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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유학문선] 다이쇼 정변과 한국의 독립 게시기간 : 2019-09-12 07:00부터 2030-12-30 01:01까지 등록일 : 2019-09-10 17:34

조회수 :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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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유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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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학산책
2019년 9월 12일
아홉 번째 이야기
   

다이쇼 정변과 한국의 독립

1912년 청국의 황제 선통제가 퇴위했다. 일본의 천황 메이지가 사거했다. 중국은 조선과 인연이 깊은 위안스카이가 총통이 되었다. 일본은 번벌 타도와 헌정 옹호를 외치는 국민운동 속에 다이쇼 정변이 성사되었다. 이 격변기에 조선의 전 황제 고종은 밀지를 내려 광복을 지시했다. 밀지를 받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이 된 임병찬은 생각했다. 중국은 민국이 되었다. 일본은 민당이 득세하고 있다. 우리도 민권을 앞세워 합세한다면 독립을 회복할 수 있을까?

 

[번역]

Q : 일본 민당(民黨)이 대한을 독립시켜 국권을 돌려줄 뜻으로 논의가 있어서, 그사이에 어쩌면 어쩌면 하는 희망이 있다는데 어떠한가?

A : 이 기회가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더러 그런 것이 있으니 한껏 생각하고 묵묵히 이해하지 않는다면 어찌 저들을 알겠는가? 다만 이 기회를 누설해서는 안 되니 십분 입 조심해서 대사를 그르치지 말라.

내가 붙잡혀서 대마도에 있을 때에 일본 역사책을 보았는데 일본 임금의 비조인 신무천황(神武天皇)은 곧 옛날 영웅호걸의 군주였다. 나라의 제도를 정하는데 황제는 궁중 깊숙한 데 편안히 거처하며 나랏일에 관여하지 않고 정권과 군권을 모두 막부(幕府)에게 주어 자유롭게 처리하게 했다. 나라의 흥폐와 존망이 모두 막부에게 있었고 황제와는 무관하니 우리나라 속담에서 말하는 ‘예황제(例皇帝)’였고 막부는 곧 관백(關伯)이었다. 이 때문에 나라를 누린 것이 이천여 년이니 어찌 아름답고 성대하지 아니한가? 사물이 오래되면 변하는 것은 이치가 항상 그러하다. 천지도 개벽하는데 하물며 일본 군주이겠는가? 메이지가 막부를 폐하고 스스로 주관함이 곧 망국의 조짐이었다. 임금이 인의와 덕화로 다스리면 그 운수가 오래가고 권사(權詐)와 강포(强暴)로 주관하면 그 운수가 촉박하다. 영특(英特)한 오패(五霸)도 모두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 폐지되었고 웅강(雄强)한 진시황도 이세에 이르러 망했으니 천리의 밝음을 헤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메이지가 필시 당세에 멸망할 줄로 생각했는데 다이쇼까지 전해지니 의아하긴 하지만 다이쇼는 아마 이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또 그 때 통역 카와카미(川上)에게 들었는데 메이지 개화할 때 막부는 공작에 봉하고 36국의 국주(國主)는 후작에 봉했는데 봉록은 후하지만 은행에 예치해서 이자를 취해 매달 지급하니 감금된 것과 똑같은지라 저 37인의 수하의 좌사(左使)가 어찌 불평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옛날로 돌아가려는 음모가 성사되기 전에 먼저 누설되는 바람에 걸려들어 죽기도 하고 처결되어 복역하기도 하니 더러 장사치로 이름을 걸고 더러 노동자로 자취를 감추었다. 수십년 이래 이미 사망한 경우엔 자손의 원한이 뼈에 사무치고 아직 살아 있으면 당사자의 분노가 하늘가에 닿아 좋은 기회를 엿보는 자가 모두 민당(民黨) 사람들이다. 메이지 사후 비로소 운동이 싹터서 민당은 번벌(藩閥)을 벽파(劈破)하고 ‘공화(共和)’와 ‘자강(自强)’을 논의한다고 한다. 번벌은 조선과 만주와 대만인데 조선 총독부와 만주와 대만의 두 곳 도독부(都督府)에 매년 경비가 수억만원 이상이라 외국의 채권을 들여오고 국내의 세금을 증대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고 백성을 지키지 못하니 ‘벽파’가 옳다는 것이고, ‘공화’는 황제를 폐하고 대통령을 세워 민주공화라 하니, 이것이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음이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 논의에서 번벌 벽파는 객이고 공화자강이 주인데 만약 공화하면 전일 막부가 대통령이 되고1) 36국이 국주를 회복하면 다이쇼는 청나라 선통제(宣統帝)와 비슷해지고 정당은 전일 막부의 좌사와 비슷해지니 정당 중에 어찌 이 계책을 간파할 사람이 없겠는가? 때문에 데라우치 등이 철두철미 결사적으로 불응하고는 “총독부 경비를 본국에 심려 끼칠 필요가 없으니 각각의 해당 지방에서 주선해서 미봉할 일이오 번벌을 벽파하면 이는 스스로 쇠약해짐이라 어떻게 열강에게 위세를 보이겠는가?”라고 말했다. 가을에 정당이 몰래 국회 정지와 민당 파괴를 의논하는 음모를 꾸미다 민당에게 간파되어 민정이 크게 동요해 지금 양력 12월 20일 후에 국회를 열려고 하지만 정당이 백계를 써서 반대할 것이니 이것이 그렇지 않음이 있다는 것이다.

정당이 이렇게 버티고 반대할뿐더러 통론하면 일본이 허다한 해 공을 들여 천만 파운드 국채를 써서 간신히 합방(合邦)하고 개명정치(開明政治)라 이름하여 병참을 연결하고 도로를 수축하며 토지의 매입과 본국인 식민 등 허다 사업이 천만 년 계책일 듯한데 어찌 대번에 국권을 돌려주고 물러갈 수 있겠는가?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거기에 그런 것 같음이 있음은 어째서인가? 한국을 독립시켜 국권을 돌려주자는 논의가 합방하자는 계책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저들은 반드시 “어쩌자고 합방해서 열강에게 주목받으며 매년 본국 재정을 취해 총독부 경비를 보조하느냐? 조선 인심이 열복한다 하지만 이른바 열복은 불과 일진회(一進會)와 구정당(舊政黨)이고 아첨은 재산가가 자기 지키는 계책이고 나머지는 모두 불평당(不平黨)이다. 청과 러시아 두 나라가 유감을 품은 지 몇 년 되니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염려가 없지 않은데 만약 개전하는 날 조선 불평당이 바깥과 체결하고 폭동을 일으키면 이는 안팎으로 적을 맞이하는 것이다. 만약 독립을 돌려주고 옛 황제를 세우면 임금과 백성이 모두 우리 은혜에 감사하리니 그런 뒤에 군권과 정권을 우리가 굳게 쥐고 만약 불평당이 있으면 황제의 명으로 압제하면 만전의 계책이라 이를만하다.”고 할 것이다. 이 계책이 뛰어나다면 뛰어나다 하겠지만 정당이 필시 끝내 기꺼워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이 있는 날에는 국권을 돌려줄지 여부를 아직 기대할 수 없지만 다만 민당의 계책은 한국 독립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음모를 품어 천황을 폐하고 대통령을 세우고 36국을 회복하는 것이 커다란 욕망이다. 저들 나라 형세로 논하면 메이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2)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3) 가쓰라 다로(桂太郞),4)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5)가 이미 죽었고 남은 사람은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6) 등 한두 사람이고 민당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7)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8)도 민당 사람들이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9)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10) 시누카이 쯔요시(犬養毅)11)가 모두 국내 명망인이다. 다이쇼는 암약하고 정당은 고단하여 1차 거조12)가 그치지 않으리니 내 생각에는 오는 봄 국회 후에 큰 변란이 있을텐데 민당이 득세하는 날 우리나라도 민권을 명분으로 거국적으로 합세하여 움직인다면 좋은 도리가 될 것 같다.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할텐데 안타깝고 근심스럽다.

 

[원문]

問日本民黨이大韓獨立還權之意로有論하야其間에有幾乎幾乎之望云하니何如오曰此機가似然而有不然者하고似不然而有或然者하니若不窮思默會면何以知彼리오但此機를不可洩이니十分愼口하야毋誤大事하라余俘在對馬島時에得見日本歷史하니日主鼻祖神武天皇은卽往古英傑之主也라定其國規호대皇帝난深宮安居하야不與國事하고一應政權軍權등을付之幕府하야使之自由하니興廢存亡이都在於幕府오無關於皇帝라我國諺傳에所謂例皇帝也오幕府는卽關伯也라以是而享國二千餘年하니豈不美且盛哉아物久則變은理之常也라天地도開闢커든況日本君主乎아明治之廢幕府而自主가卽亡國之朕也니라君以仁義德化治之則其祚가長하고以權詐强暴로主之則其祚가促하나니以五霸之英特으로도並無過一世而廢오以秦皇之雄强으로도至二世而亡하니天理昭然을可不逆推乎아吾料明治之亡이必在當世러니傳至大正하니亦可訝也라然이나大正은其不免乎인져且聞其時通譯川上하니明治開化時에幕府난封公爵하고三十六國國主난封侯爵하고俸祿雖厚나儲於銀行而取其利子하야每朔支給하니便同監禁이라하니那三十七人手下左使가安得無不平之心乎아復舊之陰謀가未成而先洩하야有罹死者하고有處役者하니或托名於商賈하고或晦跡於勞働하야數十年來에或已沒而子孫之怨恨이刻骨하고或生在而當者之忿怨이徹穹하야惟伺好機者가皆是民黨中人也라明治死后에始乃萌動하야民黨이有劈破藩閥하고共和而自强之論이라하니藩閥者난朝鮮滿洲臺灣야니朝鮮之總督府와滿洲臺灣兩處都督府에每年經費가不下數億萬圜이라借外國之債하고增國內之稅하야國將亡而民莫保하니劈破가可也오共和者는廢皇帝立大統領하야民主共和也라하니此是似然者而其有不然者난何오此論中에劈破藩閥者난客也오共和自强者난主也니若共和則前日幕府가爲大統領하고三十六國이復其主하면大正은似淸國之宣統이오政黨은似前日幕府之左使也리니政黨中에豈無識破其計者耶아所以로寺內等이埋頭抵死而不應하고乃曰總督府經費를不必貽慮於本國이라自各該地方으로周旋彌縫이오藩閥劈破하면是自弱也라何以施威於列强고하야秋間에政黨이秘議停國會破民黨之謀러니爲民黨之所識破하야民情이大動하야今以陽曆十二月念後에開國會나然이나政黨則百計反對하리니此是有不然者也오政黨이如是持貳할뿐더러統而論之하면日本이績許多年工夫하고費千萬鎊國債하야纔爲合邦하고名以開明政治하야聯絡兵站하고修治道路하며買土植民等許多事爲가似是萬年之計也니何可遽然還權而退去乎아此是似不然者也로대其有似然者난何오韓國獨立還權之論이高於合邦之策이라彼必曰胡爲合邦하야爲列强之所注目이며每年에取本國之財하야補總督府之經費耶아朝鮮人心이雖曰悅服이나所謂悅服者난不過一進會와舊政黨也오納媚者난無非財産家自保之計也오其餘난皆是不平黨也라淸露兩國이含憾有年하니早晩에不無戰爭之慮라若當開仗之日에朝鮮不平黨이締結暴動하면是는腹背受賊이오今若還其獨立하고立其舊帝하면君民이皆感我恩하리니然後에軍權政權을自我堅執하고如有不平黨이면以其皇命으로壓制之면可謂萬全之策이라하니此計가高則高의나政黨이必終不肯矣리니政黨在日에난還權與否를未可必也로대但民黨之計가不以韓國獨立으로爲重이오乃懷陰謀하야廢帝立大統領하고復其三十六國이是大欲也니以彼國之勢로論之則明治伊藤有栖川宮桂太郞乃木等數雄이已沒하고所存者寺內等一二人이오民黨은山縣有朋長谷川도亦民黨中人也오大隈尾崎犬養毅가皆國內望人也라大正은暗弱하고政黨은孤單하니一次擧措가在所不已라以愚見으로度之則明春國會之後에必有大變矣리니民黨得勢之日에我國도亦以民權爲名하야擧國合動이면庶幾有好道理也니此機를不可失이라可惜可憂로다

 

[출전]

임병찬(林炳贊), 『둔헌유고(遯軒遺稿)』 권4 「관견(管見)」

 

[해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에게 살해된 사건은 세계사에서 유명하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에서 일어난 불길은 삽시간에 번져 제1차 세계대전으로 타올랐다. 사라예보 사건의 직접적 원인은 1908년 10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의 약세를 배경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병합을 선포하고 이듬해 3월 병합을 단행했던 데 있다. 병합이 끝나자 또다른 병합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같은 해 같은 달 한국 병합 방침을 세워 넉 달 후 내각 회의에서 통과시켰고, 다시 이듬해 제2차 러일협약을 거쳐 한국 병합을 공포했다. 러시아 세력이 인접한 발칸반도와 한반도의 두 나라가 그렇게 차례로 이웃 나라에 병합되었다.

 

이로부터 한 해 지나 중국 대륙에서 청국을 타도하는 공화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 세력이 침투해 있던 외몽골이 곧바로 독립을 선포하였고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완충 지역이던 티베트도 독립을 선언했다. 혁명 이전부터 이미 북만주와 남만주에 세력 경계를 확정하고 외몽골과 한국에서의 상대 세력을 인정한 러시아와 일본은 중국의 혼란을 배경으로 베이징 경도를 기준으로 내몽골을 동서로 분할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혁명 이전부터 만주에 대한 문호개방을 추진한 미국의 이해와 맞부딪친 일본은 미국의 파나마 운하 개통이 성사되기 전에 러시아와 제휴하여 동북아에서 세력 상승을 도모하였다. 신해혁명은 중국은 물론 그 주변부에 연쇄적인 변동을 일으켰다.

 

이 무렵 조선총독부 데라우치 총독은 일본 조슈파 육군 번벌의 배타적인 조선 총독 독점을 배경으로 거침없이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조선인은 물론 재조일본인의 언론을 탄압하고 서양 선교사를 압박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대륙 침략을 위한 조선의 인프라 정비, 특히 만주 철도와 조선 철도의 연결이었고, 이를 위해 거듭 내각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또한 청국의 혁명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해 조선에 2개 사단(제19사단, 제20사단) 증설을 추진했고 곧이어 혁명이 일어나자 만주출병과 중국간섭을 주장했다. 결국 2개 사단 증설 문제를 앞세운 육군 조슈 번벌의 공세로 일본 내각이 붕괴했다. 그러나 국민총생산의 45%를 외채로 두고 있는 재정 위기 상황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민중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급기야 번벌 타도와 헌정 옹호를 외치는 국민운동이 전개되었고, 결국 가쓰라 내각이 퇴진하는 다이쇼정변으로 귀결했다.

 

중국과 일본에서의 동시적인 긴박한 상황 전개는 조선의 독립에 대한 기대를 북돋았다. 조선의 고종은 비밀리에 「의대조(衣帶詔)」를 내렸다. “통(痛)하다! 도이(島夷)가 배신하고 합병하니 종사가 폐허가 되고 국민은 노예가 되었다... 믿는 것은 너희들이니 너희들은 힘써 광복(光復)하라...이에 혈조(血詔)를 내리니 독립의군부를 조직하라...” 고종의 밀지는 궁내부 전직 관료와 홍주의병 및 태인의병 참여자에게 전달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정세 변화를 살피며 일본에서 민당이 번벌에게 승리한다면 국권 회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고 다이쇼 정변이 일어난 직후인 1913년 3월 실제 거병을 모의했다. 최익현의 태인의병을 조직했던 옥구 향리 출신 임병찬도 여기에 참여했지만 즉각 거병보다는 양병에 힘을 쏟았고 11월 자신의 투쟁 방략을 담은 글 「관견」을 지었다. 이듬해 5월 임병찬은 체포되었고 조직은 와해되었다. 그는 오쿠마 총리와 데라우치 총독에게 거듭 편지를 보내 한국의 국권 회복을 주장했고, 결국 거문도에 유배되어 순국하였다.

 

중국의 신해혁명과 일본의 다이쇼정변, 그리고 한국의 독립의군부는 한 편의 세계사이다. 이 세계사에 참여한 임병찬의 「관견」은 천하 대세와 시국 형편, 그리고 지피지기의 통찰을 발휘한 글이다. 금년 2019년의 세계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견은 무엇일까?

 

1) 전일 ~ 되고 : 도쿠가와 종가 제16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사토(德川家達, 1863~1940)는 1914년 야마모토 내각이 붕괴한 후 수상 후보로 거명되었으나 도쿠가와의 정권 관여를 사양한다고 말하고 사퇴했다.

2)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 1841년 출생해 1909년 피살됐다. 정치가. 조슈(長州) 번 출신.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문하생으로 영국에 유학을 갔고 메이지유신 후 조슈번 번벌의 유력자로 1885년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 이래 여러 차례 일본 내각을 이끌었다. 제2차 내각 때 청일전쟁이 일어나 이듬해 전권대사가 되어 ‘朝鮮獨立’을 포함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1898년 제3차 내각을 조직했으나 야마가타 아리도모(山縣有朋) 세력에 밀려 정계를 떠나 외유하며 한국의 고종, 청국의 광서제와 회담했고, 이듬해 전국 유세를 거쳐 1900년 立憲政友會를 창립해 입헌정우회를 중심으로 제4차 내각을 조직했다. 육군 벌족 세력인 야마가타 아리도모, 가쓰라 다로의 영일동맹에 반대하고 러일협상을 주장했고, 한국 통감부 초대 통감이 되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다. 한국의 의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1909년 4월 한국병합을 결정하고 통감을 사직했다. 동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었다.

3)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 다케히토 신노(威仁親王)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가와노미야는 에도시대부터 존재한 세습 친왕의 궁가로 1625년 요시히토 신노(好仁親王)가 창설했는데 처음 당호는 다카마쓰미야(高松宮)이었다. 다케히토 신노는 이 궁가의 10대 친왕이다. 1862년 출생해 1913년 타계했다. 군인. 해군대장을 지냈다.

4) 가쓰라 다로(桂太郞) : 1848년 출생해 1913년 타계했다. 일본의 군인. 정치가. 청일전쟁에 참전했고 제2대 대만 총독을 거쳐 메이지 내각의 수상이 되었다. 가쓰라 제1차 내각(1901~1905) 때 영일동맹과 러일전쟁이 있었고, 가쓰라 제2차 내각(1908~1911) 때 한국병합이 있었다. 본래 야마가타 아리도모(山縣有朋)의 벌족 세력이었으나 자립을 추구, 가쓰라 신당을 추진해 가쓰라 제3차 내각(1912~1913) 때 신정당을 세웠다. 이 기간 호헌운동이 일어나 결국 퇴진하고 말았다.

5)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 1849년 출생해 1912년 타계했다. 일본의 군인. 교육자. 청일전쟁과 대만전쟁에 참전했고 대만총독이 되었다. 러일전쟁에 참여해 뤼순 포위 작전으로 명성을 떨쳤다. 1907년 가쿠쇼인(學習院) 원장에 임명되었는데 메이지가 가큐쇼인에 입학한 자신의 아들(훗날의 쇼와)의 양육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1912년 9월 메이지의 대상이 치러진 날 자살했다.

6)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 1852년 출생해 1919년 타계했다. 일본의 군인. 정치가. 1901년 가쓰라 제1차 내각에서 육군대신이 된 이래 내각에서 여러 차례 육군에 관여했다. 1910년 제3대 한국 통감이 되었고 곧 병합조약을 거쳐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이 되어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1916년 조선총독을 사임하고 일본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했다. 1918년 일본 각지의 쌀 폭동을 군대로 진압했고 결국 사직했다.

7)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 1838년 출생해 1922년 타계했다. 일본의 군인. 정치가. 1885년 내각제도가 시작되자 초대 내무대신이 되었다. 육군대신을 거쳐 제3대 총리대신이 되었고, 청일전쟁 당시에는 제1군 사령관으로 러일전쟁 당시에는 참모총장으로 활동했다. 가쓰라 다로와 데라우치 마사다케 등 계파 벌족 세력을 키워 일본 정계를 좌우했고 이토 히로부미 사후 정치력을 더욱 증대했다. 1913년 호헌운동이 일어나 가스라 다로 제3차 내각이 무너진 배경에는 야마가타 벌족 비판의 사회적 확산이 있었다.

8)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 1850년 출생해 1924년 타계했다. 일본의 군인. 정치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전공을 세웠다. 1904년 육군대장으로 승진해 한국 주차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1916년 데라우차 마사다케의 뒤를 이어 조선총독부 총독이 되었는데 1919년 조선 전역에 일어난 3.1운동에 대한 유혈 강경 진압으로 인해 총독에서 물러났다.

9)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 1838년 출생해 1922년 타계했다. 일본의 정치가. 교육자. 사가번 출신으로 弘道館에서 주자학을 중심으로 유교 교육을 받았다. 메이지 신정부에 참여해 대장성에서 지조개정, 식산흥업을 추진했다. 자유민권운동이 일어나자 입헌개진당을 설립해 당수가 되었고 현 와세다 대학의 전신인 동경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900년 헌정본당의 당수가 되어 1907년까지 이끌었다. 이후 와세다 대학 총장에 취임하고 일본문명협회 회장으로 문화사업을 수행했다. 오쿠마 제2차 내각 때(1914~1916)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산동반도를 점령하고 중국에 21개조를 요구했다.

10)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 1858년 출생해 1954년 타계했다. 일본의 정치가. 1882년 호시신문(報知新聞)의 논설위원이 되었고 오쿠마 시게노부가 설립한 입헌개진당에 참가했고 반구화주의에 앞장섰다. 1898년 문부대신이 되었으나 공화연설사건으로 사임했다. 1900년 이토 히로부미가 설립한 입헌정우회에 참여했다. 1903년부터 1912년까지 도쿄 시장을 역임했다. 동년 가쓰라 제3차 내각 당시 호헌운동에서 입헌정우회를 대표해 가쓰라를 규탄하는 연설로 다이쇼정변을 격발시켰다. 오쿠마 제2차 내각 때 사법대신이 되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기간 보통선거운동, 여성참정권운동에 참여했고,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의회제 민주주의를 옹호하였다.

11) 이누카이 쯔요시(犬養毅) : 1855년 출생해 1932년 타계했다. 일본의 정치가. 1882년 오쿠다 시게노부가 창립한 입헌개진당에 참가했고 『일본 및 일본인』으로 군벌과 재벌을 비판했다. 1890년 제1회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42년간 계속했다. 1898년 제1차 오쿠마 내각에서 공화연설사건으로 사임한 오자키 유키오를 이어 문부대신이 되었다. 1913년 제1차 호헌운동으로 제3차 가쓰라 내각 타도에 기여했고 오자키 유키오와 더불어 ‘헌정의 신’이라 불렸다. 1929년 입헌정우회 총재가 되었으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야당 총재로 총리대신이 되었다. 만주국 승인 문제와 군축 문제로 군부와 대립하다 1932년 5.15사건으로 암살되었다.

12) 1차 거조 : 1913년에 일어난 제1차 호헌운동을 말한다. 일본 각지에서 번벌 타파와 헌정 옹호를 외치는 국민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로 인해 번벌 세력인 가쓰라 내각이 무너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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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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