삐라를 뿌리고 만세를 부르다가 삼십육명이 검거”10)되었다. 목일신도 검거되어 형무소에 갇혔다. 그는 갇힌 것이 힘들었다기보다는 작품을 쓸 수 없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지 않았는데 몰래 감추어 둔 아주 작은 토막연필로 하루 한 장 주는 작은 휴지를 아끼고 아껴서 「하늘」, 「구름」, 「꿈나라」 등을 썼다. 퇴학을 당한 덕분에 고향 고흥으로 돌아온 그는 동요를 쓰기에 전념했다. 1930년에만 63편의 동요를 발표했는데 강제 퇴학을 당한 억울함과 울분을 대신하여 조선의 어린이들을 위한,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동요만 썼다. 그의 동요 쓰기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 다른 이름이었음이 작품 발표 시기만 봐도 잘 드러난다. 1929년부터 1937년까지는 아주 활발했고 1938년에는 단 2작품, 1939년에는 4작품, 1940년 1941년에도 2작품만 발표했다. 일제가 전쟁에 돌입한 시기를 전후해서 거의 작품을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린 여타 문학가들의 정신적 굴절과는 다른 행보를 한 그는 아버지를 일제에 잃었기에 더욱 민족정신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항쟁의 글쓰기를 한 셈이다. 3. 아버지와 아들, 다른 듯 같은 삶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목을 비틀고 숨통을 조이던 어느 날, 서울에서 3·1만세 운동을 목도한 젊은 목사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고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서울 소식을 전하며 젊은 청년들을 모아 태극기를 만들고 고흥군민을 규합해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그 사람은 목홍석이다. 목홍석(睦宖錫, 1885.2.23~1928.4.20)은 목치숙(睦致淑)이라는 가명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항일운동가이며 목사다. 일찍 개화하여 목사가 되었고 목사가 된 후에도 평양까지 먼 거리를 왕복하며 신학을 공부했다. 절대자를 향한 믿음의 평양행 도중 서울에서 3·1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뒤 가슴 속에 독립선언서 1부를 몰래 감추고 고흥으로 돌아왔다. 젊은이들을 규합하는 한편 교회 신도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했고 고흥읍의 장날에 거사를 감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거사 일인 1919년 4월 14일, 그날따라 심한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거사는 실행에 옮기지 못한 대신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을 비롯한 주요 행정기관에 보내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독립 의지를 천명했다. 그로 인하여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할 것을 기획하고 작성한 선언서에 조선혈족동맹태업이라고 쓰고 조선의 독립을 기하는 시위운동을 책동”11)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옥고를 치르는 동안 가해진 모진 고문을 견디며 형기를 채우고 출감했지만 몸은 병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흥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 토산품 사용을 장려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항일운동을 멈추지 않았으나 고문의 후유증은 그를 괴롭히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리동리사람들 모다차저와/ 애처러운눈물을 흘”12)리며 애통해했다. 국가는 목홍석에게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했고, 목일신은 아버지를 평생의 자랑으로 삼았다. 동요 작가 목일신(睦一信, 1913.1.18~1986.10.12))은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행정리 425번지에서 항일운동가 목홍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8년 3월 14일 고흥의 흥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순천매산학교에 입학했다가 1929년 4월 8일 전라북도 전주에 있는 신흥학교로 전학했다. 부친 목홍석의 민족의식을 이어받아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분에 퇴학을 당했다. 이후 일본에서 간사이대학을 졸업하고 청진방송국에서 방송한 후 평생을 교직에 종사했다. 교직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처럼 국가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은성(隱星), 숨은 별이었던 그의 삶과 정신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평생 숨은 별로 살았기에 그가 쓴 동요는 반짝이는 노래로 영원히 빛날 것을 믿는다. 아버지와 아들, 다른 듯 같은 삶으로 지금 여기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매년 고흥에서 목일신 동요제와 동시대회가 열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197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동요>
![]() <1940년대 교사 시절의 목일신> 참고문헌
1) 목일신, 이동순 엮음, 『목일신전집』, 소명출판, 2013
2) 목일신, 동아일보, 1928.8.1 3) 목일신, 이동순 엮음, 『목일신전집』, 소명출판, 2013 4) 동아일보, 1929. 10. 20. 5) 조선일보, 1930. 1. 1. 6) 목일신, 이동순 엮음, 『목일신전집』, 소명출판, 2013 7) 한정일, 『일제하 광주학생 민족운동사』, 전예원, 1981. 185쪽. 8) 동아일보, 1930. 1. 24. 9) 한정일, 『일제하 광주학생 민족운동사』, 전예원, 1981. 188쪽. 10) 동아일보, 1930.1. 28. 11) 목치숙 등 2인 판결문, 1919. 7. 25. (대구복심법원) 12) 동아일보, 1929. 10. 20. 글쓴이 이동순 조선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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