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현충(顯忠)에 진심이었던 선비, 은봉 안방준(隱峰 安邦俊) 게시기간 : 2025-06-05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5-06-04 10:3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
||||||||
보훈의 달, 현충을 생각하며 6월의 달 이름은? 보훈의 달이다. 6월 6일은 현충일(顯忠日)이다. 보훈이란 어떤 공훈을 세운 일에 대해 보답한다는 말이다. 나라의 존립이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신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희생당했거나 공훈을 세운 사람이나 그 사람의 유가족에게 국가가 적절한 보상하는 일을 말한다. 다만 보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 과정이 필요하다. 현충은 그 안에 들어 있다. 현충(顯忠)이란 충(忠)을 세상에 드러낸다는 말이다. 세상에 드러나려면 누군가가 세상을 향해 공을 세운 사람의 공훈을 알려야 한다. 비록 충정을 다바쳐 나라를 위해 죽었다해도 그것을 세상에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희생은 시간에 묻혀버린다. 누군가 증언해주거나 기록해주어야 한다.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도록. 지금도 보훈 대상자을 선정할 때면 서류를 갖춰 내야한다. 희생했거나 공을 세웠다는 증거를 제출하는 것인데 이 또한 글로 표현한다. 이것이 현충 과정이다. 하지만 현충 작업은 쉽지 않다. 현충을 기록하는 사람은 자신이 직접 보았거나, 어떤 이의 희생을 직접 본 사람에게서 들은 내용을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 현충한 내용을 믿을 수 있고 보훈 대상자로 선정하는 데에 공평하다. 먼 곳에서 바람결에 들려오는 이야기만 듣고 기록하는 현충의 글은 신뢰하기 어렵다. 또 세상 사람들이 현충하는 내용을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사람의 글솜씨도 빼놓을 수 없다. 거기에 기록하는 사람의 진심까지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지금도 현충을 위해 누군가가 글을 쓰고 보훈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많다. 조선시대에도 현충 작업에 평생 진심이었던 사람이 있다. 바로 보성의 선비 은봉 안방준(1573-1654)이다. 현충과 보훈에 진심을 다하다 삼가 더운 여름에 귀하신 몸을 신이 보살펴 다복하시리라 생각합니다.…(중략)…제 아들이 약을 묻는 일로 찾아뵌다 하기에 안부 여쭙고 동정을 살피게 합니다. 또 중봉에 관한 한 가지 일을 번거롭게 말씀드리려 하니 합하께서 채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중봉은 그저 일개 절의를 지킨 선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학문과 조행을 보면 실로 우리 동방에 수천 년 사이에 없었던 진유(眞儒)입니다. 절의를 지키다 죽은 뒤로 30여 년이 지났는데 그의 세 아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한 명은 옥천에 살고, 한 명은 문의에, 또 한 명은 황간에 살면서 산골짜기에 묻혀 죽을 걱정이 코앞에 닦쳐 있습니다. 폐조 때의 일이라면 괴이하다 할 것도 없겠지만, 어찌 합하의 동료들이 어진 임금을 만나 나랏일을 맡고 계시면서 이 세 아들들이 유리결식(流離缺食)하도록 놔 두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다. 저는 평생 늘 합하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고 의로운 사람을 숭상하는 기풍을 추앙했습니다. 그래서 합하가 조정에 서게 되면 모든 조치와 시행이 반드시 속된 조정과는 같지 않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반정한 뒤로 한 달도 넘게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아직 덕을 숭상하고 어진 이를 포상하는 은전이 그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 어찌된 일입니까. …(중략)…원컨대 합하께서 이 일을 빨리 탑전에 간곡히 아뢰어 포휼(褒恤)의 은전을 시행하고 의정부의 직책을 추증하도록 청해주십시오. 이어 그의 자식에게 관직을 주고, 복직을 명하여 관직을 올리고 군직의 녹봉을 주기도 한다면 국가가 충신을 포상하고 어진 사람을 모범으로 삼는 도리가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1623년 봄, 보성의 우산(牛山)에 있던 안방준은 폐조 곧 광해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귀(李貴, 1557-1633)와 김류(金瑬, 1571-1648)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임금으로 옹립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른바 인조반정이었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이이첨, 유희분, 정인홍 등이 국정 농단을 하는 세태에 안방준은 염증을 느꼈다. 3년 간의 서울 매계동 생활을 접고 보성 우산으로 이사했었다. 그런데 인조가 새 임금에 올랐다니 이제야 세상이 바르게 돌아갈 것이라고 희망을 품었다. 충신과 의로운 사람들이 보답을 받고 악행을 저지른 이들이 벌 받는 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동안 그의 마음에 걸린 일이 하나 있었다. 중봉 조헌의 세 아들의 일이었다. 조헌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일본군과 싸웠는데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공훈이 인정되어 1599년선무원종공신 1등에 들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안방준은 다르게 생각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헌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나라가 조헌의 자식들에게 제대로 보훈했단 소식을 듣지 못했다. 조헌의 세 아들은 옥천, 문의, 황간에 각각 흩어져 살았다. 그들이 곤궁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광해군 때라면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조가 즉위한 지 한 달도 넘게 지났건만 조정에서 ‘인의로운 일’을 행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안방준 생각에 의하면 인조가 즉위하자마자 나라에 대해 공훈을 세운 이들과 그 자식들에게 보훈하는 ‘인의’로운 일이 즉시 시행되었어야 했다. 어그러진 윤리를 바로잡는 일이 인조 반정의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1623년 5월 즈음, 그는 김류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문안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용건을 들이밀었다. 조헌이 참된 유학자로서 나라에도 절의를 바친 공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들은 보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나라 위해 죽은 사람의 자식에게 포상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말도 했다. 그래서 빨리 임금에게 알려 조헌의 자식들에게 은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조헌이 죽은 이후 아들 조완도는 태릉 참봉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보훈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던 듯하다. 안방준은 조헌의 아들들이 곤궁한 형편에 있다고 하면서 나라에서 보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식들에게도 관직이나 군직의 녹’을 주어 국가가 보훈하는 모범을 보여야 사람들이 흥기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류는 답장에서 ‘힘껏 도모해보기는 하겠지만 실권이 다른 사람에게 있어 쉽지 않다.’고 했다.
사실 안방준과 조헌은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다만 조헌은 1568년에, 안방준은 1591년에 파주 우계로 가 성혼에게 배움을 청했었다. 성혼을 스승으로 삼은 동문제자 사이였고, 직접 만났거나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는 아니었다. 아마 성혼을 통해 상대방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방준은 조헌을 존경했다. 조헌의 학문과 식견으로 보아 ‘동방의 참된 선비’이고 임진왜란 때에는 직접 의병을 모아 싸우다 전사한 충신이요 절의의 선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헌의 글 가운데 충의를 담은 것을 모아 1614년 즈음에 『항의신편(抗義新編)』 엮였고 1621년 경에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알렸다. 특히 그는 당대 제일가는 화공이었던 이징(李澄)에게 요청하여 그림까지 넣었다. 조헌의 충의를 드러내는 데에 정성과 진심을 담은 것이다. 이 일은 안방준 스스로 택했고 수행한 자발적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헌 자식들의 일까지 발 벗고 나서서 챙긴 것이다. 평소 친하게 알고 지낸 이를 챙기기도 쉽지 않다. 그 자식까지 챙기는 일은 더 어렵다. 그러나 안방준은 친하고 소원하고를 따지지 않고 충의를 기준으로 따졌다. 조헌은 그 기준에 가장 먼저 부합한 인물이었다. 안방준은 조헌을 현충(顯忠)하고 보훈하는 데에 진심과 정성을 들인 것이다.
현충 노력, 그 진심이 통하다 안방준의 현충과 보훈의 일은 조헌에 그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진행 중이던 1596년에 『진주서사(晉州敍事)』을 엮었고 『임정충절사적(任丁忠節事蹟)』(1615) ,『삼원기사(三寃記事)』(1615), 『호남의록(湖南義錄)』(1616), 『백사논임진제장사변(白沙論壬辰諸將士辨)』(1633), 『부산기사(釜山記事)』, 『노량기사(露梁記事)』(1645) 등을 엮었다. 1632년에는 당대 실세였던 이귀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는 고경명과 고종후 부자의 의병활동을 자세하게 썼다. 「진주서사」는 1593년에 있었던 진주성 전투를 기록했는데 의병장 김천일, 최경회의 활약과 그에 소속된 의병들의 이름과 행적을 썼다. 「임정충절사적」은 송상현, 김여물 등을 포함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사한 8명의 사적을 썼다. 「삼원기사」는 김덕령 김응회 김대인 등 세 사람의 일을 기록했는데 이들은 의병으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죽은 사연을 썼다.
「호남의록」은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했던 16명의 행적을 담았다. 1607년에 안방준이 윤근수를 만났을 때 윤근수는 호남 의병장으로 고경명과 김천일만 안다고 하면서 호남 의병장으로 어떤 이들이 있는지 물었다. 안방준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적잖이 놀랐을 듯하다. 그는 호남에서 살았기 때문에 누가 언제 누구와 함께 의병을 모아 어떤 활약을 했는지 보고 들어서 잘 알았다. 하지만 호남 지역 밖의 사람들은 고경명이나 김천일만 알고 있었다. 아마 고경명은 조헌과 금산전투에서 전사했고, 김천일은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의병장들의 이름과 행적은 호남 지역 바깥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안방준은 호남 의병장들을 기록하기로 결심하고 16명을 꼽았다. 그들의 충절과 의기를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책임감이 발동한 것이다. 「부산기사」 「노량기사」는 이순신의 활약을 기록했다. 안방준은 이순신, 조헌, 고경명, 김천일 등의 활동을 기록하여 그들의 충의를 세상에 자세하게 알렸다. 그러나 이 글들의 진정한 가치는 또 다른 데에 있다. 장군이나 의병장들의 전투를 그려내면서 안방준은 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과 행적도 함께 기록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자 의로운 마음으로 기꺼이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전사한다 해도 특별히 돌아봐줄 사람도 마땅히 없는 이들도 많았다. 안방준은 이런 사람들을 주목하고 기록했다. 윤근수처럼 호남 밖에 있던 이들은 호남 의병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호남 의병들의 이름과 행적, 충의가 널리 알려진 것은 안방준의 진심 어린 현충 작업의 결실이었다. 이 진심이 통해서였을까. 그의 저작들에 대해 당시 사람이나 후대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이정구는 안방준이 아니었다면 조헌의 사적은 매몰되어 후대에 전해지지 못했으리라고 단언했다. 영조는 『항의신편』을 읽고 조헌의 충의에 감탄하여 그의 사당에 제사를 내리기도 했다. 안방준의 기록 덕분이다. 조익은 「호남의록」 서문에서 ‘16명의 이름이나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고 어떤 이들은 평범한 병졸이어서 그 일과 행적이 널리 전해질 수 없고 없어질 염려도 있다’고 하면서 안방준 덕분에 충신과 의사의 공적이 없어지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또 그를 애도하는 시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노력한 결과 조헌의 의열이 빛나게 되었고, 호남에서 의리에 죽은 이들, 진주성에서 순절한 이들의 사적을 직접 수소문해서 기록하여 후대에 전해지게 했다.’면서 안방준의 현충 노력이야말로 평생 사업이었음을 회상했다. 체험에서 기록까지 안방준이 충의를 드러내고 보훈에 진심이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릴 때부터 바르지 않는 것은 안했다는 그의 곧음과 의로움이 바탕이 되었을 터이다. 거기에 아마도 의병 활동에 참여한 일도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의 스승인 박광전이 보성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안방준도 참여하여 연락 참모 역할을 맡아 양호도체찰사였던 정철에 파견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김장생이 안방준을 의병장으로 추천하자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전주와 청주로 갔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보성, 장흥, 능주 등지에서 의병들을 모았고 여산까지 갔었다. 이때 의병에는 생원이나 노비들도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의병 활동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일인지 체험했을 것이며, 의병에 참여하기 위해 마음을 내는 일 곧 충의의 마음으로 죽을 위험까지 무릅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했을 터이다. 더구나 평민 천민들이 의병에 참여하여 전사한다면 그들의 이름과 행적은 흔적도 없어지리라는 것도 알았으리라. 의병활동에 몸 던진 사람이 아니라면 절실함을 알 수 없던 것을 그는 온몸으로 느꼈다. 또 그렇다한들 안타까워만 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그들의 이야기가 시간에 파묻혀 버린다. 안방준은 수소문하고 기록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의병을 위한 지금의 보훈적 사업이나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안방준의 현충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평범한 이들의 충의에 주목한 남다른 시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낸 현충의 노력을 기울인 인의로운 마음은 보훈의 달, 현충의 달에 다시 음미해볼 일이다. <도움 받은 글>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한국학자료포털, https://kostma.aks.ac.kr 『(국역)은봉전서』(2002), 보성문화원. 박미향(2010), 「은봉 안방준의 절의사상」, 『역사학연구』 38, 호남사학회. 안동교(1998), 「은봉 안방준의 진유적 삶의 여정」, 『향토문화』 18, 향토문화개발협의회. 안동교(2014), 『은봉 안방준 종가의 옛 서간집』, 신조사. 안방준 저, 신해진 역(2013), 『호남의록.삼원기사』, 역락. 유미나(2010), 「임진왜란 의병장 조헌의 행적을 그린 『항의신편』 판화 고찰」, 『강좌미술사』 35, 한국불교미술사학회. 이욱(2025), 「은봉 안방준의 의병활동과 당대사 저술」, 『사총』 114, 고려대 역사연구소. 황의동(2003), 「은봉 안방준의 학문 연원과 학풍」,『한국사상과 문화』 21, 한국사상문화학회.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
![]()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