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1591년 8월 사헌부 감찰의 면신례, 총마계회도(驄馬契會圖) 게시기간 : 2025-05-28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5-05-23 10:3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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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년 8월에 스물네명의 사헌부 감찰 모임과 관련된 그림이 화순에 있다. 그 모임에 참여했던 능주 출신의 감찰 박지수(朴枝樹)선생에게 전존되었는데 밀양박씨 후손들이 귀하게 관리하여 충효사에 소장되어 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한 연유로 모인 계회의 장면을 그린 그림을 ‘계회도’라 하고 사헌부 감찰을 별칭으로 ‘총마’로도 칭하여 <총마계회도(驄馬契會圖)>라 한다. 이처럼 같은 관서의 관원들의 계회도는 동관(同官)계회도라고 한다. 2013년에 국가지정 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되었다. 24인 감찰 중 화순 박지수 계회도 유일본 전래, 보물 지정 사헌부는 흔히 상대, 어사대 라고 불리었고, 사헌부감찰은 품계가 정6품에 해당되는 관직이지만, 여러 관청을 감찰하는 역할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명망있는 인물들이 많이 임명되는 직책이었으며 정원은 24명이었다. 화순 <총마계회도>는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계회도 가운데 1591년의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는 점, 박지수가 소유한 계회도로서 전승경위가 분명하고 처음 제작된 이후 후손가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 16세기 후반기 중앙관청에서 시행된 계회 관행과 계회도의 제작 배경을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는 점, 산수와 점경인물의 묘사가 정확한 16세기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점, 계회도의 장황이 제작 당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16세기 족자본 회화의 장황 복원의 기준 형식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가치 평가를 받아 보물로 승격 지정되었다. 이에 더하여 선조가 지은 〈총마계회도〉의 어제시문에 차운한 24인의 시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박지수는 임진왜란시 호종에 참여하여 순절하였고 아들 박천주는 효도로, 부인 노씨는 박지수의 순절 사실을 전해 받고 자진하여 열행을 실천하였다. 노비[근춘]도 순절하였다, 박지수-박천주의 부자 충효를 기려 충효사(忠孝祠)를 건립하여 제향해 오고 있다. 이 충효사에 <총마계회도가> 소장되어 왔던 것이다. 충효사는 화순군 도암면 벽동길 9-13(벽지리 790)에 있고, 〈총마계회도〉는 2017년부터 국립나주박물관에 기탁되어 관리되고 있다. 그리고 박지수-노씨부인-박천주 충효열 삼강을 기려 국가에서 정려를 내려 삼강정려를 세운다. 충노 근춘의 비도 세운다.
![]() 총마계회도(2003년 도문화재 지정조사 당시)
![]() 총마계회도(2008년 보존처리 후)(사진 화순군 제공) 선조의 어제 시문을 넣어 4단으로 구성 박지수의 <총마계회도>는 표제, 그림, 시문, 좌목의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회도는 일반적으로 명칭과 계회장면, 참석자 좌목의 3단 형식인데, <총마계회도>는 시문이 있어 4단이다. 또 그림부분은 계회장면을 많이 그리는데, 여기에서는 큰 산을 배경으로 구름에 가려진 건물들을 배치하고, 그 앞에 말을 타고 오는 사람과 그들을 엎드려 맞이하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형상화된 것일 터이지만, 백악산 아래 근정전, 그리고 그 아래 건물이 사헌부일 듯 싶다. 사헌부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사헌부의 감찰로서의 직분을 명분있게 수행하라는 의미를 곁들였다 하겠다. 당시 사헌부는 지금의 세종로정부청사 어간이다. 행서로 쓰여진 시문의 끝에 ‘신묘 중추일(辛卯 仲秋日)’이라는 연기가 있어서, 이 계회가 1591년(선조 24) 8월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단의 좌목에는 이 계회에 참석했던 24명의 품계와 이름, 호, 본관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 이들은 정3품 하계 통훈대부로부터 종6품 상계 선교랑까지 품계를 가진 현직 사헌부감찰들이다. 참여자는 이철견(李鐵堅) 이몽상(李夢祥) 원경우(元景遇) 이사건(李思騫) 이여온(李汝溫) 박잠(朴潛) 이구순(李久洵) 남찰(南巀) 장지현(張智賢) 이조(李調) 이경록(李慶祿) 박지수(朴枝樹) 홍여성(洪汝誠) 이원(李薳) 이형(李亨) 송제(宋悌) 이갑(李𢘉) 이기수(李麒壽) 이몽서(李夢瑞) 정덕기(鄭德麒) 허진정(許進廷) 정응성(鄭應聖) 신지제(申之悌) 서성(俆渻)이다. 문과 급제자는 3명(이기수, 정덕기, 신지제), 생원 1명(이조), 진사 1명(남찰), 무과급제자는 4명(이몽상, 박지수, 송제, 정응성)이다. 동생(홍여성)이나 아들(원경우)이 문과에 급제한 경우 등으로 보아 문관이 더 많기는 하나, 무관도 감찰직에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약봉 서성과 오봉 신지제 등 2명은 문집을 남긴다. 다만 문집에는 총마도 어제시 봉화시가 올라 있지 않다. 이 계회 다음해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는 호종, 의병, 참전 등을 하면서 국난 극복의 대열에 나선다. 이몽상과 정응성, 신지제는 고을 수령으로 참전하고, 장지현은 의병, 송제는 진주성 순절, 서성과 박지수는 왕자 호종을 한다. 박지수는 회령에서 순절한다. 1591년에 제작된 <총마계회도>는 시기를 달리한 세점이 전한다. 1591년 2월 4일(신미)과 윤3월 10일 연기가 있는 2점은 안동의 송간 이정회(松澗 李庭檜, 1542-1612)가 주인이다. 이정회는 50세에 사헌부감찰로 5개월 정도 근무했다. 그리고 화순 박지수의 <총마계회도>는 1591년 8월임으로 세점의 계회도의 제작 시기가 이어진다. 이정회 <총마계회도> 2점은 비단에 그렸고, 박지수 <총마계회도>는 종이에 그렸다. 박지수의 <총마계회도> 좌목에는 이정회는 들어 있지 않다. 이정회는 1591년 5월 1일 횡성현감으로 발령을 받고 사헌부를 떠났기 때문이다. 이정회의 <총마계회도>는 1900년대 초반까지 경북 안동의 진성이씨 가문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다가 지금은 호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점의 <총마계회도> 좌목에는 각 24명씩 올라 있는데, 중복된 경우를 제하면 모두 44명이다. 윤3월 10일 계회도에 10명, 8월 그림에 10명이 각각 새로 들어간다. 이렇게 보면 새로 임명된 감찰이 10명이 되면 모임을 하고 계회도를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화순 <총마계회도>에는 그 앞의 계회도와 비교하면 원경우, 이여온, 장지현, 박지수, 이원, 이기수, 이몽서, 정덕기, 정응성, 서성이 새로 들어 간다. 윤3월~8월 사이 새로 임명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박지수도 이 시기에 새로 감찰에 임명된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모임을 했을까. 신참을 면하여 정식관원으로 인정 받기 위한 면신례 이는 면신례(免新禮)를 행하는 절차였다. 면신례는 신임 관원이 성대한 주찬을 마련하여 선배 관원들을 대접함으로써 신참을 면하여 정식 관원으로 자격을 인정받는 의례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정회가 남긴 송간일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정회는 1590년 12월 22일 사헌부감찰로 낙점되어 12월 24일 사은숙배를 하였다. 이는 관료로 임명된 사람이 궁중에서 임금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어 1591년 1월 17일에 대간들에게 임용을 승인받는 절차가 이루어졌다. 1월 18일에는 각 선배 관원들의 집을 찾아 인사를 올리고 19일에 봉청에 허락하는 허참례(許參禮)를 하였다. 허참 뒤 보름에서 한달 뒤에 면신례를 행하는 관행이었는데, 2월 4일에 면신례를 하였던 것이다. 이 면신례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1591년 2월의 <총마계회도>이다. 이 계회도축을 참석자 수만큼 그려서 나누어 받는 분축은 2월 23일에 이루어졌다. 그림과 좌목 사이에 쓰여진 시문은 임금이 새로 임용된 감찰들을 위하여 내린 것이라고 한다. 화순 <총마계회도>도 박지수가 사헌부 감찰에 새로 임명된 뒤 거치는 면신례 절차로 남은 유물이다. 박지수의 <총마계회도> 그림이나 후손가에 전하는 자료로는 이런 절차에 대해서 알수 있는 자료를 찾기 어렵다. 이정회의 사례로 본다면, 임명, 사은숙배, 대간 승인, 방문 인사, 허참례, 면신례, 임금 시문 하사, 계회도 제작, 분축의 절차가 1591년 7월에서 8월사이 보름어간에 있었을 것이다. 면신례는 면신벌례(免新罰禮)라고도 하는데 보통 주연(酒宴)을 열어 성대하게 대접하였다. 이 기간 동안 선배 관원들은 온갖 방법으로 신참 관원을 시험하고 인격적인 모독을 가하고 직무상의 곤경에 빠뜨렸으며 심지어 체벌까지 행하였다. 조정에서는 여러번 이를 금지하는 조처를 취하였으나 근절되지 않았다. 이같은 어려움이 있었고, <총마계회도> 제작의 비용까지 마련해야 했음에도 박지수는 사헌부 감칠 직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것 같다. <총마계회도>가 작성되었던 이듬해 임진왜란이 나자 호종에 참여하여 왜적과 대적하다가 순절하여 절의정신을 실천한 충신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1927년 조선사편수회 유리필름 전존, 24인의 총마도 시 전해지는 과정도 알아 보자. 박지수는 임진왜란 때 순절하지만, <총마계회도>는 이후 화순 능주의 본가에서 보존되어 왔던 것 같다. 능주에는 박지수와 아들 박천주의 충효를 기리기 위한 충효사가 건립된다. 처음에는 소규모 제실로 출발했다가 뒤에 충효사라 하다가 조선후기에 훼철되었고, 1924년 충효단, 1956년에 충효사로 복설하였다. 박지수의 본가와 충효사에 <총마계회도>가 보존되어 왔던 것이다. 1927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사할 때 촬영한 <총마계회도> 유리필름 자료가 국사편찬위원회에 남아 있는데 당시 소장자는 박윤동(朴潤東)이다. 그런데 이 1927년의 조선사편수회 조사 자료에 <총마도시(驄馬圖詩)>란 문헌이 있다. 현지 조사하여 필사한 자료이다. <총마계회도>에 실린 시가 <총마도 어제시>라 하여 올라 있고, 좌목의 순서대로 사헌부 감찰 24인의 시가 <총마도 이십사현 봉화시(奉和詩)>라 실려 있다. 이 무렵에 어제시와 봉화시 자료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총마도시>의 맨 끝에 채방은 1927년 9월 홍희(洪憙), 소장자는 전남도 화순군 도암면 박윤동(朴潤東), 등사는 1928년 원정한(元鼎漢), 교정은 1928년 9월, 교열은 1928년 12월 7일의 기록이 있다. 1937년 간행된 『조선사료집진』 제2집에 사진과 함께 설명이 실리면서 소장자가 임윤동(林潤東)으로 표기되는데 오류로 보인다. 『조선사료집진해설』 제2집에는 <총마계회도>의 시문이 ‘선조 진필(眞筆)로 전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1946년에 박지수의 유고인 『모봉유적(茅峯遺蹟)』이 간행된다. 이 유고집에 <총마계회도>의 시문이 <선묘조 어제 총마도시>라 실려 있다. 그리고 계회도의 표제인 ‘驄馬契會圖’의 전서체, 시문, 참여자의 좌목이 올라 있다. 좌목 가운데 이경록의 본관이 계회도에는 전의(全義)인데, 『모봉유적』에는 전주로 올라 있다. 이어 감찰 24인의 <사헌부 감찰 이십사공 갱(賡) 어제시>가 실린다. 어제시와 24현 시는 밀양박씨찰방공파(권1)(1976)에도 실린다. 계회도에 실린 어제시와 박지수의 봉화시를 옮겨 본다.
![]() 총마계회도(조선사편수회, 1928/국사편찬위원회 유리필름)
![]() 총마계회도(조선사료집진 제2집, 1937)
![]() 총마계회도 표제 시문, 좌목 임서(모봉유적, 1946)
충효사 문서더미에서 발견, 향토유산→도지정→국가 보물 조사와 지정의 과정도 살펴 보자. 박지수 <총무계회도>는 충효사 고문서와 함께 2001년 7월 22일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충효사에 대한 향토문화유산 지정 논의가 있어 현지를 방문한 심홍섭 화순군 문화재전문위원이 충효사 한켠에 둘둘 말아진 ‘문서 뭉치’를 확인하다가 이 <총마계회도>를 발견하였다. 말 그대로 보물이 드러난 것이다. 소중하게 관리를 권고하고 조사(홍영기교수)를 하여 화순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전남도청과 협의를 하였다. 2002년 전라남도에 신청되어 조사를 거쳐 2003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다. 2008년에 보존처리를 하고 2009년 전라남도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하여 문화재청(국가유산청)에 보물 승격 지정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2011년 지정 조사를 실시하고 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화순 <총마계회도>의 주인공 박지수(1562~1594)는 능주 당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성품은 강직하였으며, 1580년에 무과 병과 제22인으로 급제하였다. 1591년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1592년에 왜군이 쳐들어오자 왕자(臨海君)와 대군(順和君), 장계군(長溪君) 등의 함경도 피난길을 호위한 임무를 맡았다. 그러던 중 회령부에서 왜적을 만나 사흘동안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가 이내 순국하였다. 가노(家奴) 근춘(斤春)이 유해를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와 소식을 전하자 부인 노씨(魯氏) 역시 남편의 뒤를 이어 자진(自盡)하였다. 이를 지켜본 가노 근춘도 뒤따라 자절(自絶)하였다. 이로 인하여 집안에서 그 충절을 “일문삼절(一門三節)”이라 일컬었다. 『호남절의록』(1799년)에 올라 있다. 1869년(고종 6) 통정대부에 증직되었고, 1870년 명정되어 화순군 도암면 정천리에 정려가 건립되었다. 1956년에 충효사를 복설했다. 고당 김규태가 상량문을 지었고 성균관장 김창숙이 묘정비문을 지었다. 여력재 장헌주와 송사 기우만이 행장을 지었다. 박지수, 임진왜란 때 왕자를 호종하다 회령에서 순절 임란 이전인 1591년 8월에 그려진 <총마계회도> 소개로 시작하였는데, 그 주인공 박지수가 임진왜란 때 호종에 나섰다가 순절한 충신이었음도 살펴 보았다. 한국학호남진흥원의 호남국학DB에는 1888년에 송철헌이 지은 박천주의 묘표가 올라 있다. 박지수의 아들로 충효사에 배향되었다. 1956년에 고당 김규태와 박도동이 지은 충효당 상량문, 1957년에 충효당 건립 관련 성균관의 답통 등도 있다. 남도의병역사박물관 관련 자료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박지수의 무과 급제 홍패(교지)와 노씨부인 증직 교지, 분황 교지 등도 함께 전하여 2001년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가 되었으나 뒤에 손을 탔던지 지금은 2003년 찍은 사진만 남아 있다. 또 하나 더 탐구해 볼 것은 북관대첩의 농포 정문부와 관련성이다. 박지수는 왕자를 호종하다가 회령에서 순절하였는데, 정문부 의병장의 대첩도 일본군에 잡힌 왕자를 구하고 반적들을 물리친 전투와 관련이 있어서이다. 호남진흥원에서 간행한 『농포집』 역주본에 정문부가 「반란의 역적 회령의 국경인과 명천의 말수 등을 죽이고 올린 장계[誅叛賊會寧鞠景仁明川末秀等狀啓]」에 “본도의 산천은 험하고 높으며 거리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약간의 사대부 뿐 아니라 왕자 두 분과 그를 모시고 온 영부사와 부원군, 승지 등이 왜병을 피하고자 이 성에 들어와 있었습니다.”라 한 것이나, 이 장계에 병조좌랑 서성이 언급되고 있는데, 서성(徐渻, 1558~1631)은 <총마계회도>에 올라 있어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한편, 1591년 당시 같은 사헌부 감찰로 계회에 참여한 흥양(고흥)출신의 남양송씨 송제(宋悌, 1547~1592)도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진주성에서 순절을 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정려가 내려진다. 이 정려(고흥 송씨 쌍충일열각)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1591년 제작되어 유일본으로 전하는 화순 박지수의 <총마계회도>. ‘행정을 검사하고, 백관을 사찰하고, 풍속을 바로 잡으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 주며, 외람되고 헛된 행위를 금지하는 일을 맡는다’(『신증동국여지승람』)는 사헌부의 위엄을 보여주며 감찰과 언론의 역할을 충실히 하라는 다짐의 자리를 계회도에 담았다.
![]() 박지수 무과급제 홍패(심홍섭 제공)
![]() 충효사 ![]() 밀양박씨 삼강려 충신 박지수 편액
![]() 충노 근춘비 *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
『송간일기(松澗日記)』(이정회(李庭檜) 『농포집』 (정문부) 『모봉유적』 『조선사료집진』 제2집, 1927 『총마도시(驄馬圖詩)』 『조선사료집진해설』 제2집, 1938. 『밀양박씨찰방공파세보』, 1976 윤진영, 「송간 이정회(1542~1612) 소유의 동관계회도(同官契會圖)」, 『미술사학연구』230, 2001. 최열, 『옛 그림 따라 걷는 서울 길』, 서해문집, 2012. 회의자료 향토문화유산 회의자료, 전라남도 문화재위원회 회의자료, 문화재청(국가유산청) 문화재위원회회의자료 누리집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한국고전종합DB, 호남국학종합DB, 국가유산청, 전라남도, 화순군청 글쓴이 김희태 전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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